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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20화 (20/97)

20화

꿈속의 소년을 찾는 건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일단 백작 성에서 소년을 아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용인은 죄다 모리츠가 돌아온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이고 그 뒤로도 자꾸 바뀌었다.

가장 오래 있던 사람이 아니타이려나.

본인은 절대 아니라지만, 눈에 보이게 산샤를 구박한 공으로 오래 붙어 있을 수 있었다.

무례한 성품 덕을 봤다고 할 수 있지.

아니타는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은 아드리안과 똑 닮았다고 주장했지만….

아니라니까.

아드리안일 수가 없어.

“그러면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7년 전에 디아머드 성에서 살았었냐고.”

“그게 안 되니까 아드리안이면 안 된다는 거야.”

“예? 그건 또 뭔 소리세요?”

“다신 볼 일 없겠다고 했단 말이야. 그 말 하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당신 왜 자꾸 내 꿈에 나타나죠?’ 그럴 수는 없잖아.”

“볼 일이 없기는 왜 없어요? 꿈까지 꿔가면서 보고 있으면서….”

“꿈에서 본 건 아드리안이 아니라니까!”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나 보다.

아니타가 슬쩍 물러서서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 그러면 아드리안 경한테 찾아달라고 하시던가요.”

“아니타! 내 말을 어디로 듣고 있니? 아니라는데 왜 자꾸 찾아가래? 아드리안이 아니라니까.”

눈까지 치뜨며 호통을 치자, 아니타가 항의했다.

“…언제 찾아가래요. 의뢰하랬지. 수호자 집단이 정보 수집에 최고라니까 찾아달라고 하자는 거잖아요. …뭘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무섭게….”

“아…, 의뢰!”

화악, 열이 올랐다.

찾아가라고 한 게 아니라 찾아달라고 하랬다.

괜히 ‘찾아’에만 반응하느라 소리부터 질렀네.

“미안! 잘못 들었어.”

낯부끄럽고 뜨거워서 아니타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산샤는 확 달려가며 외쳤다.

“내려가자. 집사를 너무 기다리게 했잖아.”

* * *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는 산샤가 들어서자 굳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어쩐지 호의적이지 않아 보이는 태도에 산샤는 마음을 다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되도록 위엄 있어 보이도록 턱을 치켜들고 고개를 까딱했다.

크흠,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보고를 시작했다.

모리츠는 어젯밤 클라이드 트리플포크 거리에 있는 타운하우스에 들었다.

이사랄 것도 없이 저택은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어서 모리츠가 몸만 들어가는 걸로 이사는 끝났다.

“저는 그다지 필요 없더군요.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될 뻔했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준비하고 있었네.”

“사실….”

말을 꺼내다 말고 망설이던 집사는 슬쩍 산샤의 시선을 피하고 말을 이었다.

“어젯밤엔 가주님이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예? 매정이요?”

산샤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아니타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불쑥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집사님도 참…. 갑자기 나가란 게 아니라 낮에 이미 말씀해 놓으셨다고요. 그러니까 준비해 놓고 그랬겠죠. 아무리 우리 아가씨가 앞뒤도 없이 갑자기 나가라고 하실 거 같으세요?”

순간 집사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귀 끝까지 새빨개졌다.

창피한 건 집사뿐만이 아니었다.

산샤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타가 좋은 뜻으로 산샤를 위해 이런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보이고야 말겠다던 그 정성이겠지.

그렇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나서서 말을 얹으면 미묘하게 곤란하고 부끄러웠다.

집사가 크흠 크흠 연달아 헛기침만 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자신의 마음 같았다.

산샤는 일부러 살짝 웃어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면 매정해 보일 수도 있지.”

“사정을 모르면 입을 다물고 있어야죠.”

집사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린 것과 아니타가 사납게 한마디 거들고 나선 것은 동시였다.

칫, 이빨 사이로 침이라도 뱉을 것 같은 기세에,

“크흠!”

집사는 크게 벌린 입으로 헛기침만 토해냈다.

“크흠, 크흠, 큼큼큼.”

그냥 뒀다가는 말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헛기침만 하다 끝날 것 같았다.

“아니타, 가서 마실 걸 좀 챙겨와.”

아니타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라리며 산샤를 봤다.

“차 안 마신다면서요?”

그건 모리츠가 뭔가 먹여서 오러를 보게 했다고 생각했을 때고….

산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침엔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데 좋을 것 같아서…. 집사도 목이 칼칼한 것 같고….”

“아니, 그래도….”

아니타는 먼저 고개를 젓고 나섰다.

슬쩍슬쩍 집사를 곁눈질하는 게 자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정성은 갸륵했으나,

“아니타!”

이름 한 번 부른 것으로 아니타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묵례하고는 집무실에서 나갔다.

집사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아니타와 산샤를 번갈아 보다가, 아니타가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지자 탄성을 질렀다.

“어떻게…. 아니 가주님, 어떻게 저렇게…. 어떻게 이렇게….”

집사가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분명했다.

‘어떻게 저렇게 사나운 하녀를 이렇게 얌전하게 만들 수 있느냐.’

그에 대한 답은 아니타와 직접 의논하도록 하고….

“그래서?”

산샤는 버벅거리는 집사의 옹알이를 끊어줬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였어? 아니타가 자꾸 끼어들어서 하지 못했던 말.”

“아…. 그거요.”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집사는 옷매무새를 다잡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절대 매정한 처사가 아니었는데도, 집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습니다.”

“집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 뭐?”

“고용인들 앞에서 주인의 말을 거역하려고 했지요. 정말 송구합니다.”

산샤는 조금 어색해졌다.

본인이 아무리 모리츠와의 관계를 부인해도 결국 저쪽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제대로 사과를 해오다니.

“의외네.”

“예?”

“막 들어왔을 땐 굳어 있고,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이더니….”

“그건 제가 잘못한 걸 어떻게 사과드리나 궁리하고 있으나 그랬습니다. 고민이 깊으니 그런 표정이 되더군요.”

“아, 그랬군.”

산샤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기로 했다.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나쁜 일을 꾸미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계획에 없는 일을 갑자기 시킨 거니까. 오해할 만하지.”

“아닙니다. 전적으로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가주님은 다 계획이 있으신데, 제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가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토를 달거나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어, 그래.”

산샤는 어색하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벤야민.”

“허억!”

순간 집사 벤야민이 격하게 숨을 삼키더니 쿵. 무릎을 꿇었다.

산샤는 훌쩍 뒤로 물러섰다.

아, 놀라라.

갑자기 무릎을 던지긴 왜 던지냐.

왜들 이렇게 무릎 귀한지를 모르는지, 이러다가 북부 남자들 죄다 무릎이 바삭바사삭 가루가 되는 거 아냐?

“왜 그래, 벤야민? 무릎은 왜 꿇고 그래?”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제 이름을 불러주시다니요. 저에게 이런 고용주는 처음이십니다.”

전엔 산샤도 그랬다.

집사는 집사일 뿐이었다.

집사 할아버지, 집사 아저씨, 그도 아니면 그냥 집사.

‘집사’는 집사이면 그만이지,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랄프와 딕키가 자신의 무릎을 내던지며 뭐라고 했던가. 이름을 불러달라 했었지.

술에 취해 곤죽이 되어도, 아니 그럴수록 더 간절하게 불리고 싶은 게 이름이라면, 집사도 집사라고만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굳이 이름을 알아내서 부른 거였는데, 이번엔 이름을 부른다고 무릎을 던지네.

“미안해, 이렇게나 싫어하는 줄 몰랐어. 다시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게.”

“싫다니요!”

집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좋아서 이럽니다. 집사라는 건 저의 직업일 뿐이지, 제가 아니니까요. 이름으로 불리니까,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좋습니다.”

“…원래 사람인데….”

낮게 중얼거리는 산샤의 소리에 벤야민의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이 났다.

그가 아랫배에서부터 기운을 잔뜩 끌어올리더니 외쳤다.

“저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그러고는 두 팔로 바닥을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젠가 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분을 섬기고 싶다고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꿈은 꿈으로 끝나버리고 말겠구나 했는데, 꿈을 이루기도 하는군요. 얼마나 좋은지요. 가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역시 아니타를 내보낼 게 아니었어.

산샤는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아니타가 버티고 있었으면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못 했을 텐데.

“충성을 주겠다니, 받을게. 고마워.”

“감사합니다!”

벤야민은 정말로 감격에 겨운 듯했다.

살짝 찌르면 펑펑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이렇게 감정 표현이 격한 사람이었나?

인정에 충성하는 사람이라….

그 충성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이름을 부르는 동안은 계속 유지되나?

다른 사람이 이름을 불러주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오히려 돈에 충성한다는 아니타가 훨씬 관리하기 쉬울 것 같은 느낌인 건, 그냥 느낌일 뿐인가?

“그래, 알았어. 벤야민. 뜻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만 일어나, 이제 일을 합시다.”

산샤의 말이 끝나자마자 용수철이 튕기듯 벌떡 벤야민이 일어섰다.

“명령하십시오, 가주님.”

“저택 내 고용인들은 나에게 충성할 수 있는 내 사람만 남기고 싶어.”

“당연하죠. 당연하신 결정입니다.”

“먼저 그들의 결정에 맡겨서 떠날 자유를 주려고 해. 그러니까 벤야민이 신청을 받아서 퇴직금과 소개장을 챙겨줘.”

“예.”

“그리고 백작 가문의 살림을 맡아 하는 사무관들과 사법관을 만나야겠어.”

벤야민이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사무관은 알겠는데, 사법관도 만나십니까? 벌써요?”

“벌써는 무슨, 사법관부터 만날 생각이었는데?”

“사법관부터요? 정말이십니까? 보통 재무 관련 사무관을 먼저 만나셔야 하는데요.”

“왜? 내 말을 의심하는 거야?”

퍼뜩 고개를 반듯이 세우고, 집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주님이 필요하시다면 사법관부터 불러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벤야민이 몸을 숙이고 은밀하게 말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만반의 준비?”

벤야민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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