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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16화 (16/97)

16화

얼음여황 글라키에스라는 여자가 말했다.

“글라키에스의 선택을 받은 자여. 글라키우리를 가진 자 얼음 땅을 갖게 되리니, 세세토록 글라키에스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여자가 뿌듯한 얼굴이 되어서 산샤를 돌아봤다.

“어떠냐?”

뭐가 어떠냐는 건지….

“어떠냐고, 대답하라고.”

여자가 재촉하자, 산샤는 겨우 말했다.

“나는 죽었나요?”

“…어휴, 야!”

여자가 소리쳤다.

“안 죽었다니까. 몇 번을 말해.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너 지금 꿈꾸는 거야.”

“내 꿈에 얼음여황 글라키에스가 왜 나와요?”

“나올 만하니까 나왔지. 따지기는….”

어느새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여자가 손가락으로 산샤의 이마를 쿡 찍어 눌렀다.

“한낱 미물 주제에 건방지게. 내가 하는 일을 따진단 말이냐?”

이토록 가볍고 무례한 자가 얼음여황이라고? 말투만 놓고 보면 딱 그냥 아니타인데?

여자가 콧방귀를 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을 살아 봐라. 장엄하고 위대하고 폼 나는 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게 될 테니…. 됐고!”

어느새 홀의 중앙에 날아간 여자가 말했다.

“얼음 땅을 갖게 된다는데 아무 느낌도 없어?”

“얼음 땅…, 그게 뭐죠?”

“야아…. 진짜….”

여자가 무지갯빛 머리를 마구 휘저으며 탄식했다.

“어떻게 볼 때마다 똑같은 데서 막혀. 애가 뭘 기억하는 게 없냐고.”

“기억에 관해서라면, 모리츠가….”

여자가 푸욱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알아. 그게 다 모리츠 때문인 건 알고 있어. 근데 그거 말고도 너의 기억은 구멍투성이라고. 그러니까 다시 설명해줄게. 잘 들어.”

꾸벅, 산샤는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 땅은 얼음강의 기운이 흐르는 모든 곳이야. 그러니까 결국 대륙 전체겠지? 너는 대륙을 정복해야 한다는 말이야. 바로 너!”

“아…?”

“내 선택을 받은 네가 말이야.”

여자가 콕 찍어 말했지만, 여전히 산샤는 아무 감흥도 일지 않았다.

대륙을 가져서 쓸 데도 없고.

“…보검 글라키우리는 카이 백작이 죽을 때 함께 사라지고 없는데요.”

“그러니까 찾으라는 거지. 아무렇게나 집어 올 수 있으면 그게 어떻게 고난의 영웅 이야기가 되겠니?”

“…그러니까 보검 글라키우리를 찾아서 고난의 영웅이 되라는 거예요?”

“그렇지!”

여자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이제야 알아듣는구나! 너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지만 나 글라키에스가 선택했으니까. 보검도 찾고 대륙도 정복해.”

산샤는 새삼스럽게 스스로 글라키에스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훑어봤다.

“진짜 글라키에스예요?”

“응응. 당연하지.”

여자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샤는 아무것도 없는 궁전을 돌아보고 다시 여자를 봤다.

“아무것도 없는 궁전에서 심심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네요?”

“…어? 심심하지는 않은데….”

“대륙을 차지해라 어째라…. 관심도 많고.”

“응응, 관심 많…지. 아주 많아.”

“근데 물에 빠지면 영혼부터 수거해 가요?”

“야아, 그거 내가 그런 거 아냐.”

글라키에스가 억울하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강물 차갑다고 너희들이 서로 안 구해주니까 그랬던 거지. 너 봐, 안 죽었잖아.”

“모리츠는요? 모리츠는 왜 그냥 두고 있어요?”

“…모리츠가 왜?”

“설마 모리츠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건 아니죠?”

“알지. 알지. 내가 로베르트를 계승자로 선택하니까, 그놈이 명부의 신 오르쿠스를 소환한 거야. 내가 주인인 이 북부에 말이야. 여긴 내 구역인데 어딜 감히 오르쿠스 같은 잡신을….”

“아니. 신의 구역 그런 거 말고…. 그자가 저지른 악행을 말하는 거예요.”

“뭐? 고양이 백 마리 죽이고, 사람들 죽이고…. 그런 거?”

“고양이까지 죽였어요?”

“오르쿠스가 죄 없는 순수한 영혼을 바치라고 했대. 모리츠가 처음엔 겁이 많았거든. 제가 죽일 수 있는 게 고양이뿐이었지. 그러다가 제 아버지한테 들켜서 가문에서 추방당했잖아.”

충분히 추방당할 죄였다.

디아머드 백작 가문은 말할 줄 모르는 짐승에 해코지하지 말라는 원칙이 있으니까.

“그런데도 모리츠가 배 두들기며 살게 그냥 뒀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신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어떻게 보여 줘?”

어리둥절하며 깜빡거리던 여자가 물었다.

“…뭐, 천벌이라도 내리라고?”

“예! 바로 그거요. 천벌이요.”

“헛. 얘 보게. 이렇게 물색없는 소리를 하고 앉았네. 실망스럽게.”

“어디가 물색없어요? 대륙을 차지하라는 것보다 훨씬 멀쩡한데….”

“야아! 이 멍청한 계집아아아아아아!”

우룽 우루룽.

얼음 궁전이 여자의 외침을 따라 진동하더니, 소리가 그대로 머릿속으로 날아와 꽂혔다.

소리가 머릿속을 누르고 쥐어짰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시작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나가 숨이 막혔다.

이대로 딱 죽어버릴 것 같은 순간, 여자가 외쳤다.

“넙죽 엎드려 기어도 될까 말까 한 미물 주제에 어디에서 감히! 내가 글라키에스란 말이다. 너는 내 계획을 실행해야 할 존재라고.”

산샤는 움츠러드는 어깨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몸을 세우려고 했다.

글리키에스가 맞긴 맞나 보다.

소리를 질러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흔치는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소리는 이쪽도 지를 수 있다고!

산샤는 눌린 목구멍을 겨우 열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악아아아아….”

잠깐도 멈추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다.

자신의 소리로 글라키에스의 소리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온몸을 쥐어짜 봐라, 내가 굴복하나.

그런데….

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머릿속을 헤집어대던 공명음이 느껴지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다.

얼음 여황의 공격도 막아내는 비명이라니….

대단하잖아!

산샤는 뿌듯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한쪽 눈을 살짝 떠봤다.

그러나.

피시식.

으쓱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글라키에스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가소롭다는 듯이 보고 있다.

막아 낸 게 아니군. 글라키에스가 아무것도 안 했던 거였어.

괜히 소리 지르느라 목만 아팠다.

“투지는 인정한다. 아아아주 마음에 들었어.”

글라키에스가 짝, 짝, 짝, 천천히 손뼉을 쳤다.

“너 목청 좋은 건 잘 알았으니까, …얼음 땅 이야기나 계속하자.”

“모리츠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요.”

글라키에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모리츠 이야기는 더 해 봐야 소용없어.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때그때 천벌이 내려져 봐라. 세상 꼴이 어떻게 되겠나.

…신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지켜보기만 할 뿐…. 그런 거 안 배웠냐? 천벌을 기대하지 마. 그런 건 없어.”

산샤는 글라키에스를 바라봤다.

글라키에스가 해준 은혜로운 일에 관해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랑이 넘치는 존재라 했는데….

악행이든 선행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가?

모리츠의 악행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한다고?

“…억울하면 네가 힘을 가져. 글라키우리를 찾아서 얼음 땅을 정복하라고. 그 힘으로 직접 벌을 내리란 말이다.”

글라키에스가 다가와 산샤의 손을 사르륵 쓰다듬었다.

손길이 지나간 곳에 오소소 하얀 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뭐부터 해야 하는지 잘 알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그러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몸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글라키에스가 말했다.

“너는 할 수 있어. 나를 봐.”

허억!

글라키에스 얼굴을 본 산샤는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 * *

아드리안은 불을 지피고 있었다.

동굴은 훈훈함을 넘어서 찜통같이 뜨거웠지만, 아드리안은 쉬지 않고 장작을 집어넣었다.

얼음강에 빠지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저 전설일 뿐이라는 건 어릴 때 경험해 봐서 알고 있었다.

몸이 얼어붙기 전에 건져내어,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닦아내고 체온을 올려놓는다면 살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산샤의 체온을 올려놔야만 했다.

해야 한다면 숲이라도 태워 버릴 작정이었다.

강변에 피난처를 만들어두길 얼마나 잘했는지.

다행히 산샤는 괜찮은 것 같았다. 기절하긴 했지만, 손발도 따뜻하고 숨소리도 고르다.

꿈틀.

산샤가 움직였다.

깨어나려는 건가?

아드리안은 급하게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었다.

그때 갑자기,

“아아악!”

산샤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저리 가. 이게 아니야아-”

손발을 버둥거리며 눈앞의 무엇인가를 밀어내려는 것도 같았다.

어찌나 필사적인지 아드리안은 산샤의 두 손을 잡으며 외쳐 불렀다.

“샨사!”

“아드리안?”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산샤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요, 레이디. 나예요. 이제 괜찮….”

“아드리아안….”

산샤가 아이처럼 말끝을 늘이며 아드리안을 부르더니 품으로 파고들었다.

뭉클하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에 아드리안은 움찔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더 파고들 데도 없는데 여전히 꾸물꾸물 움직이면서 산샤는 칭얼거렸다.

“나, 꿈꿨어. 아드리안.”

아드리안은 망설이다가 속삭였다.

“또 무서운 꿈이야?”

“응. 무서워.”

“아직도 무서운 꿈을 꾸는 거니, 산샤?”

“으응, …다시는 안 꾸고 싶어.”

“…더 자. 푹 자고 나면 다 잊어버릴 거야.”

아드리안은 조심조심 산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산샤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편안해졌다.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굉장히 향긋한 냄새가 났는데….

삼나무 향인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낯선 건 무엇엔가 안겨 있다는 것.

익숙한 것은 아드리안의 품이라는 것?

산샤는 번쩍 눈을 떴다가, 얼른 감았다.

자신이 아드리안의 품에 마치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폭 파묻혀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안긴 거지?

…어쩌면 좋을까?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조금이라도 덜 민망할 텐데.

어떻게 일어나야 할지, 아무리 궁리해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아드리안이 말했다.

“깼으면 일어나요.”

발딱 일어나서 후다닥 떨어졌다.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산샤와 달리 아드리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잠꼬대를 심하게 하던데….”

아드리안이 무심하게 장작을 던져넣자, 모닥불이 불티를 날렸다.

잠꼬대 때문에 잡아주고 있었다는 건가?

아닌 게 아니라 안겼다고 하기엔 자세가 어설펐던 것 같기도 하다.

그거면 그럴 수도 있지.

악몽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달래주는 건 인지상정이잖아.

휴, 다행이다

머리를 쓸어올리는데,

이건 또 뭐야. 옷소매가 안 보여.

그리고 몸은….

허전하고도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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