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산샤는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에 누워 벅차오르는 가슴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드디어 모리츠를 쫓아냈다.
지난 7년 동안 딱 그것 하나만 바라왔는데, 분한 마음으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결국 나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물론 이걸로 끝은 아니다.
모리츠라고 가만히 있겠나.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을 끌어내리려고 하겠지.
그렇다고 이쪽도 마냥 당하지만은 않을 테다.
모리츠의 악행을 다 밝혀내서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게 만들고, 합당한 벌을 받게 할 것이다.
모리츠는 ‘사과를 할 바에야 지옥에 가겠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하는 데까지! 끝까지! 밀어붙이고야 말 테다.
‘사과할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짓을 했겠어요?’
누군가 그렇게 말할 것 같긴 하다.
이상하면서도 수상하지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그러나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아드리안 같은 사람?
뭐, 다 좋아.
여황의 문을 열었는데 죽지 않았고 모리츠를 쫓아냈잖아.
이거면 되었다.
오늘은 마음껏 기뻐하자.
* * *
턱!
소년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가지 마, 위험해.]
얼음 강변의 하늘은 청명하고 산들바람이 하늘거렸다.
열 살이 조금 넘었을까. 어린 산샤가 방방 뛰었다.
[놔 봐. 지금은 잡을 수 있어. 내가 건져다 줄게.]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발을 담그기만 해도 영혼이 얼어붙는다면서….]
[에이, 아니야. 그냥 그냥 전설일 뿐이라고…. 완전히 꼬로록 머리까지 다 들어갔어도 안 죽어. 아버지가 그러셨단 말이야.]
그래도 소년은 손을 놓지 않았고, 산샤는 애가 타서 외쳤다.
[정말이야. 안 죽어. 얼른 옷을 벗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면 괜찮다고 했단 말이야. …야, 좀! 어머니의 유품이잖아. 저대로 흘러가 버리겠어.]
산샤가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소년은 잡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소년이 말했다.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네가 제일 중요해.]
산샤는 소년을 돌아봤다.
밝은 햇살이 하얗게 부서져 눈이 부셨다.
너는 누구?
그때 여자의 소리가 머릿속을 관통하여 박혔다.
[너는 또 다 잊어버렸지? 내가 말했던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
소리가 머릿속을 후벼 팠고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아악,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데, 소년이 외쳤다.
[일어나, 산샤. 눈을 떠.]
* * *
번쩍 눈을 떴다.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
산샤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무슨 꿈을 꿨던 거야.
그 소년은 누구였지?
여자는 또 누구야?
그때.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안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가 거슬렸다.
누군가 살금살금,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자신의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산샤는 문을 노려봤다.
방문의 걸쇠가 자유롭게 열려 있다.
집사에게 문단속을 철저하게 하라고 해놓고 정작 자신의 방문 잠그는 건 잊어버렸다.
걸쇠가 활짝 열려 있는 게 꼭, ‘아무나 들어와서 나를 죽여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이 방으로 오는 자는, 나를 죽이려는 자뿐이겠지?
모리츠를 쫓아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나?
저택 안에 있는 고용인은 모두 다 모리츠가 고용한 사람이었고,
누구라도 모리츠에게 충성을 증명하고 싶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너무 부지런하다. 오늘 밤쯤은 쉬어야 하지 않나? 모두 엄청나게 바쁜 날이었잖아.
소리가 멈췄다.
문에 바짝 다가온 듯했다.
이제라도 문을 잠그기는….
늦었다.
소리가 나서 오히려 주의를 끌 거다.
또 옷장에 숨어?
안 된다.
한 번 요행이 통했다고, 두 번도 통하겠나.
모리츠처럼 경솔한 사람이 여럿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없으면 옷장부터 열어볼걸.
산샤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 바짝 나무가 있다고 했던가?
나뭇가지를 잘 밟으면 내려갈 수 있을 거라고 아니타도 말했었잖아.
별수 없이 창문으로 나가야겠다.
산샤는 살금살금 움직였다.
소리 없이 창문을 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내려다보고는 안 되겠다.
그대로 닫아 버렸다.
너무 높다.
얼음 강 절벽에서 두 번이나 떨어진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세 번째 죽음에 가까워질 것 같았다.
산샤는 다시 문을 노려봤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정면 돌파!
산샤는 후다닥 달려가 문을 확 밀어젖혔다.
“꺄악!”
문밖에 있던 자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아니타?”
“아가씨….”
아니타가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산샤는 얼른 복도를 훑어봤다.
다른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이 밤중에 웬일이야?”
“그게…. 그게 말이죠, 아가씨.”
아니타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모리츠가 시켰어? 어떻게 하고 있나 감시하래?”
“모리츠요? …아뇨.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아니타가 기겁하며 팔을 내젓더니 히죽 웃었다.
“아가씨 뭐 필요한 거 없으신가 하고요. …제가 아가씨 전담 하녀잖아요.”
으응? 산샤는 새삼스럽게 아니타를 훑어봤다.
왜 이런 말을 하지?
아니타는 늘 무례하고 제멋대로였지만, 눈치만은 빨랐다.
그런데도 계속 전담 하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아니타, 이제 담당이 바뀔 거야. 각자 하는 일을 재배치할 거라고.”
“그러시겠죠. 그러니까 아가씨 전담 하녀인 제가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나 보러 온 거라니까요.”
“나는 이제 내 사람만 쓸 거라니까.”
“그러니까요. 아가씨 사람이요. 그게 저잖아요.”
“네가 내 사람이라고?”
“당연하죠. 제가 아가씨 사람 아니면 누구 사람이겠어요?”
“…너는 모리츠 사람이잖아.”
“어머! 어머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모리츠 사람이라니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방방 뛰며 수선을 떨던 아니타가 훅 다가와서 눈을 번득였다.
“그렇게 오해하고 계실 것 같아서 온 거라고요, 오해를 풀어드리려고요.”
이것 봐라.
산샤는 팔짱을 끼고 아니타를 뜯어 봤다.
“…네가 지금껏 모리츠에게 충성했던 걸 모르는 사람도 있니?”
“뭐라고요?”
아니타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당당하게 외쳤다.
“저는 사람에게는 충성하지 않아요. 얼마든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가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뭐라니? 이야기가 종잡을 수 없게 흘러간다는 건 그냥 느낌은 아니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까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말이야?”
“자랑스러우니까요.”
아니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져 물었다.
“상황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융통성이 있다는 뜻인데?”
하아, 이것 봐라.
설득될 뻔했다.
“생각해 봐, 아니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쓰겠니? 오늘 내 편인 줄 알았는데 내일 다른 편이 된 거라는 뜻인데.”
“그럼 아가씨가 간도 하고 쓸개도 하면 되잖아요.”
“뭐? …별 해괴한 소리를 다….”
산샤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아니타. 오늘은 그만 가.”
“아니, 아가씨…. 그게 아니라….”
“내일 와. 다른 데 갈 수 있게 소개장은 써줄게.”
“제가 필요한 건 소개장이 아니고요.”
“소개장만 있으면 어디든 취직할 수 있으니까….”
턱! 아니타가 닫히는 문을 잡았다.
평소 힘이 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산샤가 온몸으로 밀어붙이는데도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
아니타가 문 사이로 얼굴이 들이밀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제가 책임져야 할 동생이 일곱이에요. 지금 소개장을 갖고 나가면요? 여기서 받는 만큼 줄 데가 있을 거 같으세요? 이럴 때 누구에게 충성하는 건 나한테는 사치라고요.”
사치든 뭐든 일단 문을 닫고 싶다.
끙끙. 젖 먹던 힘까지 끌어쓰다가 결국 산샤는 소리쳤다.
“놔!”
“못 놔요.”
“놓으라니까.”
“못 놓는다고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쪽이 놓는 수밖에.
산샤가 문을 놔버리자, 아니타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들어왔다.
“아니, 아가씨! 그렇게 갑자기 힘을 빼면 어떻게 해요?”
아니타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아, 몰라요. 앞으로 쭉 전담 하녀로 써줄 거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안 나가요.”
부양해야 할 동생이 일곱이라고? 그동안 하녀 급료는 전부 동생들에게 써왔던 건가?
사정이 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니타잖아.
아니타가 함부로 대했던 것만 써도 책 한 권은 될 텐데.
그러니 어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휴 참! 답답해서 원….”
아니타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깟 전담 하녀, 앞으로도 쭈욱 너 해라. 그러면 되겠구먼. 뭘 그렇게 오래 생각하고 있어요?”
변함없이 무례한 아니타 같으니라고.
산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봐, 아니타.”
“나를, …뭘 봐요?”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 보라고. 제멋대로 함부로 무례하잖아.”
“예?”
“그런 너를 어떻게 전담 하녀로 두겠니? 디아머드 가주가 하녀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야겠어?”
“내가 아가씨를 무시한다고요?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나는 아가씨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지극정성으로 돌봤어요. 근데 함부로 대했다고요?”
아니타가 눈물을 찍어 누르더니 악을 쓰듯 외쳤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한번 말씀해보세요. 말씀해보시라고요.”
“…너는 내가 싫다고 해도 상관없이 오전 오후로 차를 마시게 했지? 막 입에 쑤셔 넣기까지 했잖아.”
“어? 그게 정말 싫어서 싫다고 한 거였어요? 배부른 투정 아니고?”
“투정?”
“시간 딱딱 맞춰 차 마시고 단 거 먹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세상 부러운 게 그거던데.”
“그 단 것에 약이 섞인 건 알고 있었어?”
“예?”
아니타가 슬쩍 눈동자를 굴려 외면했다.
“알고 있었네. 모리츠가 시키는 대로 내가 먹기 싫어한 약을 억지로 먹인 거였잖아.”
아니타가 오만 인상을 구기며 말을 할 듯 말 듯 한참 망설이더니,
“에이씨, 뭐 다 아시는 거 같으니까 말해봅시다. 그거 아가씨한테 꼭 필요한 약이잖아요. 바보가 되지 않게 하는 약이라는데….”
“뭐?”
“아가씨가 말도 안 하고 맹하고…, 그걸 먹으면 아주 바보는 안 된다잖아요. 아무리 싫어해도 먹어야지 어떻게 해. 다 아가씨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몰래 먹이는 약이 좋은 약이겠어?”
“숙부가 조카한테 나쁜 약을 먹이겠어요?”
“헐.”
산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니타는 진심인 것 같았다.
산샤는 아니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물었다.
“그럼 넌 뭐에 충성하니?”
아니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돈에 충성해요.”
그러더니 재빨리 덧붙였다.
“돈이면 다 됩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