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일부터 하자.”
산샤가 말하자, 아니타는 씩씩거리면서도 물러났는데, 사무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섰다.
“아가씨, 사람 쓰는 법부터 배우셔야겠습니다. 하녀가 이 태도가 다 뭡니까? 예?”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 없는 것도 사법관과 똑같네.
저를 위해서 아니타를 진정시켜 줬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산샤는 한심한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말했다.
“사무관, …앉아.”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무관은 정말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설마 산샤가 앉으라고 명령했으리라 상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걸 왜 상상 못 하니.
더한 말도 할 수 있는데.
“앉으라고 했다. …아니타, 의자를 내드려.”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니타는 의자를 가져다 사무관의 오금에 밀어 넣었다.
풀썩, 무릎이 꺾여 자동으로 의자에 앉는 사무관을 보며 산샤는 말했다.
“그리고 얘 이름은 아니타야. 하녀가 아니라….”
“에, 예? 뭐, 뭐라고요?”
“부탁할 게 있으면 제대로 이름을 불러서 부탁하라는 뜻이야. 명령하지 말고. …사무관의 하녀도 아니잖아.”
“예? 아니, 아가씨.”
“나는 가주님이라고 부르면 되겠네. 설마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들어온 건 아니지?”
“예? 아니…. 그…. 저….”
해야 할 말은 많은데 마음이 급해서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사무관에게 산샤는 손을 들어 보였다.
사무관이 끔쩍 놀라며 입을 다무는데….
“긴 이야기는 서류를 다 본 다음에 하고 싶군. 아니타, 사무관에게 차를 내드리렴.”
“예, 그런데 가주님.”
아니타가 찻주전자를 들며 결연하게 말했다.
“…제가 정성을 보여드릴 수 있는데요. 지금 당장이요.”
“정성?”
산샤는 결연한 아니타의 표정을 보고 크게 웃을 뻔했다.
정성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헤어밴드와 앞치마는 벗어버리고, 정말 제대로 보일 자리가 생기면 그때 보여달라고 했던 것?
정성 보일 자리에 쉽게 생기겠냐고 툴툴거리더니, 벌써 찾은 모양이네.
“알고 있어. 그렇지만 지금은 차부터.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허브티가 좋겠구나.”
입을 뻐끔뻐끔하며 할 말이 많이 남은 표정인 아니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무관의 잔에 차를 따랐다.
이리저리 다 튀어 잔에 들어간 건 별로 없었지만.
사무관은 붉으락푸르락 인상을 구기면서도 찍소리 못했다.
아니타의 험악한 눈초리를 느끼고 몸을 사리지 않으면 큰일 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나중엔 감히 차를 따라 달라는 소리도 못 하고, 알아서 찻주전자를 끼고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아삭아삭.
홀짝홀짝.
사무관이 먹고 마시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식사 시간이 되었으나, 산샤는 여전히 서류를 검토하느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던 아니타는 거창하게 울려 퍼지는 꼬로록!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아가씨? 배고파요? 식사 준비할까요?”
산샤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낸 소리 아니야. 나는 배 안 고픈데?”
“예?”
아니타는 쓰윽 고개를 돌려 사무관을 노려봤다.
배에 구멍이 났나?
과자란 과자는 다 주워 먹고 샌드위치도 먹고 차는 몇 주전자를 마셨으면서도 꼬로록 소리를 내?
산만큼 쌓아 왔던 트롤리에 남은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어쨌든 사무관은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제 배를 쓰다듬으며 잔뜩 얼굴을 찡그리더니, 산샤를 불렀다.
“이게 이렇게 오래 볼 일이 아닌데…. 이해가 힘드시나? 하긴 좀…. 아가씩 같은 분이 알아보기가…. 어디, 제가 설명을 좀, 해드릴까요?”
아니타는 더 눈을 부라렸다.
저 개뼈다귀 같은 사무관 봐라.
‘가주님’이라고 부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끝까지 ‘아가씨’라네.
그런데 산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이 보던 것을 쓱 밀었다.
“그럼 이걸 설명해 봐.”
‘디아머드 기사단의 예결산 집행 내역 명세서’였다.
사무관이 열린 페이지를 슬쩍 보더니 쩝, 입맛을 다셨다.
“이거는 또, 이해하고 말고 할 것도 아닌데요? 예산 청구하니 집행했다는…. 돈이 오고 간 기록일 뿐인데? 설명할 거리가 없어요.”
“그렇지? 간단한 거 맞지? 그런데 흐릿하네. 알아볼 수가 없어.”
“어디 가요?”
“서류를 봐. 금방 문제점이 보일 텐데?”
사무관은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여 서류에 시선을 두긴 했지만 봐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산샤는 손가락으로 딱 한 곳을 짚어 보였다.
“갑옷, 장검 때문에 청구했고, 집행했는데, 증빙 서류가 없어.”
“증빙…이요?”
“여긴 합숙소를 증축 개보수하겠다는 청구, 역시 집행되었는데…. 증빙이 없고.”
“그거는…. 아, 하, 하. 어떻게 그걸 보셨을까. 그걸 보셨네요? 소문은 그렇지가 않던데….”
“내가 백치라고 들어서, 이렇게 빈 구멍 많은 서류라도 상관없을 줄 알고 그냥 들고 왔다고 말하려는 거야?”
파르르, 사무관의 얼굴 근육이 떨렸다.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거로군.
사무관이 후두둑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그게, 소문을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그랬던 건 아니고요.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건 또….”
사무관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리바리하게 굴자 산샤는 간략하게 정리해줬다.
“횡령을 하려면 치밀하게 해야지. 이렇게 어설퍼서야…. 되겠어?”
“횡령이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오해이십니다.”
사무관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오해는 무슨, 증빙 없는 예산집행은 횡령인 경우가 열에 아홉이라고 배웠는걸.”
“아닙니다. 이건 관행입니다. 원래 기사단은 그냥 요구하는 대로 다 내줬고, 증빙할 필요가 없었단 말입니다.”
아무리 디아머드 백작 가가 넘치는 부를 가졌다고 한들 어디에 썼는지 확인도 안 하고 퍼줬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지….
어이없는 소리를 하고도 뻔뻔한 사무관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산샤는 물었다.
“이런 식으로 일하고도 괜찮았어?”
사무관이 가슴을 쫙 펴고 대답했다.
“자작님은 저에게 모든 걸 믿고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아가씨도 저에게 전적으로 맡기셔야 합니다.”
기가 막히게도, 괜찮았다는 거네.
그때 불쑥 아니타가 끼어들었다.
“아가씨가 아니라 가주님이라고 해야죠!”
“뭐?”
“자작님 이야기는 왜 하는 거람. 그렇게 자작이 좋으면, 따라가지, 왜?”
“뭐, 뭐라고?”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들었나? 우리 가주님이 자작을 따르고 싶으면 떠나라고, 안 잡으신다고 했단 소리는 못 들으셨나 봐?”
“무, 무슨….”
사무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개 하녀 주제에 어디서 되지도 않게 참견질이야? 엉? 대체 예가 어디라고?”
“어디기는? 우리 가주님의 집무실이지! 어디서 되지도 않는 서류를 가지고 와서 우리 가주님을 속여먹으려고 해?”
“뭐가 어쩌고 어째?”
꽈당!
사무관이 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재무 사무관으로 살아온 지 어언 이십여 년! 나는 절대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심정을 아가씨는 아십니까?”
이건 또 뭐냐.
모리츠가 골고루도 모아놨구나.
“당신이 횡령한 게 아니라면….”
산샤는 서류를 하나하나 모아서 사무관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 구멍부터 메꿔오는 게 좋겠어. 인제 와서 증빙 서류를 갖출 수는 없겠지만, 돈을 어디에 썼는지 조사는 할 수 있잖아?”
“아가씨! …아니, 레이디! …아니 가주님!”
사무관이 부르르 머리를 흔들더니 말했다.
“그동안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관행이라는 건 말입니다. 이런 게 아닙니다.”
“사무관!”
산샤는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계속 관행을 주장하면서 발뺌할 생각이라면, 감옥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
“감옥이요?”
꽤액 소리를 지른 건 아니타였다.
감옥이라는 소리만으로 이미 아니타는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그런데 사무관은 오히려 쾅!
책상을 내리치더니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감옥에 보내겠다고요? 감옥은 아무나 보내나? 이런 게 비즈니스라고. 뭐 알지도 못하면서 누굴 감옥에 보내네, 마네. 참, 나….”
사무관은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은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예? 분명히 나중에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협박까지 하다니….
이렇게 막 나가는 인간 앞에 굳이 말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대단하면, 뭐?”
아니타가 빼액 소리를 지르고 나섰다.
“이 아저씨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몹쓸 사람이네.”
“아, 아저씨?”
사무관은 ‘아저씨’라는 소리는 평생 처음 들어봤는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아니타는 거침없었다.
“관행은 뭔, 개풀 뜯어 먹을 관행이야! 남의 돈을 관리해주기로 했으면 돈이 들어가고 나가고 틀림없이 딱 맞춰줘야지. 세상에 돈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칠렐레팔렐레해? 그게 칼만 안 든 강도 아니냐고.”
“뭐? 이 하녀가! 벌어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
“하녀 아니고 아니타라고! 이름으로 부르라고 이름도 가르쳐주셨잖아. 우리 가. 주. 님이!”
“이, 이…! 이 하녀가…!”
사무관은 말로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었다.
그렇다고 잡힐 아니타가 아니다.
아니타는 ‘까악, 꺄악’ 비명을 지르며 방을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사무관은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만!”
아니타와 사무관이 동시에 산샤를 돌아봤다.
사무관은 물론이고 아니타도 잠깐 사이에 완전히 지쳐 보였다.
“둘 다 진정하고 앉아!”
털썩.
둘이 동시에 자리에 앉았고, 흥, 아니타는 대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타, 사무관이 배우는 속도가 빠르지 못한 사람 같은데 놀리면 되겠니? 친절하게 가르쳐 줘야지.”
“아가씨!”
사무관이 비통하게 외쳐 불렀다.
“지금 하녀와 짜고 저를 농락하시는 겁니까?”
“농락?”
산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을 가르쳐줘도 계속 하녀라고 불러.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고 가주님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계속 아가씨래. 배우는 속도가 늦는 거 맞잖아.”
“…아무리 그래도 하녀한테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을 건 아니지요.”
“또 그런다. 또.”
“예?”
“아, 니, 타, 라니까.”
“아니, 그…. 저…. 그러니까…. 하녀를 하녀라고 하지 못하고….”
산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무관이 이러는 건 감옥 가는 게 무서워서, …라는 건 알겠어.”
산샤는 서류 더미를 좀 더 사무관 쪽으로 밀어줬다.
“감옥이 그렇게 싫고 무서우면, 서류의 빈 구멍부터 채워야 하지 않을까?”
“누가 감옥 같은 게 무서워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그래? 그럼 뭐….”
산샤는 여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감옥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