25화
얀이 눈이 뒤집혀 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이니 잠깐 삐끗하면, 무슨 짓을 할 줄 몰랐다.
그때 자크가 가슴을 내밀며 나섰다.
“주인을 협박하는 불충한 자에게는 죽음뿐이다. 물러서라.”
“뭐가 어쩌고 어째? 이런 하룻강아지 같은 새끼가….”
얀이 가소롭다는 듯이 소리쳤고, 산샤도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얀의 검을 한 번은 받아쳤다지만, 눈 돌아간 놈에게 덤벼서 어쩌겠다는 거야?
다른 기사들이 ‘어어어’ 소리만 내고 가까이 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어?
“검에 능해?”
슬쩍 묻자 자크가 속삭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걸레질할 때 말고는 처음 잡아 봅니다. 아깐 요행으로 받아친 겁니다.”
뭐라는 거니?
미쳤구나.
몰라서 덤비는구나.
얀이 얼마나 실력자인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자크가 그럴듯하게 자세를 잡더니 외쳤다.
“제가 얀을 막고 있을 테니까 가십시오.”
“어쩌려고 이래?”
“기사가 되어 봤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모셔서 영광이었습니다.”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것이 진심으로 죽을 작정인 것 같았다.
영광은 무슨 영광이야? 얼마나 모셨다고….
어떻게든 살아나갈 생각을 해야지, 죽을 생각부터 하니?
“그만해. 죽으라고 기사 만들어준 게 아니니까.”
“저라도 가주님을 지켜드려야….”
얀이 버럭, 치고 들어왔다.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 …남은 이야기는 저세상 가서 나누도록 해라.”
얀이 검을 바꿔 잡고 ‘이야아아’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다.
챙!
어억!
기사단이 소리를 지르고, 산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이건?
“비켜라, 이놈!”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뱅뱅뱅 무엇인가를 돌리고 있었고, 그에 얀의 검이 거기에 맞아 튕겨 나간 거였다.
쉑쉑쉑.
돌아가는 게 어찌나 빠른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덩어리가 외쳤다.
“뭐 해요, 얼른 달리지 않고!”
산샤는 자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달려, 자크!”
그들은 달렸다.
합숙소 밖의 안전한 세상으로.
* * *
산샤와 덩어리 그리고 자크는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본관이 보이자 덩어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이고, 더는 못 가겠네. 좀, 좀, 좀…. 아! 쪼옴이요.”
다 죽겠다면서도 목청은 쩌렁쩌렁했다.
“아니타?”
덩어리, 아니 아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위기를 넘겼다.
딱 맞게 나타나 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렇지만….
“아니타, …그게, …그 꼴이 뭐야?”
“뭐요? 이거요?”
아니타가 투구를 뒤집어씌운 양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거 머리에 쓰는 건 줄은 알지?”
“알죠.”
아니타가 투구를 쓴 손을 들어 투구를 쓴 머리를 통 때렸다.
“아니이…, 이렇게라도 하니까 막 무서워서 기사들이 꼼짝 못 했잖아요.”
“그래, 그랬지. 아주 잘했어.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면서 산샤는 웃었고, 멀뚱멀뚱 눈치를 살피던 자크도 흐흐흐 웃기 시작했다.
“…이봐요, 거기. 이거 좀 잡아당겨요.”
자크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아니타의 손에 씌워진 투구를 잡아당겼다.
쑥 벗겨지자 아니타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 손도 자크에게 내밀며 산샤에게 말했다.
“이제 제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아시겠죠? 어디 있는지 가주님을 찾아내고, 위험에 빠진 가주님을 목숨 걸고 구해냈잖아요. 이렇게 충성스러운 하녀가 어디 있겠냐고요. 예?”
“그래. 훌륭하구나. 급료로 보상하마.”
“우와! 급료 올려달란 소리는 안 하려고 했는데…. 역시 우리 아가씨가 사람 마음을 알아주시네.”
그때 자크가 슬그머니 아니타를 밀어내면서 말했다.
“그런데 가주님. …기사단을 저대로 두시면 안 됩니다. 얀이 얌전히 갇혀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고요.”
“그래. 그래서 막심 경을 찾을 생각이야.”
“디아머드에는 안 계십니다. 저도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막심 경의 가족은 어때?”
“…사실 여인이라느니 자식이라느니,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직접 봤다는 사람은 얀밖에 없어요.”
“정보 길드를 이용해서 찾아야 하나?”
“글쎄요, 아무래도….”
“무슨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니타가 두 사람 사이로 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람을 찾는 거라면, 아드리안 경에게 물어봐요. 거기가 뭐 찾아주는 것도 기가 막히게 한다던데….”
움찔, 갑자기 또!
아드리안 이름이 왜 나와?
산샤는 손바닥을 쫙 펴서 찹, 아니타의 얼굴을 밀어냈다.
“나 혼자 해 볼 거야. 아드리안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산샤는 본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왜 그쪽으로 가세요? 아드리안 경한테 가려면 마구간으로 가야죠.”
“나 혼자 할 거라니까.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산샤는 본관으로 달렸다.
아니타가 헛소리를 더 하기 전에 빨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아니, 가주님! 아드리안 경한테 가자니까요.”
아니타가 소리를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자크도 같이 달렸다.
아니타와 자크에게 따라잡히기 싫어서 산샤는 최고 속도를 냈다.
* * *
산샤는 현관을 힘껏 열어젖혔다.
콰당!
문이 확 열리자, 홀에 서 있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당신이 레이디 산샤로군요. 드디어 당신을 뵙습니다.”
“어?”
“그리움으로 제 심장은 딱딱해져 돌이 되었었답니다.”
뭔 소리야?
산샤는 슬쩍 한발 물러서며 남자를 훑어봤다.
남자가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어 보였다.
예뻐 보이려고 작정하고 제대로 꾸민 얼굴이었으나 어째 끈적거려 보였다.
남자가 화려하게 팔을 휘두르며 무릎을 굽혔다.
“닐스 미켈 남작입니다.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아름답다는 표현이 이토록 아름답지 않게 들릴 줄이야.
남자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얼마나 그리웠던지요. 오래전부터 뵙고 싶었답니다.”
닐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촤르륵 옆으로 떨어지면서 냄새만으로도 엄청 비쌀 것 같은 향수 냄새가 날렸다.
“당신을 보기 위해 들인 비용이 아깝지 않군요.”
치장에는 확실히 비용이 많이 들었겠다만은….
“도무지 기다릴 수가 없지 뭐예요. 제도에서 여기까지 마도구로 한 번에 날아왔답니다.”
그 먼 거리를 한 번에?
‘휘유’ 닐스가 경박하게 휘파람을 불더니,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뭐…, 앞으로는 푼돈에 불과하겠죠?”
제가 말해놓고 또 제가 맞장구도 쳤다.
“그럼요. 마정석 광산의 주인에게 100폰드쯤은 확실히 푼돈이죠.”
마정석으로 100폰드라면 백만 골드쯤 되려나?
미친놈인가?
미친놈이라고 보기엔 너무 멀쩡하게 생겼는데?
“누가 마정석 광산의 주인인데?”
“저요.”
“당신이 어떻게 마정석 광산의 주인이야?”
“그야 당신, 레이디 산샤와 결혼하니까요.”
닐스가 여유만만하게 미소 짓더니 말했다.
“다시 인사드리죠, 레이디. 나는 닐스 미켈 남작, 모리츠 자작님께서 정해놓은 당신의 반려랍니다.”
산샤는 손가락을 그러모아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에 있다면 모리츠 놈에게 날릴 주먹이었다.
감히 반려를 정해 놔?
하필 이런 놈으로?
“당신이 이토록 아름다워서 얼마나 좋은지요.”
스리슬쩍 몸을 갖다 대며, 닐스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산샤의 허리에 감더니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리 와요, 귀여운 사람.”
퍽!
산샤의 주먹이 닐스의 코를 강타했다.
어억!
닐스가 비명을 지르며 코를 감쌌고, 손가락 사이로 주루룩 피가 흘러내렸다.
팍!
산샤는 그러모은 힘을 한순간에 몰아 닐스를 밀어냈다.
휘청 닐스가 뒤로 꺾이더니 그대로 엉덩이부터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다.
그러나 닐스는 피범벅이 된 코를 쓰윽 닦아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놀라셨구나, 레이디. 놀라실 만하지요. 예에….”
웃어?
엉덩이가 깨지도록 처박힌 주제에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했구나.
닐스가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면서도 산샤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그럴 거 없어요. 괜찮아요. 이리 와요. 내 사랑.”
“자크!”
뇌성 같은 산샤의 외침에 닐스가 움찔 놀라 몸을 움츠렸다.
“카모마일의 자크!”
“예, 가주님!”
“저자를 당장 성에서 쫓아내!”
“받들겠습니다, 가주님!”
뛰어와 숨도 고르지 못한 자크가 홱 닐스를 돌아봤다.
닐스가 외쳤다.
“이거, 왜 이래? 이봐, 레이디! 나는 모리츠 자작이 정한 당신의 반려라니까? 저리 물러나지 못해, 물러나라고!”
상관없이, 자크가 무섭게 눈을 치뜨고 다가갔고….
어, 어, 어!
닐스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으으…. 저리 가. 오지 마. 무섭다고!”
산샤는 홱 돌아서, 정원으로 냅다 달리며 또 외쳤다.
“아니타!”
정원석에 앉아 쉬고 있던 아니타가 벌떡 일어섰다.
“예, 가주님!”
“마차를 준비시켜라. 가야 할 데가 있다.”
“…지금이요?”
“당장!”
“아까 가랄 때 갈 것이지.”
아니타는 여전히 헐떡이며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마구간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산샤는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타를 지나쳐 자신이 먼저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 * *
“사법관 모집 공고?”
“예, 사법관이 공고한다고 모집이 쉽게 되겠어요? 사법관 되기가 쉽지 않잖아요. 공부를 얼마나 해야 하는데….”
“될지도 모르지.”
무심한 듯 확신에 찬 아드리안의 대답에 루카는 입을 벌리고도 말을 못 했다.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것이려니.
레이디 관련해서는 무조건 신뢰하는 우리 전하 좀 보게나.
크흠, 루카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 와중에 사무관도 내쫓았다죠. 무지막지한 아니타랑 합세해서요. 사무관을 벌써 건드리면 어떻게 합니까.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게, 어찌나 걱정되는지….”
피식, 아드리안이 웃었다.
그걸 보고 루카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웃음이 나옵니까?”
“울 수는 없잖아.”
“레이디 일이라면 무조건 좋죠? 막 좋죠?”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 깊이 몸을 묻으며 책을 펼쳤다.
더 할 말 없다고. 가라시는군.
어쩔 수 없이 루카는 조용히 물러났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책은 아드리안에게 단단한 방벽이 되곤 했다.
단단하게 껍질을 두르고 견뎌내고 살아남아, 오직 산샤를 위한 시간을 보내 왔다.
이제 산샤가 가주가 되었으니 모리츠 쫓아내고, 진짜로 쭉 행복하면 되겠구나, 했는데….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레이디가 ‘다시 볼 일이 없겠다’러고 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하셨다지?
딴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말려야겠는데….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