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여전히 얀은 눈이 홱 돌아간 채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기사단 예산을 제 맘대로 썼다고요. 가족이든 뭐든 썼다고요. 그래서 쫓겨난 겁니다.”
“아닙니다!”
그때 기사 아닌 종자 자크가 외치며 끼어들었다.
“막심 경은 예산을 선대 백작님의 지시로 썼으나 사용처는 밝힐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산 착복이라니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허억, 기사들이 숨을 삼켰다.
얀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지만, 자크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시 막심 경은 죄를 만들어 씌우려 한다면 결투로 진실을 밝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두 더 조사할 생각을 못 한 겁니다. 막심 경과 결투해서 이길 자가 없었으니까요. 인제 와서 그분이 안 계신다고 아무 죄나 덮어씌우는 건 아주 비겁한 처사입니다.”
“이놈의 새끼가!”
얀이 달려들었다.
자크가 잽싸게 일어나 뒤로 물러났고, 기사들은 ‘어어어’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 헤맸다.
와중에 한스가 얀을 붙잡으며 외쳤다.
“단장! 참아요, 단장!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놔, 놓으라고! 내가 지금 저 새끼를 아주 죽여 버린다!”
얀은 버둥거리면서도 계속 소리쳤다.
“어디서 종자 나부랭이가 평가질을 하고 있어. 기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기사들이 말할 때는 너는 입을 다물란 말이다. 건방진 새끼! 기사는 너한테 하늘이야. 감히 하늘을 뒤집으려 하다니, 이 천한…!”
와장창창.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소리에 얀의 뒷말이 묻혀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 이번에도 계면쩍게 웃고 있는 산샤가 보였고, 그 옆에 병장기가 뒤죽박죽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아까 갑옷도 그렇고, 왜 이렇게 잘 무너지지?”
“허어….”
기사들이 한숨을 내쉬며 축 늘어져 버렸다.
얀도 기력이 빠져나가 움직일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산샤는 자크에게 웃어 보였다.
“자크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줘.”
그러나 자크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얀이 끼어들었다.
“그만 가십시오. 기사단은 한가한 레이디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크의 말은 들어야겠는걸. 자크?”
이번에도 자크가 입을 열기 전에 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종자 주제에 기사들의 일에 나서지 마라. 어딜 끼어들겠다는 거야? …가시라고요, 레이디. 우리는 아주 많이 바쁘단 말입니다.”
“응. 나도 엄청 바쁜데…. 근데 할 일이 하나 생각났지 뭐야.”
“무슨 일이요?”
“잠깐만 있어 봐. 이게 도구가 필요하거든.”
산샤는 엉망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병장기들 사이에서 장검을 잡아당겼다.
끼기기긱.
바닥을 긁으며 끌려 나오는 소리에 기사들은 몸을 배배 꼬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자크, 여기 다시 무릎 좀 꿇어주겠어?”
자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시킨 대로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자크, 성이 뭐지? 어디 출신이야?”
자크가 고개를 저었다.
“성은 없습니다. 미천한 신분에 성씨가 따로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내가 성을 정해주겠다. 너의 성은, …카모마일이야.”
“예?”
“내 어머니가 좋아했던 꽃 이름이야.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다.”
산샤는 검을 들어 올리고 근엄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카모마일의 자크를 기사로 봉하는 의식을 거행하겠다. 디아머드 기사단 그대들이 증인이다.”
“뭐 하는 겁니까?”
쩌렁쩌렁 얀이 소리를 질렀다.
얀의 이마에는 핏대가 튀어나오고 목소리에는 살기가 넘쳤는데 산샤는 태평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종자는 입을 다물고 있으라기에 자크를 기사로 봉하려고 한다.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입은 자크뿐인 것 같으니….”
“감히 지금 누가 누구를 기사로 만들어준다는 겁니까?”
“감히?”
산샤는 눈썹을 치뜨며 얀을 쏘아봤다.
“감히 내 앞에서 ‘감히’라는 말을 써?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거야? 헬가본의 얀!”
산샤의 서릿발 같은 음성이 쨍 울렸다.
“과연! 글라키에스의 현신!”
누군가 중얼거렸고 기사들은 슬쩍 얀에게서 떨어져 산샤에게 다가섰는데, 정작 얀은 눈에 뵈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가주면 가주답게! 가주로서 합당한 짓을 해야지. 어디에서 근본도 모르는 미천한 종자를 기사로 임명한다는 겁니까?”
“디아머드 초대 백작 카이는 미천했던 신분이었으나 제국에 공을 세워 백작으로 봉해졌다. 공만 세우면 신분 관계없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제국의 법인데….!”
“공? 고오옹?”
얀이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공? 걸레질을 잘해서 갑옷을 반질반질하게 만들었다는 공 말인가?”
산샤는 자신이 무너뜨린 갑옷을 돌아봤다.
아! 갑옷을 닦아 놓은 게 자크였구나.
어쩐지 반질반질 예쁘게도 닦여 있더라니!
그렇지만 그 공은 나중에 치하해주자.
“헬가본의 얀, 그대는 여러모로 실망스럽군. 자크의 공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산샤는 검을 짚고 기사들을 둘러봤다.
“카모마일의 자크는 너희들이 가주에게 무례를 범할 때 홀로 예를 취했다. 또한 그대들이 막심 경의 문제를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할 때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 태도에는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산샤는 얀을 노려봤다.
“이보다 더 바르고 정의롭고 용감할 수 있을까? 너희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자크 하나가 더 나은데?”
“뭐가 어쩌고 어째?”
희번덕 눈이 돌아간 얀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바닥에 있는 검을 차올렸다.
뱅그르르 허공에서 큰 원을 그리던 검이 그대로 착 얀의 손안으로 들어갔고, 번쩍 빛을 발했다.
산샤는 근엄하게 외쳤다.
“검을 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나를 베겠다는 거냐?”
기선을 제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그렇지만 뒤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출입구는 멀쩡하게 잘 있었다.
잘하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행이라면 얀도 출입구에 가깝다는 거였다.
도망가다가 붙잡히게 될지도 몰라.
그러나 겁나지 않았다.
겁내지 않아야만 했다.
기사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미덕인 용맹이 누구보다 자신에게 필요했다.
하는 김에 두 번째 미덕인 정의도 실현해야지.
“설마 내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네가 충성을 바쳐야 할 디아머드 가주야.”
흥, 얀이 대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가주면 뭐….”
“쉿!”
한스가 얀의 팔을 잡아당겼다.
“단장, 그만 입을 다무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입 좀 다물어요, 좀!”
그러고는 산샤에게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레이디 산샤. 단장이 가주님에게 검을 겨눈 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요. 가주에게 검을 겨눈 자는 반역자입니다. 목숨으로 그 죄를 물어야 하는걸요.”
이건 꼭, 얀이 가주에게 검을 겨눈 반역자이니 목숨으로 그 죄를 물으라는 말 같은데?
한스가 덧붙였다.
“얀 단장이 그걸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절대로 가주에게 겨눴을 리가 없습니다.”
“없기는 뭐가 없어?”
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예 죽여 없애 버리면 그만이지.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될 거 아냐.”
“단장!”
몇몇 기사들이 안타까운 듯 소리를 질렀다.
“놔, 이거 놔.”
팔다리가 잡힌 얀이 몸부림쳤다.
그 광경이 참….
혼자 보기 아깝게 가관이었다.
산샤는 슬쩍 다시 출입구를 확인했다.
이제는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
자크가 남아 있으니까.
기사로 봉하겠다는 말을 꺼내놓고, 이대로 가버리면 자크 혼자 남아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도망갈 때 가더라도 기사 서임식을 끝까지 해서 자크를 기사로 만들어 놔야지.
산샤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헙, 기사단은 동시에 숨을 삼켰다.
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얀까지 입을 다물고 산샤를 바라봤다.
산샤는 들어 올린 검을 자크의 오른쪽 어깨에 내렸다.
“카모마일의 자크, 그대는 전사의 이름으로 용맹할 것이며….”
다음은 왼쪽 어깨.
“글라키에스의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하도록 정의로울 것이며….”
“뭐냐!”
얀이 소리쳤다.
“기어이 하겠다는 거야? 저 종자 새끼를 기어이 기사로 만들겠다는 거냐고?”
“조용히 좀 해요. 단장. 기사 하나 더 생기는 게 뭐가 어때서.”
산샤는 그들의 소란을 무시하고 마지막으로 자크의 머리에 검을 내렸다.
“약한 자를 돕고 백성의 평안을 꾀하여 얼음강의 자비를 실현할 것이라. …이 검을 받아라.”
자크가 두 손으로 받들어 산샤가 내리는 검을 받았다.
“카모마일의 자크, 그대는 디아머드의 기사로 봉해졌다.”
자크가 검을 받든 채로 차분하게 서약했다.
“항상 기사의 미덕을 실천하며 기사의 명예를 목숨보다 중히 여길 것이며 디아머드에 충성할 것을 서약합니다.”
산샤는 내심 자크의 담력에 혀를 내둘렀다.
얀이 발광하는 동안에도 무릎을 꿇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기사로 봉해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짧은 순간에 급하게 한 결정이긴 했지만, 진짜 기사 될 만한 사람을 기사로 봉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일어나라. 카모마일의 자크. 디아머드의 기사여.”
자크가 일어나서 기사들에게 향했다.
그때였다.
‘이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얀이 덤벼들었다.
챙!
자크가 얀의 검을 받아쳐 냈다.
“오오오!”
기사단 사이에서 탄성이 튀어나왔고, 산샤도 깜짝 놀랐다.
얀의 검을 받아 치다니, 제법이잖아?
자크는 ‘야압’ 기합을 지르며 얀의 검을 날려 버리더니,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방금 것은 내가 기사가 된 것을 축하하는 선공이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뭐, 인마?”
검을 놓친 얀이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검 대신 침이라도 퉤 뱉을 것 같았지만, 자크는 주눅 들지 않았다.
“한 번은 받아주지만 두 번은 용서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시오.”
그러고는 산샤에게 돌아섰다.
“가시죠, 가주님.”
자크의 모습이 어찌나 당당한지 거대한 산처럼 보였고 얀은 찌그러진 부스러기 같았다.
이렇게까지 멋있다니!
산샤는 자신의 안목을 다시 한번 칭찬했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선포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얀은 직무 정지다. 가주의 명을 어기고 가주에게 검을 휘두른 죄는 죽음으로 물어야 할 터. 부단장!”
“예!”
한스가 얼른 한 발 나섰다.
어쩐지 말이 많더라니.
역시 부단장이었군.
“헬가본의 한스입니다.”
“한스 경 그대를 단장 직무 대행으로 명한다. 죄인 얀을 가두고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예!”
한스는 크게 대답하더니,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얀을 묶어라.”
한스와 기사들은 명령을 행하는데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
얀이 배신으로 단장 자리를 차지했으니, 배신으로 그 자리를 잃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터.
산샤는 가뿐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때 얀이 소리쳤다.
“거기 서! 이대로 보내줄 거 같으냐?”
죽이고 싶겠지.
죽여서 없애버리는 게 좋겠지.
슬쩍 돌아보다가 앗, 놀랄 사이도 없이….
쌩. 번개처럼 날아온 얀이 산샤 앞을 가로막고 비열하게 웃었다.
“물러서라! 나는 너의 주인이야.”
산샤의 외침에 얀이 이죽거렸다.
“흥, 허세는…. 지금은 생사가 내 손에 달린 신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