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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23화 (23/97)

23화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무관은 서류를 가슴에 안고서 터덜터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아니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보셨죠? 제가 아가씨에게 어떤 마음인지 확실히 아셨죠?”

“응. 뭐….”

“뭐예요, 그 반응은? 아직 부족해요? 이걸로는 안 되겠어요? 이 정도 정성이면 정말 훌륭한데?”

산샤는 손바닥으로 거침없이 달려드는 아니타의 얼굴을 밀어냈다.

“이렇게 덤비는 것 좀 하지 마.”

“아니…. 반응이 마뜩잖으니까….”

“무례한 아니타!”

“하던 대로 하라면서요.”

“그래, 잘했어.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에게 무례한 게 아주 마음에 들어.”

산샤는 흡족한 마음으로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디 가시려고요?”

“산책”

“같이 가요. 조금만 기다려요. 이거 정리만 좀 하고…. 진짜 많이도 처먹었어.”

주섬주섬 바쁘게 움직이는 아니타를 보며 산샤는 말했다.

“정리 다 한 다음에 나를 찾아와.”

“어디로요?”

“정성을 다해서 찾아봐. 정성이 있으면 찾을 수 있을 거고, 없으면 못 찾는 거지. 정성을 증명해 봐.”

“아니…, 뭐 그런 악랄한 소리를….”

하하하, 산샤는 유쾌하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리고 세상 무엇보다 가볍게 말했다.

“그거 아주 마음에 든다. 지금부터 나는 세상 누구보다 악랄해 볼 참이니까.”

* * *

산샤는 기사단 합숙소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정원을 자랑으로 여겼다면, 아버지는 기사단을 디아머드의 영광이라 부르며 아꼈다.

기사단장 막심을 주축으로 조직된 기사단은, 산샤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산샤가 아버지를 따라 기사단 숙소에 놀러 오면 기사들은 앞다퉈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었다.

어린 산샤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홀린 듯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마다 막심 단장은 끌끌 혀를 차며 그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대체 어떤 놈이 남자는 과묵한 존재라고 했는지, 원….]

단장의 말에 아버지가 대꾸했다.

[수다 떨고 싶은 놈이 했겠지. 한마디라도 더 해야하니까.]

[그 말이 옳습니다. 역시 가주님은 현명하시군요.]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껄껄 웃었다.

산샤가 보기엔 막심과 아버지야말로 수다를 떨고 싶어서 아무 말이든 하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아무렴 어떠냐.

막심은 산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승마, 장애물넘기, 추격술 등등.

막심이야말로 아버지에겐 충신이며 공명정대한 사람이었다.

막심이 계속 기사단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모리츠라도 섣부른 행동은 하진 못했을 터였다.

기사단 숙소는 산샤가 기억하는 그대로였고, 세월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청구한 예산 중에 숙소 증축 항목이 있었는데, 어디에 썼는지는 몰라도 숙소에 쓰지 않은 건 분명했다.

안쪽에서는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샤는 창문 밑으로 몸을 숨기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레이디 디아머드라니! 결국 그렇게 되고야 말았잖아.”

“당연한 거 아냐? 태어났을 땐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의 예언을 실현해 줄 거라고. 예언의 아이라고 했었잖아.”

“왜에, 글라키에스의 현신이라고 했었지.”

“그래, 그래. 그런 레이디였는데 모리츠에게 맥없이 굴복할 리가 없지.”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

마치 자신이 가주되기를 기다려왔던 사람들 같잖아.

아직 막심 경이 있었던 거야?

산샤는 슬쩍 몸을 일으켜 그들을 엿보았다.

병장기를 닦던 중이었는지, 갑옷과 무기가 잔뜩 쌓여 있는 한쪽에서 기사들이 걸레를 휘두르며 웃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때의 기사단 풍경 그대로였다.

산샤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들 앞에 막 나서려는데, 저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주가 되면 안 죽냐? 그 목 하나 비틀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

털썩.

그대로 주저앉은 산샤는 창 밑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일순 침묵하던 기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단장! 아무리 그런 말을 그렇게 큰 목소리로….”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게임은 아직 안 끝났단 말이야. 모리츠가 진 게 아니라고.”

단장?

산샤는 안에서 걸어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봤다.

뭉툭한 코와 고집스러운 입매.

저 입매를 기억한다.

산샤가 검을 놓칠 때마다 한쪽으로 얼마나 쳐올려 웃었던가.

저 입매가 비웃는 게 싫어서 검술은 때려치웠었는데….

헬가본의 얀!

막심의 부단장이었던 자가 단장이 되었어?

얀은 거침없이 기사들의 한중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몇 번을 말하냐. 우리 같이 몸 쓰는 사람들은 줄을 잘 서야 한다고. 너희 목숨이 수어 개는 되는 줄 아냐? 이제 막 시작인 싸움에 무턱대고 레이디 편을 들어?”

그러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옆에 있던 기사가 빈손에 잔을 쥐여 주더니, 콸콸 술도 따라 주었다.

얀은 꿀렁꿀렁 목젖이 흔들리게 한 번에 잔을 비웠다.

다시 술을 따르며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명예를 목숨보다 귀하게 생각해야 하는 기사인데…. 이런 식으로 계속 줄타기만 하는 건 어째, 좀, 모양새가….”

“지랄!”

얀이 잔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야, 한스! 명예가 그렇게 귀하면 목숨을 내던져 보든가. 막심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대놓고 레이디 편들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

한스라고 불린 기사가 찍소리도 못해보고 축 늘어져 얀이 던진 잔을 주워다가 다시 쥐여 주었다.

“그래도 계승식까지 했으니까….”

“쓰읍!”

얀이 눈을 부라리며 위협을 하자 한스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얀의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를 뿐.

기사들도 슬쩍슬쩍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코를 박고 갑옷이나 닦기 시작했다.

합숙소 내부는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와장창창!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합숙소를 강타했다.

으헉, 뭐야.

뭔 소리야.

기사들은 기겁하며 벌떡 일어섰다.

어떤 기사는 검을 겨눴고, 미처 어쩌지 못한 자는 마른걸레를 휘둘렀다.

그러고는 동시에 굳어 버렸다.

입구에 얌전히 모아둔 갑옷이 무너지면서 낸 소리였다.

소리는 별 게 아니었다.

무너뜨린 사람이 문제였을 뿐.

“하, 하, 하. …안녕, 여러분.”

산샤가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기사들은 일제히 얀을 돌아봤다. 얀이 허락하기 전에는 산샤와 아는 척할 수 없다는 듯이.

얀은 얀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산샤를 보고만 있었다.

술잔이 기울어져 술이 바닥에 다 새는 것도 모르고 입을 벌리고 있는 걸 보면 그도 많이 놀라긴 했나 보다.

“단장?”

한스가 얀의 손에서 술잔을 뺏어 들고 옆구리를 찔렀다.

산샤는 얀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얀!”

“쓰으읍.”

얀이 난감한 듯 마른세수하며 슬쩍 산샤를 외면했다.

난감하기는 산샤도 마찬가지였다.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일단은 못 들은 척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못 들은 척일지는 모르겠다.

호통을 쳐야 하나?

저들이 ‘가주님을 뵙습니다’ 어쩌고 예를 올리면 슬쩍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멀거니 보고만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어험!”

산샤는 일단 우렁차게 헛기침을 해 봤다.

민망하다.

절을 해.

인사를 하라고.

“가주님을 뵙습니다.”

걸레를 들고 있던 기사 하나가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아! 고마워라.

덕분에 살았다.

“반갑소, 경.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자크입니다. 그러나 경이라는 호칭은 맞지 않습니다. 저는 기사분들의 심부름을 하는 종자일 뿐입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종자구나. 자크 종자.”

산샤는 자크에게는 다정한 미소를 그리고 서 있는 기사들에게는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종자도 알아보고 예를 올리는데, 그대들은 예의를 모르는 자들인가?”

기사들은 엉거주춤 애매하게 무릎을 꿇는 둥 마는 둥 얀의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 예를 올렸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산샤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딱 7년 만이네. 어릴 땐 여기에서 많이 놀았는데. 막심 경이 말 타는 법도 가르쳐 주셨고…. 막심 경은 어디 계시지, 얀 부단장?”

산샤는 일부러 ‘부단장’이라는 단어에 팍팍 힘을 줘서 발음했다.

그러나 얀은 대답하지 않고 ‘끄응’ 앓는 소리만 냈다.

대신 한스가 대답했다.

“막심 경은 제가 알기로는 디아머드에 계시지 않습니다.”

“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

죽지는 않았다는 뜻인가?

그렇지만 막심이 추방당할 일이 뭐가 있겠어?

막심이라면 빌미를 잡아 추방하는 것보다는 한밤중에 등을 찌르는 게 더 쉬웠을걸.

“…왜 추방을 당해?”

한스가 슬쩍 얀의 눈치를 살폈고, 얀은 허락의 눈짓을 보냈다.

한스가 크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재정 비리가 있었습니다. 여러 예산을 청구하여 집행하지 않고, 착복하였습니다.”

“막심이?”

이거야말로 뒤집어지게 놀랄 일이었다.

막심이 예산을 착복했을 리도 없지만, 그런 누명을 씌울 생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걸까.

막심이 순순히 인정했을 리가 없잖아.

“저희 모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경이 다 인정하신 바람에….”

“뭐?”

“예산 착복을 인정하셨습니다.”

“아니, 왜? 무엇 때문에? 왜 그랬대?”

“그게 말입니다….”

기사가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불쑥 얀이 내던지듯 말했다.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

“그게 다야? 여자가 있었다?”

“자식도 있었죠.”

또 불쑥 말하고 뒤룩뒤룩 눈알만 굴렸다.

“얀!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거야? 말을 제대로 해야지. 여자가 있었고 자식이 있었으니, 뭐?”

끄으으응, 얀이 어마어마하게 인상을 구기며 신음을 흘렸다.

“막심은 따로 가족을 두고 기사단 예산을 횡령하여….”

“가족은? …그들은 조사해 봤어?”

“아니요. 그건 단장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헛.”

단장의 비리가 가족 때문이라는데 가족은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니, 그러고서 추방?

“그러니까 증거는 전혀 못 찾았구나?”

“덮어주기로 한 거라니까요!”

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사단 전원은 기겁하여 얀을 쳐다봤다.

가주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기사단장이라니!

기사들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산샤도 난감했다.

까딱하면 몇 대 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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