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가주님, 일어나세요. 아침 해가 벌써 저만큼 올라왔답니다.”
으음, 산샤는 신음하며 돌아누웠다.
비몽사몽 간에 보이는 하녀는 아주 단정했다.
한 올도 삐져나온 것 없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풀 먹여 빳빳한 앞치마와 헤어밴드.
배꼽 위에 공손하게 모은 손까지.
저건 아니타가 아니다.
아니타는 머리는 대충 빗어 넘기고, 구깃구깃 구겨진 앞치마에 헤어밴드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녀장은 흐트러지는 걸 참지 못하는 아주 깔끔한 사람이었지만, 아니타만은 어쩌지 못했다.
한마디 하면 열 마디로 덤벼들었고 모리츠는 산샤의 전담 하녀라며 두둔하고 있었으니.
하녀가 살짝 산샤의 몸을 흔들었다.
“가주님, 왜 이렇게 못 일어나실까. 하긴 피곤하실 만도 하지. 그래도 일어나셔야 한답니다.”
원래 아니타는 아침에 깨울 때 이불을 확 걷어버리고 소리를 질렀다.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떡해. 얼른 일어나지 못해요? 아휴, 진짜 손 많이 가는 아가씨라니까!]
산샤는 칭얼거렸다.
“아니타가 어디 가고, 누구야 너는….”
하녀가 쓰읍 숨을 들이마셨다. 끄응, 앓는 소리도 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내 상냥하게 말했다.
“어제 모리츠 자작님을 모셔다드린 집사가 다른 명령은 없으신지 대기하고 있답니다. 어서 준비하셔야지요, 가주님!”
“…누구냐고, 너는!”
산샤는 짜증을 나서 어쩔 수 없이 눈을 번쩍 떠버렸다.
그런데….
눈을 떴는데도 꿈인가.
아니타가 눈앞에 있다. 빳빳한 앞치마와 헤어밴드를 하고 배꼽 위에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서.
“눈을 뜨셨군요. 아침 식사는 다이닝룸에서 하시겠어요, 아니면 방으로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타?”
산샤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봤다.
“예, 가주님! 말씀하세요.”
아니타의 얼굴을 한 아니타 아닌 것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산샤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해보고 쓱쓱 비벼보기도 했다.
그래도 아니타는 변함없이 괴상한 몰골이었다.
“너, 꼴이 그게 뭐야?”
“제가 왜요?”
아니타가 갸우뚱갸우뚱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귀여운 척이라고 하는 짓인가?
“아니타,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타가 방긋 웃었다.
웃는 얼굴이 무섭잖아, 아니타!
“전담 하녀가 되고 싶으면 정성을 보이라고 하셨잖아요. 제 정성을 보여드리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돈이면 다 된다길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정성을 보이라고 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너를 완전히 믿기는 힘들어. 그러니까 전담 하녀가 되고 싶거든, 믿을 수 있게 해줘.]
[어떻게 해야 믿으실 건데요?]
[…너의 정성을 보여 봐.]
[정성이요? 어떻게 해야 정성을 보일 수 있는데요?]
[그건 네가 생각해내야지.]
그랬었는데….
생각을 한 건가?
눈뜨자마자 이렇게 덤빈다고?
아니타가 다시 상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가주님, 아침 식사는 어디에서 하시겠어요?”
“방으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니타가 상큼한 미소를 날렸다.
산샤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도저히 더는 못 보겠다.
“아니타!”
“예, 가주님!”
“너…. 지금 이게 네가 보일 수 있는 정성이야?”
“그렇습니다, 가주님!”
인제는 아니타가 꼬박꼬박 붙이는 ‘가주님’이라는 호칭도 무서워졌다.
“…그렇다고 예전에 정성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눈으로 보여주려면 어째야 하나 궁리하다가 생각나는 게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 이러는 거죠.”
“그럼 하던 대로 해.”
“예?”
아니타가 인상을 확 구겼다.
“기어이 전담 하녀는 안 시켜주려고요? 뭐 많이 바라는 것도 없이 급료만 꼬박꼬박 주면 된다는데도?”
“전담 하녀, 해. 시켜줄게.”
“뭔…, 왜 이랬다저랬다 하세요? 정성을 보여야 시켜준다면서요.”
산샤는 아니타에게 어울리지 않는 헤어밴드와 앞치마를 가리켰다.
“그건 벗어 버리고, …이런 거 말고 정말 제대로 정성을 보일 자리가 생길 거야. 그때 보여줘.”
“정성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런 자리가 아무 때나 나오겠어요?”
“없으면 없는 대로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나는 괴기한 아니타는 싫으니까 내 취향을 존중해줘.”
“에이, 진짜!”
아니타가 헤어밴드를 홱 잡아 뜯어버렸다.
“해도 뭐라 그러고… 안 해도 뭐라 그러고…. 진짜. 손 많이 가는 아가씨라니까.”
무례한 아니타가 돌아왔다.
입을 이리저리 실룩거리며 툴툴거리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 * *
산샤는 디아머드 가주로서의 첫 업무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자신의 집무실은 아버지 로베르트 백작이 집무실로 쓰던 방으로 정했다.
로베르트가 작고 구석에 박혀 있는 방을 집무실로 택한 이유는 마리에의 정원 때문이었다.
마리에가 정성을 다해 가꾸는 정원이 가장 가깝고 잘 보이는 방이었으니까.
로베르트는 아예 벽면을 트고 큰 유리문을 달아놓았다. 언제든 마리에를 보고 언제든 오갈 수 있도록.
유리문을 아낌없이 사용한 건 산샤였다.
로베르트의 집무실은 산샤의 공부방이었고, 마리에의 정원은 놀이터였으니까.
성안 이곳저곳을 자신의 취향으로 바꾸어 놓은 모리츠가 다행히도 그 방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의 정원을 모두 다 파헤쳐놔서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
깨알같이 사소한 모리츠 놈.
상념에 잠겨 복도를 걷던 산샤는 무엇인가가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아서 멈춰 섰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3층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이 보였다.
“저런 게 있었나?”
디아머드 성에 자신이 모르는 계단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계단이었다.
산샤는 계단을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 보면서 모리츠에게 욕을 했다.
도대체 어떤 약을 먹였길래 멀쩡한 계단도 기억을 못 하나.
계단만 기억 못 하는 게 아니라, 저 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모리츠가 나쁜 놈인 건 확실하고 모르는 건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첫 계단에 발을 올린 순간,
“뭐 하세요?”
움찔 놀라 돌아봤더니, 아니타가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인기척 좀 하고 다녀.”
아니타가 억울한 표정을 하더니 손가락으로 복도 저쪽을 가리켰다.
“알았어, 그래. 저쪽에서부터 불렀다는 거지?”
“예. 아가씨가 정신 팔려서 못 들은 거라고요.”
“…저 위에 뭐가 있어?”
아니타는 산샤가 했던 것처럼 계단 위를 올려다보더니 대답했다.
“방이요.”
“방?”
“게스트룸이 있다던데요.”
“게스트룸은 별관에 있잖아.”
“청소 하녀한테 들은 말이 그래요. 저는 전담 하녀라서 저기 갈 일이 없으니까요.”
저 끝에 열면 안 될 문이 있을 것 같았는데 그냥 게스트룸이라고? 별관에 있는 멀쩡한 방들은 어쩌고, 여기에?
“청소 하녀한테 다시 물어봐 줘요?”
“아니야, 됐어.”
산샤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서 직접 보면 되는데 뭐 하러….”
* * *
산샤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당연하게도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방이었다. 침대, 탁자, 의자, 벽난로. 크기는 산샤의 방 정도일까.
특별한 건 느낌이었다.
뭔가 있어.
뭔가 달라.
그게 뭐지?
그때였다.
순간 번쩍 오래전 어느 날의 광경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침대 옆에 소년이 쪼그려 앉아 있다.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나?
햇살 같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있었다.
산샤가, 어렸을 때의 자신이 창문에 걸터앉아 소년에게 물었다.
[넌 누구니? 왜 울고 있어?]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은은한 밤하늘 같은 눈동자가 젖어 있는 게 슬퍼서 산샤는 괜히 울고 싶어졌다.
꿈에서 봤던 소년이었다.
산샤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던.
산샤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아이.
소년이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가씨!”
찰싹, 어깨를 때리는 소리에 번쩍 광경이 사라져 버렸다.
“넋 놓고 뭐 하는 거예요?”
“아니타아….”
산샤는 소스라치게 놀란 가슴을 부여잡는데, 아니타가 종알거렸다.
“가주로서 첫 업무라면서 엄청나게 힘주던 분이 빈방 보면서 뭐 하냐고요. 집사가 대기 중이라니까요.”
“아…. 그래….”
“얼른 내려가요. 빨리요.”
“아니타, 잠깐!”
산샤가 서두르는 아니타의 팔을 잡았다.
“너 혹시, 햇살이 부서지는 듯한 머리카락과 깊은 밤하늘 같은 눈동자를 한 남자를 알아?”
“에?”
아니타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얼굴을 하고 한참 눈만 껌뻑거렸다.
“그게 뭐래요? 햇살이 부서지는 머리카락이 뭐야?”
한참 궁리하던 아니타가 물었다.
“혹시 백금발이요? 그걸 말하는 거예요?”
“…아?”
“눈동자는 …진한 남색인가? 아청색?”
“…아!”
아니타의 말을 듣고 보니 백금발과 아청색이다.
부서지는 햇살이나 깊은 밤하늘은 산샤가 느끼는 인상이었을 뿐 객관적인 색채는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소년은 오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백금발 아청색같이 멋없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인데….
좀처럼 인정할 수 없어 미적거리고 있는데, 아니타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머리 색에 눈동자를 한 사람은 딱 한 명 봤네요.”
“그래? 누구?”
“아가씨도 봤으면서 그래요.”
“내가?”
산샤는 눈을 깜빡거리며 아니타를 멀거니 쳐다봤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그런 소년을 본 적은 없는데?
“내가 누구를 봤다는 거야?”
“아드리안 경이요.”
“아…드리아…안?”
‘아드리안’을 외치는 목소리가 꽤액 갈라졌다.
이상하면서도 수상하지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그러나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아드리안이 여기에서 왜 나와?
아드리안도 머리카락에서도 햇살이 부서졌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긴 했었다.
그게 아니타 표현대로면 백금발에 아청색 눈동자겠지.
그렇지만….
산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거 같아.”
“아니긴요. 금발이라고 하기 곤란하게 하얗고 눈동자는 진한 남색 맞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본 그 애는 나랑 비슷한 나이야. 내 또래라고.”
“예? 뭐라는 거예요, 지금.”
아니타는 산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종알거렸다.
“…지금 아가씨 자신을 열서너 살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드리안 경이 어딜 봐서 아가씨 또래가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한다고 나이가 많은 건 아니라고요.”
“…어?”
아드리안이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다는 나이랑 관계없는 사람 같다고나 할까.
또래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어찌했건….
산샤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아드리안은 아니야.”
아니타가 뜨악한 표정을 하든 말든 산샤는 확실하게 매듭을 지었다.
“그 아이는 울고 웃고, 굉장히 감정이 다채로웠다고, 아드리안은 평생 한 번도 안 울었을 거야. 태어날 때 ‘응애’도 안 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