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지난 생에 먹였다는 약이 그거였어?
오러를 보게 하는 약이 아니라, 오러를 볼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리게 하는 약이었다고?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너에게 필요한 약이었으니까. 졸지에 부모를 잃고 얼마나 괴로웠니? 너를 괴롭히는 기억만 쏙쏙 뽑아 잊게 해주는 약이었지. 그 안에 글라키에스의 가호가 들어갈 줄은 나도 몰랐단다.”
거짓말.
일부러 그 기억을 지웠으면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구나. …뭐, 그래도 상관없다만.”
“아…!”
산샤는 탄식했다.
오러를 보는 능력이 두려워할 게 아니라, 글라키에스의 가호였다니!
열세 살이었다.
로베르트가 갑자기 가족여행을 가자고 했다.
산샤는 영지를 벗어나는 여행은 처음이라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출발 당일.
갑자기 고열이 나더니 헛것이 보이기까지 했다.
로베르트는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여행이라면서 산샤만 남겨 두고 떠나 버렸다.
금방 돌아올 거라고.
돌아오면 알려줄 게 많다는 말만 남기고.
열흘 넘게 아팠다던가.
겨우 깨어났더니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며 후견인이라고 모리츠가 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그의 오러가 어찌나 흉악하던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첫날 바로 알았다. 로베르트가 능력이 발현되었을 때 나를 보던 눈과 똑같더란 말이지. 오러를 보는구나. 글라키에스의 가호가 발현되었구나. 보통은 스무 살에 발현되는 건데…. 벌써 되어버렸구나. 내가 도와줄 틈이 없겠구나. 그래서 스무 살까지 기다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도와줘?”
모리츠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너를 위해서였어. 심하게 아프고 난 지 얼마 안 되었고, 부모까지 죽었는데, 감당하기 힘들잖아, …그래서 약을 먹였다.”
산샤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모리츠는 백작 성의 고용인들을 자기 사람으로 다 갈아치우고, 가문의 어른으로서 발언권도 확보했다.
들어올 때는 입은 옷 한 벌이 전 재산이었던 사람이 디아머드 전역에 집과 땅이 있다.
“7년이면 가문을 장악하고 재산을 마음대로 빼돌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겠네.”
“무슨 소리냐, 그게?”
모리츠가 억울하다는 듯이 눈꼬리를 축 떨어트렸다.
“내 진심을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 못 하겠니?”
진심이라니.
진심이라는 단어를 그런 데에 쓰는 게 아니지.
“산샤, 네가 깊은 오해를 하고 있구나. 나는 후견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란다. 백작 가문의 재산을 지켰고 정신이 혼미한 너를 보호해왔어.”
언제까지 이 잡소리를 듣고 있어야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추방이니, 열세 살에 이미 발현된 능력이니, 끝까지 모르는 척하면 아무도 모를 이야기를 왜 하고 있냐고.”
“그게… 여황의 문도 열었고…. 네가 마지막까지 모르고 있으면 좀 그렇잖니.”
모리츠가 비릿하게 웃었다.
“너라도 알아줬으면 했지. 끝까지 아무도 몰라주면 내가 너무 서운하잖아.”
관심받고 욕구가 넘쳐서 자신이 한 짓도 다 까발린다는 건가?
[…가지려면 움직여야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단 말이다.]
가문에서 추방당하고 이름까지 파였던 자신이 돌아와서 성공한 걸 인정받고 싶었구나.
어떻게 디아머드를 차지했는지 자랑하고 싶었어.
[너를 봐.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아무리 순정을 바쳐도 모르는 척하던 마리에의 딸을 조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이제 죽여 없앨 테니 그동안 참았던 말을 다 풀어놓겠다는 건가?
“덕분에 잘 알았어요. 지난 7년 동안 내가 얼마나 한심했는지…. 뭐 더 알아야 할 건 없나요?”
“글쎄다.”
모리츠가 한발 다가섰다.
“말한다고 네가 알까. 너는 그저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귀한 레이디일 뿐인데….”
모리츠가 또 한 발 다가섰다.
“냉정한 마리에와 무심한 로베르트, 그들의 아이인 네가 웃을 때 나는 진창에 처박혀 있었다는 걸 알까.”
이제 모리츠와 산샤 사이엔 겨우 주먹 하나가 지나갈 정도밖에 틈이 남지 않았다.
모리츠의 눈이 광기로 불타오르고 오러가 사방에 뻗쳤다.
겁이 났지만, 그럴수록 산샤는 턱을 쳐들었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알아야 할 건 모두 다 알고 있으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멈칫, 모리츠가 산샤를 바라봤다.
“그래, 알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알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단다.”
모리츠가 다시 한 발 더 다가섰고, 산샤는 난간 때문에 더 물러설 데가 없는데도 물러섰다.
순간 난간이….
기울어지는 건가? 생각하는 동시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산샤를 보고 모리츠는 뒤로 물러났다.
풍덩!
산샤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산샤가 얼음강에 완전히 잠긴 것을 보고서야 모리츠는 외쳤다.
“레이디가 얼음강에 빠졌다!”
일순 노랫소리가 멈췄고….
그때 산샤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저기, 저기 레이디가 있다.”
누군가가 외쳤고, 모두 몰려들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누군가는 잡고 나오라고 나뭇가지를 던졌고 밧줄도 던졌다.
그러나 산샤에게는 턱없이 멀었고, 산샤는 그대로 다시 꼬로록 강으로 끌려 들어갔다.
까아악.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무릎을 꿇고 글라키에스를 외쳐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음강이니까.
물에 빠지면 영혼은 얼음여황 글라키에스가 가져간다는 곳.
산샤를 위해 영혼을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산샤는 굳어 가는 팔다리를 열심히 휘젓고 있었다.
괜찮아.
악착같이 살아남아야지.
묶여 있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잖아.
몸이 얼어붙고 있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도 있었다.
그때 번쩍!
강물이 빛났다.
빛이 물결로 스며들어 넘실거렸고, 햇살이 부서져 찬란하게 빛나는 그가 산샤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산샤에게 손을 뻗어 확 끌어안았다.
넓은 가슴에 폭 안겨 산샤는 믿을 수 없어서 바라보았다.
아드리안?
“산샤!”
아드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았다.
물속에서 들릴 리 없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토록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이라니….
낯설어야 하는데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고 감미로웠다.
꿈인가?
이미 죽어 헛것을 보고 있나?
* * *
산샤의 두 다리는 강변의 땅을 밟았다.
강 건너편 먼 곳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레이디가 강에서 나오셨다.”
“구조대를 보내. 구조대를 소집해라.”
산샤는 그들의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드리안이라니!
산샤는 믿을 수 없었다.
한밤인데도 햇빛이 부서지는 듯한 백색의 금발이 출렁거렸고 얼음강보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지만….
왜 당신이?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멍하니 바라보다가 살짝 이름을 불러 봤다.
“아드리안?”
아드리안이 산샤의 뺨을 쓸어 만졌다.
산샤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어깨와 팔을 만지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꿈이 아닌가?
자신을 안고 있는 아드리안의 심장이 이렇게나 힘차게 뛰고 있는데, 꿈일 수가 없다.
“어떻게 알고 온….”
“이대로 있으면 안 돼요.”
아드리안이 확 당기더니 어딘가로 밀어 넣고 갑자기 산샤의 드레스를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산샤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너무 놀라서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사이 드레스가 흘러내렸다. 드레스는 팽개쳐졌지만, 아드리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슈미즈의 매듭을 당겼다.
“멈춰! 그만!”
산샤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멈출 수 없어요. 일분일초가 급해.”
“아니야, 안 돼. 이게 무슨 짓…. 어떻게! 감히!”
스르륵 밑으로 흘러내리는 슈미즈를 움켜쥐며 산샤는 외쳤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요!”
그 와중에 또 흘러내리는 것을 돌돌 말아 쥐고 산샤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히 강변에 서 있었는데, 어느새 동굴이다.
확 당겼다가 밀어 넣은 곳이 여기였나 보다.
사람들 시선을 피해서 아늑한 곳을 들어온 건 좋다.
아니다.
산샤는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좋지 않다. 당연히 안 좋다고.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산샤를 보며 아드리안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벗어야 해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옷을 왜 벗기겠다는 거예요?”
“곧 몸이 얼어붙을 거니까.”
“…에?”
“얼음강이잖아. 영혼까지 얼어붙는 얼음강!”
“아….”
“빠져나온 걸로 끝난 게 아니었어요?”
“몰라요? 디아머드 계승자라면 얼음강에 대한 것부터 배우지 않나? 당연히 빠져나온 걸로 끝나지 않지. 몸에 물방울 하나 남기지 말아야 해. 그러니 젖어 있는 옷을 벗어야지.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아드리안이 산샤의 손에 말아 쥔 것을 뺏으려고 하는데,
“내가!”
산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그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내가 벗어요. 내 손으로….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당신이 벗기는 건 안 될 일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그대로 스르륵 세상이 깜깜해져 버렸으니까.
* * *
“산샤, 산샤….”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기절했었나?
옷을 벗던 중이었는데….
남은 옷은 어떻게 했지?
설마 아드리안이?
알몸을 아드리안이 봤어.
보면 좀 어때. 응급상황이잖아.
아니야. 그래도 부끄러워.
두서없는 생각들이 정신없이 쏟아져 비몽사몽 헤매는데….
“산샤 디아머드! 당장 일어나지 못해?”
소리가 귀를 통하기도 전에 머릿속에 들어와 박혔다. 진동하며 머릿속을 뒤집어버렸고, 날카로운 고통에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눈앞이 온통 하얗다.
투명한가?
“하아….”
공중으로 뱉은 입김이 흩어지더니 하얗게 얼어붙었다.
자신의 방은 당연히 아니었고, 땅 위에 있는 어떤 곳도 아닌 것 같았다.
얼음 여황 글라키에스가 사는 얼음 궁전이 이런 모양이라고 배웠는데….
어째서 이런 곳에 누워 있을까.
얼음 궁전은 죽어야 오는 곳이 아니었던가?
죽었나?
기어이 죽어버린 거야?
“너 안 죽었어.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일어나. 일어나라고, 쪼옴.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자빠져 있을 거야?”
대체 누가 이렇게 무례한가? 아니타보다 더하네.
산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계가 까마득한 넓고도 넓은 홀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딱 한가운데에 형체가 있는데, 얼핏 보면 흰색이고 다시 보면 무지갯빛이었다.
그것과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것이 훅 산샤에게 다가왔다.
멈춰 섰을 때는 무지갯빛 머리를 풀어 헤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산샤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자가 경쾌하게 팔을 펼쳤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우루룽 소리가 진동하며 사방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음여황 글라키에스.”
얼음여황이란다.
진짜 얼음 궁전이었구나.
정말로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