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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17화 (17/97)

17화

결국 아드리안이 옷을 다 벗기고, 담요를 씌워놨구나.

이토록 자유로울 수가.

평생 이불을 걷어차도 해결하지 못할 부끄러움을 얻었구나.

그러다 문득, 아드리안은 멀쩡하게 옷을 제대로 입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쪽은 실오라기 하나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놓고서는, 본인은 강에 들어갔던 그대로 입고 있다니.

“당신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네요?”

“나는….”

아드리안도 모순을 깨달았는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놓은 답은 ‘괜찮다’였다.

“몸에 강물 한 방울이라도 남아 있으면 안 된다면서요. 내가 정신을 잃었던 거 보면 영향은 확실히 있었던 것 같고…. 당신은 어떻게 괜찮죠?”

아드리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정도는 익숙하니까.”

“익숙? …날마다 강에 몸을 담그는 훈련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움찔, 아드리안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마 웃는 건 아니지?

“…뭐, 그렇다고 해두죠.”

아드리안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호하게 대답하고 장작을 집어 던졌다.

이미 활활 타고 있는 불이 사방에 불티를 날렸다.

“숲이라도 태울 셈이에요?”

멈칫, 장작은 던져 넣던 아드리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자신도 너무 심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장작을 던져넣는 것을 멈췄고,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차라리 숲을 태워 버릴 걸 그랬나. 아무것도 안 하는 건 괴로울 정도로 어색했다.

아드리안이 열심히 장작을 넣었던 것도 어색해서였는지도 몰라.

산샤는 아드리안을 슬쩍슬쩍 훔쳐봤다.

몇 번을 봐도 처음 본 듯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아드리안.

그렇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아드리안과 이런 동굴에 단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건 어색하다.

자꾸 훔쳐보게 되니까 더욱 어색했다.

“고마워요. 또 도움을 받았네요.”

아드리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장작을 던져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역시 어색해서 장작을 마구 태웠던 거로군.

산샤는 아드리안도 어색해한다는 사실에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이러다가 아무 때나 당신만 기다리고 있을까 봐 걱정이네요.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스스로의 힘이에요.”

“그래도 디아머드는 디아머드, 클라이드는 클라이드인데…. 독립해야 하는데 말이죠.”

아드리안의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독립을 논하기엔…. 이런 장소에 맞지 않은 대화로군요.”

산샤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장소에 맞는 대화가 따로 있나?”

“어쩌다가 강에 빠졌나, 어떻게 성에 돌아갈까, 그런 이야기가 더 적당하지 않을까요?”

“아….”

민망함을 감추려고 나오는 대로 말하다가 더 민망해졌다.

산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얼음강에 빠졌던 여파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줘요.”

“그럴게요.”

아드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샤도 장단을 맞추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거니 받거니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까 할 게 없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잠깐 부딪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아드리안이 피하지 않고 그대로 산샤를 바라봤다.

산샤도 그의 시선을 받아서 되돌려줬다.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다가, 산샤는 물었다.

“우리 전에도 만난 적이 있죠? 원래 아는 사이였어? 맞죠?”

아드리안은 시선을 돌리고 한참 깊이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샤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슨 대답을 하려고 일어나기까지.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를 할 건 아니지?

불안하고 떨리고 설레기까지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뚜벅뚜벅 걸어가 산샤의 옷을 가지고 오더니 조용히 내밀었다.

“곧 데리러 올 거니까, 옷을 입어요. 저기 안쪽에서 입을 수 있어요.”

불을 얼마나 지펴댔는지, 옷이 마르다 못해 바삭하게 잘 구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실망스러웠다.

누가 옷을 입쟀니?

“…데리러 오기는, 누가? 아무리 빨라도 사흘은 걸릴걸.”

“루카가 배를 띄웠어요.”

“뭘 띄워요? 배요?”

북부 사람은 얼음강에 배를 띄우지 않는다.

신성한 강은 그대로 흐르게만 둘 뿐, 어떠한 것도 범할 수 없다.

“…얼음강에 배를 띄우다니, 제정신이에요?”

“그럼 어쩌나. 강을 뱅 돌아서 와요? 오며 가며 일주일은 넘게 걸릴 텐데?”

“북부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하죠. 한 달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요.”

“불합리하군.”

“예?”

“폭력적이고.”

“폭력?”

“필요한 때에 배를 띄울 수 있으면, 강에 빠졌다고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지도 않을 텐데.”

“아….”

산샤는 말문이 막혔다.

“정작 글라키에스는 강에 배를 띄우든 말든 관심 없을걸.”

그러려나?

그럴 것도 같다.

시작도 끝도 없이 살다 보면 그런 것쯤 하찮은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산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작도 끝도 없이 살다’라니….

어디서 들은 말이지?

다른 말도 잔뜩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머리가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배는 띄워졌다니, 옷이나 입는 수밖에.

산샤는 가르쳐 준 곳으로 들어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아드리안이 물었다.

“…클라이드 호텔이 좋겠어요? 아니면 아델라이드에 방을 하나 낼까요?”

“클라이드는 뭐고 아델라이드는 뭐예요?”

“오늘 당장 지낼 곳이죠. 하루 정도는 지낼 곳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

“내 집 두고 왜요?”

움찔 아드리안의 어깨가 움직였다.

“…돌아가겠다고?”

“당연하죠.”

아드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심호흡이라니….

한참 심호흡을 하던 아드리안이 물었다.

“…난간이 혼자 부서졌다고 생각해요?”

“그럴 리가 있나요. 수백 년 풍파를 견디며 단단하게 굳은 난간인데요. 누군가 장난을 쳤겠지.”

모리츠라든가, …또 모리츠라든가.

“그걸 알면서도 돌아가겠다고?”

“그러니까 돌아가야죠. 안 돌아가 봐. 모리츠가 얼마나 신나겠어. 그렇게 둘 수는 없잖아요.”

“위험이 닥쳐도?”

“이러든 저러든 이미 위험한 걸, 뭐.”

아드리안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거기에 산샤는 가볍게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죠.”

“조금은 신중해지는 게 좋겠어요. 지금 상황은 아무리 신중해도 과하지 않으니까.”

“신중은….”

아드리안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산샤를 걱정해주는 건 아드리안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되도록 걱정을 끼치지 않고 싶었지만, 산샤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신중은, 그동안 신중했던 것으로 충분해요. 이젠 경솔할 거예요. 마구 일을 벌이면서 닥치는 대로, 되는 대로 마구 뚫고 나갈 거야. …그러기로 했어요.”

아드리안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제 나가죠. 루카가 와 있을 거예요.”

“이왕에 돌아갈 거면 작전을 제대로 짜서 가야 한다. …그런 말은 안 해요?”

“해봐야 소용없을 거니까. 경솔하게 마구 일을 벌이겠다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

“그건 그렇지만, …태도 변화가 굉장히 극적이시네요.”

“각오했으니까요.”

“무슨 각오요?”

“레이디가 보호 따위 필요 없다고, 모리츠 따위 두렵지 않다고 말할 거라는 각오. 말릴 수 없을 거라는 각오, …그런 것들.”

아드리안이 이어서 말했다.

“클라이드는 클라이드, 디아머드는 디아머드. …나는 클라이드의 수호자일 뿐이니, 디아머드 일에는 관여할 필요가 없으니까.”

어쩐지 서운했다.

클라이드는 클라이드, 다이머드는 디아머드.

당연한 말인데다가 이미 자신이 했던 말인데도 아드리안을 통해서 들으니까 황량하게 버려진 것 같았다.

산샤는 부러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그럼 우린 이제 다시 볼 일이 없겠네요.”

* * *

아드리안은 인사도 없이 산샤를 내려주고 떠나버렸다.

산샤가 마차에서 내리자, 저택에서는 우르르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아니타는 대번에 꽤액 소리부터 질렀다.

“꺄아악! 아니! 이 옷은 또…. 오늘 진짜 왜 이러신대요? 어디 사라졌다 오면 옷이 막 이상해져 있어. 막 아가씨 마음대로 그러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니타!”

“내가 종일 놀고먹는 줄 아시죠? 이렇게 일을 막 만들어서 갖다 던지지 않아도 충분히 내가 바쁘고….”

“아니타?”

산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자 아니타는 입을 다물었다.

산샤의 눈치를 살피더니 두 손을 배꼽 앞에 모으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모리츠가 집사와 하녀장을 거느리고 산샤 앞을 막아섰다.

“산샤! 구조대를 꾸려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모리츠 자작?”

산샤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음색에, 뚝, 모리츠가 말을 멈췄다.

“자작이 왜 아직도 여기에 있죠?”

“무슨 소리냐, 그게?”

이럴 줄 알았다.

나를 강물에 빠트려 놓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을 줄.

그렇지만 증거가 없으니 강물에 빠트렸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밀어 넣지 않았고 말이다.

“분명히 가주로서 명했을 텐데요? 성에서 나가라고.”

“사고가 있었잖니. 구조대를 꾸려야 했고….”

“계승식이 끝나자마자 당장! …이라고 했어요.”

“산샤! …내가 성에 있든 없든 어른으로서 의무는 다할 거다. 그러니 내가 여기 머무는 건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구나.”

성에서 쫓아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협박인가?

“상징적이잖아요. 후견인이 필요 없는 가주가 된 첫날,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싶으니까요. 나는 가주로서 명했으니, 자작은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더 길게 이야기하고 있을 필요는 없고…. 집사?”

“예.”

“문단속에 두 세배 신경 써. 잡스러운 것이 기어들지 않도록.”

그 말에 자동으로 집사의 눈동자가 모리츠에게로 돌아갔다.

모리츠가 잡아먹을 듯이 집사에게 눈을 부라리자,

“저기…. 아가씨?”

집사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날이 저물기도 했고, 자작님은 이마에 부상도 저렇게…, 저러시고요. 오늘은 성에서 쉬시고 내일 옮기셔도 되지 않을지요?”

“집사!”

전에 없이 냉정한 산샤의 표정에 집사가 바짝 긴장하며 등을 세우고 자세를 바로 했다.

“예, 아가씨.”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 확실히 해줘.”

“무슨 말씀이신지….”

“내 명령보다 자작의 안위가 더 걱정이면, 자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자작이 그렇게 걱정되면 따라가. 원래도 친분이 깊은 사이였지?”

“…에? 아, 저기…. 그게….”

집사는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떨렸다.

“아닙니다. 오해이십니다. 저는 디아머드 백작 가문의 집사입니다. 자작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

“예! 그렇고말고요. 소개소에서 처음 만났고, 소개소에서 저택까지 따라온 게 답니다. 저는 아가씨, 아니, 가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집사는 모리츠를 외면하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제가 자작님을 클라이드에 모셔다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럴래? 수고해요, 집사.”

“옙!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산샤는 빠드득 이를 가는 모리츠를 돌아보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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