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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21화 (21/97)

21화

사법관은 등장부터 남달랐다.

거구의 사내가 어기적어기적 들어오더니, 산샤를 깔아보며 코웃음부터 쳤다.

“저를 제일 먼저 부르다니요. 그것, 참, 개념 없는 일의 순서 아닙니까? 가문의 일을 파악하는 것은 재정이 기본이지요. 그것도 모르면서 가주 일을 어떻게 하시려고, 참….”

흰자위가 잔뜩 드러나게 흘겨본 것은 물론이고, 입을 삐쭉이더니 대차게 혀를 차기도 했다.

벤야민이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것은 사법관이 이렇게 오만불손하게 나오더라도 쫄지 말라는 뜻이었으리라.

산샤는 사법관의 코웃음에 장단 맞춰 크게 콧방귀를 꼈다. 쫄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일의 순서쯤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걱정해 줄 필요는 없어.”

산샤의 대답에 사법관은 희번덕 흰자위를 한 바퀴 돌렸다.

조금 더 나가면 회초리로 쳐서 가르치겠다고 나설지도 모르겠다.

약해 보이면 함부로 구는 자임이 분명했다.

이런 자일수록 강한 사람 앞에서는 설설 기기 마련이지.

산샤는 사법관을 눈 아래로 깔아보며 혀를 찼다.

“사법관이라면 부르기 전에 올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기대하는 바가 너무 높았나 보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순간 사법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항의하는 목소리는 격앙되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무슨 말입니까? 부르기 전에 내가 오긴 왜 옵니까? 사법관은 가주에게 알아서 기어라, 뭐 이런 말씀입니까? 살다 살다 이런 헛소리는 처음 들어 봅니다.”

“헛소리는 누가 하는지 모르겠군. 일이 있었어. 사법관이 먼저 챙겨야 할 문제가 생겼단 말이야.”

“일, …이라뇨?”

멈칫, 흰자위 돌아가는 속도가 늦춰졌다.

자신이 뭘 놓쳤는지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 떠오르지 않는 것도 같았고.

“얼음강 추락.”

“누가요?”

“내가.”

“언제요?”

“어젯밤.”

“아….”

사법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흔들렸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놓치면서 목소리만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다니, 어이가 없군.”

“그, 그렇지만….”

끔뻑끔뻑 떴다 감았다 하는 사법관의 눈이 어찌나 순박해 보이는지, 산샤는 웃어버릴 뻔했다.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를 때는 언제고.

갑작스런 이야기에 경계하는 모습도 우스웠다.

자기 껍데기 안에 숨어 있다가 틈을 보이면 갑작스럽게 공격하는 거북이 같은 사람인가?

“그건 사건이 아니라, 사고 아닙니까?”

사법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제 그 자리에 술판이 벌어졌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가 술에 취해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거 아닙니까? 그런 건 내가 나설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떽떽떽, 시끄럽기도 하다.

산샤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수백 년 끄떡없던 관망대 난간이 부서져 있었어.”

사법관이 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예?”

“누군가 일부러 부숴놓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사건이 맞아.”

“…그러셨군요.”

기를 죽이겠다는 듯이 버럭버럭 소리 지를 때는 언제고,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풍기고 있으면 그야말로 어쩌란 말이냐.

“반응은 그뿐이야? …그러셨군요?”

“…용케 살아나셨네요.”

“어쩌다가 빠졌는지는, 누구와 있었는지는 안 물어봐?”

“아….”

사법관이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누구와 같이 계셨습니까?”

“모리츠 자작.”

“예?”

사법관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자작님이 거긴 왜 가셨을까요? 디아머드 성에서 이사도 하신 분이…. 설마 자작님이 난간을 부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 사법관이 수사해야지.”

끔뻑, 사법관이 눈이 감았다가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요.”

산샤는 터지려는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사법관의 표정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얼굴이랄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얼굴이랄까.

수사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혹시….”

사법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작님이 했다고 미리 정해 놓고 수사하라고 하시는 거라면,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표적 수사는 저의 원칙을 위배하는 일입니다.”

산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일, 참 쉽게 하네.”

“예?”

“모리츠를 범인이라고 미리 정해놓지 않겠다는 건 알겠는데, 모리츠가 범인일까 봐 수사를 안 하겠다는 거야?”

“아니, 제가 언제 그렇게….”

“자신이 한 말을 잘 생각해 봐.”

순간 사법관의 얼굴이 누렇게 뜬 것 같았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예에? 사건이 또 있습니까? 가주가 되신지 아직 만 하루가 안 되었는데, 무슨 사건이 이렇게 많습니까?”

“사건은 아니고, 사람을 찾는 거야.”

“예?”

“아론, 한나, 얀슨. 모리츠 자작이 후견인이 되기 전에 백작 가에서 일하던 사람들인데 지금 행방을 찾고 싶군.”

“하아, 그거참….”

사법관은 산샤의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리 디아머드 사법관은 법을 기반에 두고 법에 따라 움직입니다. 아무리 가주라고 해도 절차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 알아.”

“아론이니, 한나니….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법관은 사람 찾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지금 가주님은 저에게 부당한 일을 지시하시는 겁니다.”

“세 사람은 대를 이어 디아머드 백작 가문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모리츠가 살림을 맡은 후론 실종되었어. 의심스럽지 않은가?”

“또 모리츠 자작입니까? 모리츠 자작이 그들을 죽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것도 사법관이 수사할 일이지.”

“지금 가주님은 모든 상황을 모리츠 자작에게 몰아가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탁!

움찔!

자지러든 사법관이 눈을 껌뻑이는데, 산샤는 무심하게 자신이 던진 서류철을 펼쳐 보였다.

“사법관이 이러는 게 이해는 돼, …디아머드 사법관은 2년마다 새로 선출해야 하는데, 사법관은 벌써 7년째 중임이더군. 당신도 모리츠가 고용한 사람인가?”

“무, 무슨 말씀을…!”

사법관이 콧방울을 실룩거리며 소리쳤다.

“정당하게 시험을 봤고, 능력을 인정받아 중임된 것입니다. 저는 오랜 시간 사법관으로 일하면서 법으로 다스리는 일에 자부심을 느껴 온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랬다기에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잖아.”

“제가 일을 안 하기는, …뭘 또 얼마나 안 했다고 이러십니까?”

산샤는 의자에 깊이 앉아 사법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을 하고 있다고 우기다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북부 지역 귀족들이 사사로이 평민을 처형하고 있어. 알고 있어?”

“예?”

“디아머드 백작령에서는 노예를 사고파는 것이 금지인데, 클라이드 중앙광장에 노예시장이 열리고 있더군. 알고 있었나?”

“…에, 예?”

“백성들은 빈궁한데, 과도한 세금이 원인이라는군. 그건 알고 있었겠지?”

멍청하게 ‘예’를 반복하던 사법관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법관에게 조금이나마 기대를 하는 바가 있었으나,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사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테니.

산샤는 서류를 덮어 버렸다.

“사법관 당신은 해고야.”

사법관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눈을 뜨고 흰자위를 이리저리 굴렸다.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그렇게 막 해고를…. 해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해고는 내가 하는 거야. 당신은 당하는 거고.”

사법관의 눈동자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입은 뻐끔뻐끔 움직이는데,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대답할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나, 나를 이렇게 해고해 버리면 당장 디아머드 법체계는 엉망이 될 겁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당신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사법관이 따지고 들었다.

“사법관이 되기 위해서 어려운 공부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 아십니까? 9년입니다. 9년! 저의 9년을 이렇게 무시하실 수는 없는 겁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일을 잘하는 게 아닌 건, 확실히 잘 알겠어.”

산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리츠에게 가서 전해. …사법관처럼 멍청하리만큼 투명한 사람은 손발이 안 맞아서 안 되겠다고.”

“멍청하다니요?”

사법관은 해고당한 것보다 멍청하다는 말을 들은 것에 더 자지러질 듯 경악했다.

“어떻게 감히 나에게 멍청하다고 말합니까. 9년 공부를 했다니까요. 멍청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단 말입니다.”

“‘감히’는 무슨….”

산샤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멈칫, 사법관은 손가락을 치켜든 채로 굳어 버렸다.

“‘감히’라고 하기엔 사법관 당신은 무능했어. 바닥이 다 보였다고.”

“뭐, 뭐라고 하는 말씀이십니까? 맡은 바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단 말입니다.”

“내내 말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만 봐도 멍청하고….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려는 자세는 전혀 없고.”

“뭐가요? 난간 부서진 건 조사하겠다고 했고. 그 뭐, 뭐, 뭐라는 사람 찾는 일을 못 하겠다고 한 건데요.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클라이드의 아드리안에게 가십시오. 사람 찾는 일은 수호자 집단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

멈칫.

이번에는 산샤가 말문이 막혔다.

왜 다들 수호자 집단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수호자 집단의 홍보 집단인가?

* * *

다음은 사무관 차례.

회계 서류를 잔뜩 짊어지고 온 사무관은 전혀 다르게 바짝 마른 사람이었다. 태도는 사법관 못지않았지만.

사무관은 서류를 탁자 위에 턱 던져 놓더니 말했다.

“어떻게…, 아가씨? 하나하나 설명을 해드려야 할까? …어떻게 하실래요?”

그러더니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불평했다.

“여기 군입 다실 게 하나도 없네. 집사한테 미리 말을 해놨는데도 일하는 게 이 모양이야.”

그때 문이 활짝 열리고, 아니타가 간식거리를 잔뜩 실은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과자나 케이크 등 쌓여 있는 간식이 작은 봉우리 하나쯤은 되어 보였다.

누가 저걸 다 먹는담.

놀라는 것도 잠깐, 사무관이 달려가 쿠키부터 와사삭 씹었다.

“누가 이렇게 먹는다고…?”

“집사님이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이것으로도 부족할 거라고요.”

“설마….”

그때 오물오물 쿠키를 씹으면서 발음도 불분명하게 사무관이 명령했다.

“하녀, 차를 따라라.”

그 말에 아니타가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주전자가 덜컹거리고 서류에도 그리고 사무관에게도 찻물이 튀었다.

사무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거리냐. 예의범절도 모르냐.”

“예의범절은 싹 다 구워 처먹은 입에서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온다.”

“뭐가 어쩌고 어째? 하녀가 그런 말을 잘도….”

“뭐어? 하녀어? 내가 네 하녀냐?”

아니타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냥 두면 사무관이 크게 다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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