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14화 (14/97)

14화

그때 불쑥 채찍 남자가 튀어나와서 쿵, 무릎이 깨지게 꿇더니 두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레이디, 만세 만세 만만세!”

“채찍…. 앗, 하, 하, 하.”

엉겁결에 ‘채찍 남자’라고 부를 뻔한 산샤는 일단 웃었다.

그랬다가는 이 사람도 이름을 불러달라고 주정하겠지?

감정이 격해져서 채찍을 날리면 어쩌냐. 치료해줄 아드리안도 없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부를 수도 없고 안 부를 수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웃는데, 채찍 남자가 제 가슴을 퉁퉁 치며 말했다.

“제 이름은 딕키입니다. 마차에서 말씀드렸죠?”

“아, 그래. 딕키!”

듣고 보니 들은 것도 같다.

“자, 이놈은 모르는 척하시고요. 제 부모도 못 알아볼 만큼 취했거든요.”

딕키가 랄프를 밀어내고 산샤를 안내했다.

“자,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기 앉으세요.”

그러면서 소리쳤다.

“뭘 보고만 있어? 어서 레이디에게 잔을 가져다 드려야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잔을 가져오고, 접시를 가져오고, 담요를 깔고. 사람들은 부산하게 우왕좌왕 움직였고….

순식간에 산샤 앞에 술상이 차려졌다.

“술을 마시라고?”

“당연하죠. 이 좋은 날 안 마시면 되겠습니까?”

딕키는 커다란 단지에 담긴 호박색 액체를 콸콸콸 넘치도록 술잔에 따라주면서 입맛을 다셨다.

“벌컥벌컥 캬…. 천상의 맛을 느껴보셔야죠.”

“천상의 맛?”

산샤는 잔에 담긴 호박색 액체를 유심히 봤다.

천상의 맛이라니!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니야. 안 마실래.”

“아니, 왜요? 레이디는 이제 어엿한 스무 살. 술맛을 알아야 할 나이란 말입니다.”

“알아. 아는데….”

산샤는 히죽히죽 해롱해롱한 상태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안 되는 날이니까.”

“에엑?”

랄프가 괴성을 지르며 뛰어왔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오늘이야말로 정신 줄 놓고 즐겨야 할 날이구만.”

“그래요, 레이디. 암울했던 시간을 끝낸 날이잖아요. 오늘 안 마시면 언제 마셔요?”

“그거야 그렇지. 그렇지만…, 그러니까 그럴수록 더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딕키와 랄프는 알아듣지 못해서 멍해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산샤는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어서 그저 배시시 웃고 말았다.

지난 생에는 다 되었다고 마음 턱 놓고 있다가 죽어버렸으나 이번 생엔 그럴 수 없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데다가 무엇보다 모리츠를 제대로 응징해야 하니까.

이미 많은 것이 지난 생과 달라졌으니 오늘 밤은 무사히 지나갈 거라고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직 하루가 다 지나지 않았으니까.

산샤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멍하니 손 놓고 있다가 속절없이 죽어버리는 꼴만은 당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야지.

딕키도 술을 두 번 권할 생각은 없었는지 산샤에게 주려던 술을 홀짝 마셔버리고는,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 오, 오. 우리는 이제 살았다….”

산샤는 불끈 쥐었던 주먹을 더 꽉 움켜쥐었다.

안 그랬다간 온몸이 배배 꼬일 것 같다.

“…정말 괴상망측한 노래라니까. 누가 이런 노래를 만든 거야?”

“누구긴요? 우리 다 같이 만들었지. 이게 부르다 보면 계속 부르게 된다니까요. 중독성이 있어. 레이디도 따라 부를 수밖에 없을걸요.”

“그럴 리가 없어. 여기 어디에 중독성이 있는데?”

그러나 금세….

타박한 게 무색하게 산샤도 그들과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방방 뛰어다녔다.

노래 부르고 방방 뛰는 날이 오다니, 꿈만 같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 계시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취한 사람들에게는 취한 사람만의 체력이 있나 보다.

숨이 차서 도저히 따라다닐 수가 없었다.

나중에 정신을 놔도 될 날이 오면 그때 자신도 진탕 마시고 밤이 새도록 뛰어보리라 다짐하며 산샤는 그들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정석 광산 앞에 섰다.

입구가 활짝 열려 있는 광산은 아름다웠다.

오색 빛깔이 아롱대는 짙은 안개라니, 일찍이 광산의 미적 가치를 알아본 초대 백작 카이는 광산을 관망하기 딱 좋은 자리에 관망대를 만들어 놨다.

관망대에서는 광산뿐만 아니라 얼음강 전경이며 주변이 한눈에 들어왔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사람들도 다 보였다.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군.”

산샤는 웃었다. 디아머드 사람들은 정신없이 행복해서 산샤도 행복했다.

“근데 여기는….”

이상하게 풍경이 익숙했다.

어릴 때 자주 놀았던 자리라서가 아니었다.

“죽었던 자리구나.”

지난 생에 모리츠에게 끌려와 섰던 절벽이 여기다.

이곳에서 모리츠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듣고 죽었다.

마지막 숨이 얼어붙는 그 순간까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강에 밀어 넣은 모리츠보다 자기 자신이었다.

눈감고 귀 닫아 아무것도 모른 채 입까지 다물어 구차하게 연명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절망의 장소가 행복의 장소가 될 수 있다니….

모리츠 따위 두려울 게 뭔가.

이토록 가슴 가득히 행복이 충만하다면 모리츠쯤은 한 번에 보내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산샤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얼음강을 향해 외쳤다.

“좋아! 앞으로 어떤 난관이 닥쳐도 다 이겨낼 수 있어. 그냥 쭉 행복하면 되는 거야.”

그때였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산샤.”

아악!

산샤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모리츠, 어떻게 여기에.

모리츠가 강바람에 옷자락과 머리카락과 오러까지 날리며 열 걸음 쯤 뒤에 서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보이던 자애로운 숙부의 미소는 싹 걷어치우고 딱딱하게 굳은 채로 음침하게 산샤를 보았다.

이번 생에도 밀리는 건가?

강물에 빠져야 해?

산샤는 이미 취해 인사불성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아.

“…여기에서 보게 되네요. 모리츠 자작.”

“안 와 볼 수가 없었다. 디아머드 백성이 축제를 즐긴다는데 말이다. 비록 추방당하긴 했었지만, 디아머드 영주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와 봐야 하지 않겠니.”

추방당했다니? 무슨 소리지?

모리츠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무정한 내 아버지는 가문의 모든 기록에서 내 이름을 파버리고 내가 아예 디아머드 일원이 아니라고 했다만, 타고난 혈통이 어딜 가겠니?”

아…! 이제야 알겠다. 모리츠가 직접 여황의 문을 열려고 시도하지 않을 이유를.

가문의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으니, 글라키에스의 인정을 받을 자신이 없었겠지. 그래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구나.

“당신은 후견인 자격조차도 없었군요.”

“이제 와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랬다. 너는 나를 거부할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집안의 어른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거든.”

비릿한 미소를 날리며 모리츠가 빤히 쳐다봤다.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는 것 같았고, 오러에 잠식당한 것 같기도 했다.

모리츠가 한 발 다가섰다.

다시 강에 밀리는 건가?

산샤는 뒤로 팔을 돌려 난간을 붙잡았다.

그래도 이번 생엔 손이 묶이지는 않았으니,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에게 해줄 말이 아주 많단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얼마나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몰라. 그래도 꾹 참아야만 했지. 이제야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

이야기를 들을 동안은 살아 있으라는 거야?

산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생이나 이번 생이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모리츠’랄까.

“나는 당신이 추방당한 걸 왜 모르고 있었죠?”

“네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안 한 것은 말이다. 우리 선량한 로베르트 백작님은 내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며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거든. …언젠가는 나를 받아들일 생각으로 너에게 말을 안 했던 게 아니겠니?”

그래. 아버지라면 그럴 만하다.

“그렇지만 마리에도 말하지 않은 건 뜻밖이었다. 마리에는 나를 아주 싫어했거든.”

“어머니는 현명하셨으니까.”

“냉정하기도 해라. 이런 면은 마리에를 똑 닮았단 말이야. …나는 마리에를 사랑했단다. 순정을 바쳤지.”

산샤는 경악하여 모리츠를 노려봤다.

“감히 내 어머니를 그런 식으로 입에 올리다니!”

“그렇지만 마리에는 나에게 미소 한 번 보여주지 않았어. 오로지 로베르트뿐이었지.”

“당신은 내 아버지의 발치에도 못 미치니까!”

“흥, 마리에의 계산속을 모를 것 같으냐?”

모리츠의 눈이 번들거렸다.

“내가 로베르트보다 못 한 건 가문을 계승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었어. 그 잘난 얼음여황 글라키에스가 로베르트를 선택했다는 것뿐이라고.”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어머니와 아버지는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평생의 반려였어.”

“영혼의 울림? 흥!”

모리츠가 콧방귀를 뀌더니 두 팔을 쫙 펼쳤다.

“봐. 잘 보라고.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결과가 어떤 건지. 둘은 죽었고, 나는 살아서 가문을 가질 수 있게 됐어. 영혼의 울림이라니, 그게 뭔 개소리야.”

“개소리는 누가 하는지 모르겠네. 당신이야말로 개소리를 하고 있잖아. 더러운 입으로 내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마!”

모리츠는 팔을 든 그대로 멈춰서 멍하니 산샤를 돌아봤다.

한참을 보더니 히죽 웃었다.

“이젠 두렵지 않니? 이 오러 말이다. 이것 때문에 나를 무서워했잖아.”

드디어 약을 먹여서 오러를 보게 했다는 것을 고백할 시간인가?

이걸 다 듣고 있지 말고 도망가야 하는데….

뒤는 난간, 앞은 모리츠라서, 섣불리 도망가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붙잡힐 위험이 더 컸다.

옆으로 살짝 돌면 될까 어떨까 각도를 재고 있는데, 모리츠가 말했다.

“너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났다. 내가 얼마나 갖고 싶었던 건데.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지려고 했던 거였는데. 그 귀한 능력을 가졌으면서 귀한지도 모르고 벌벌 떨어.”

어라? 이번엔 대사가 다르네.

오러를 보게 했다는 고백이 아니야.

“디아머드를 마땅히 계승할 자는 적당한 때에 사람의 오러를 볼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된다. 그 능력을 글라키에스의 가호라고 한다.”

산샤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오러를 보는 게, 뭐?

글라키에스의 축복이 뭐?

“너도 배웠을걸.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면서? 글라키에스가 어쩌고저쩌고 카이가 어쩌고저쩌고 귀에 못 박히도록 듣지 않았니? 글라키에스의 가호를 받은 자만이 가문을 계승할 수 있다면서.”

“…내가 배웠다고?”

배운 기억이 …없는데?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오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없어.

다 배우지를 못한 거야, 배웠는데 잊어버린 거야?

모리츠가 말했다.

“기억이 듬성듬성 흐릿할 거다. 내가 약을 좀 먹여왔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