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하필 아드리안에게 그런 말을 하려던 자체가 문제였다.
산샤는 손가락을 뒤로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여기는 괜찮아요. 디아머드 성에서 가장 많은 눈이 여기 있을걸.”
“…그래도 무엇이든 끝까지 의심해야죠.”
아드리안은 산샤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투명하리만큼 하얗던 얼굴이 붉어 보이는 건 착각인가?
나무 그림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잘 아니까 부끄러운 거, 맞지?
산샤는 차마 바로 볼 수는 없어서, 아드리안 너머 먼 곳으로 시선을 보내며 괜히 중얼거렸다.
“쫓아다니면서 잔소리하는 보호자는 별론데….”
“보호는 필요하니까.”
“그게 당신일 필요는 없어요.”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또 괜히 미안해서 산샤는 덧붙였다.
“…의심은 충분히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안심이 되는 거죠. 당신처럼.”
잠깐 아드리안의 시선이 산샤에게 돌아왔다가 얼른 멀어졌다.
“…나는 의심한다는 건지, 안심이라는 건지….”
“둘 다.”
아드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며 산샤는 급하게 덧붙였다.
“…당신은 나를 감시하잖아요. 그건 의심스럽거든. 그런데 필요할 때마다 딱딱 나타나서 도와줘. 도와주려고 감시하나 싶기도 한데….”
“감시?”
“지켜본다고 바꿀까요? …애초에 왜 지켜보고 있었을까? 역시 엄청나게 의심스러워.”
아드리안이 피식 웃었다.
“안심은 어디에서 하는 거야?”
그러게. 어째서 이 사람에겐 안심이 될까?
산샤는 방황하던 시선을 아드리안에게 고정했다.
햇살이 부서지던 머리에 달빛이 내려앉았고, 고개 숙여 달그림자가 진 얼굴은 처연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 쓸쓸해.
산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는 왜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까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산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고, 공기조차 침묵하려는 때에 아드리안이 되물었다.
“…기억해야 하나요?”
“아….”
심장이 따끔했다.
말하는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나 슬퍼 보일까.
무엇 때문에 보고 있는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은가.
산샤는 질끈 눈을 감았다.
분위기 탓이야.
달빛이 좋으니까.
사방에서 야한 소리를 내고 있으니까.
정신 차리자. 이 자리에서 울 수는 없잖아.
산샤는 부러 경쾌하게 말했다.
“당신 얼굴을 봐요. 한번 보면 뼈에 새겨질 얼굴이잖아. 절대 잊어버릴 수 있는 얼굴이 아니야.”
헛, 아드리안이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약 때문인가? 약을 잘못 먹어서일까요?”
“…약?”
“어, 어? 그렇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할 건 없잖아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온갖 약을 다 먹어왔는데….”
그때….
응응, 하아, 아잉, 쪽쪽 소리가 배경음처럼 끼어들었다.
산샤는 아드리안을 피해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들어가는 게 좋겠다.
쪽쪽 응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어쨌든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숨겨진 의도가 있을 거야.”
“어디에?”
“당신이 감시, 아니고, 지켜보는 것에….”
아드리안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네요. 끝까지 의심하기.”
남 이야기하는 줄 아나?
자기를 의심한다는데 좋은 자세라고 하다니….
“나는 수호자예요. 언제든 무엇이든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죠. 당신도 봐야만 했어요.”
“클라이드의 수호자죠. 디아머드의 수호자가 아니라….”
“디아머드의 백작 가문은 클라이드에 큰 영향을 끼치니까….”
“그래도 클라이드는 클라이드, 디아머드는 디아머드.”
“괜한 오지랖이었다?”
“덕분에 여러 번 살았으니 고맙긴 해요. 아…. 그동안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네요.”
산샤는 자세를 바로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오늘의 모든 것은 다 당신 덕이에요.”
아드리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귀가 빨개졌어.
고마운 걸 고맙다고 했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하다니….
산샤는 불쑥 물었다.
“루카는 어째서 당신을 ‘전하’라고 불러요?”
“별명이에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아드리안이 대답했다. 질문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군요, 별명일 수도 있겠네.”
루카의 태도만 보면 누가 뭐래도 아드리안이 죽었다던 클라우스 황태자였지만….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지금의 레이디는 아무리 조심해도 과하지 않으니까.”
“들어가고는 싶어요. 근데 들어가면 누구든 달려와서 대놓고 헛소리를 늘어놓을 거잖아. 듣기에 난감하고 못 들은 척하기는 더 괴로워.”
“그래서 안 들어가요?”
“…왜 다들 안 가고 저러고 있을까요?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은데….”
“마르틴 바이다 때문이죠.”
“황제 특사? 그 사람이 왜?”
“지방 귀족들은 그런 위치의 사람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니까.”
“남의 집에서 자기네 친분을 쌓는다고? 뭐 그런 얌체 같은 짓을 해? …후작은 왜 안 가는데요?”
“그게….”
아드리안이 말끝을 흐리며 난감한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왜 안 가는지. 커튼 뒤에 앉아서 봐야 할 것은 다 봤으니까.
마르틴은 아드리안과 친분을 쌓고 싶어서 안 가는 거다. 얼마나 치대는지 보는 산샤가 싫을 정도였다.
아드리안의 시선, 손길, 미소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마르틴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았다.
“아드리안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아드리안이 멍해져서 입을 다물지도 못 했다.
한참 후에 겨우 한다는 말이,
“무슨 그런 농담을….”
“진담인데….”
“많이 피곤한 것 같군요.”
“누가요?”
아드리안이 산샤를 뚫어지게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을 빨리 보내볼게요. 레이디는 방으로 올라가 있어요.”
“북부에서는 손님이 떠나기 전에 주인이 자리를 뜨는 법이 없는데?”
“레이디가 자리를 지키는 한, 연회는 끝나지 않아요. 규칙을 어기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거라면서요?”
“그건 그렇죠.”
끄덕이던 산샤는 새삼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규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던가?”
아드리안은 대답 없이 산샤를 돌려세우더니 살짝 밀었다.
“딴 데로 새지 말고 바로 방으로 가요.”
그리곤 자신이 먼저 연회장으로 걸어갔다.
산샤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드리안이 말한 대로 방에 들어가 얌전히 쉴 수는 없다.
손님이 연회장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마정석 광산 앞, 얼음절벽에 클라이드에서 함께 왔던 사람들이 잔뜩 있는걸.
산샤는 자신의 방으로 가는 대신에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말을 타는 건 은둔 이후 처음이었지만, 몸은 금방 말 타는 법을 기억해냈다.
쌩쌩 훑고 가는 바람이 좋았고, 금세 속도를 즐기기 시작했다.
* * *
디아머드 성의 연회장.
아드리안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이 연회장에 돌아오자, 마르틴 후작이 달려와 팔을 휘감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백만 년 만에 만난 것처럼. 그리움이 쌓여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마르틴을 따라온 귀족들은 아드리안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보면 따라 보고, 아드리안이 한숨을 쉬면 따라 쉬었다. 아드리안이 웃으면 아무리 재미가 없어도 웃을 터였다.
아드리안에게 가는 마르틴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려 보려고.
마르틴 후작이 아드리안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니까 멋모르는 귀족들은 아드리안만 따라 하면 마르틴의 관심을 끌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마르틴이 관심을 보인다는 건, 아드리안에게는 나쁜 징조였다.
황제의 특사, 제국의 2인자, 호레스 밀란의 오른팔이 보이는 관심은 위험했다.
마르틴에게 다시 잡히니, 거미줄에 묶인 꿀벌이 된 것 같았다.
“우리 과묵하신 수호자께서 할 말이 있으신 얼굴이네에?”
마르틴이 나긋나긋하게 기대왔다.
말할 때마다 몸을 기대오는 버릇도 불쾌한 것 중 하나였다.
“레이디가 안 보이는군요.”
“어?”
마르틴이 연회장을 둘러보더니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안 보이네. …그래서 뭐?”
“주인이 없는 연회에는 취미가 없어서요.”
“레이디만 주인인가? 자작이 있잖아. 자작이….”
마르틴이 고개를 휘휘 돌리다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모리츠 자작도 없네? 어디 간 거야?”
“손님들만 눈치 없이 오래 있었군요. 저는 이만….”
“에이, 가긴 어딜 가려고 그래?”
마르틴이 돌아서는 아드리안을 막아섰다.
“말도 없이 사라진 건 마음껏 즐기라는 뜻이지. 더 놀다 가자, 이럴 기회가 다시 없잖아.”
그때였다.
루카가 연회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루카는 저 멀리에서 아드리안을 보더니 크게 손을 엇갈려 보였다.
산샤가 뭐?
순간 아드리안은 마르틴을 밀쳐버리고 바람같이 달려 나갔다.
* * *
얼음강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클라이드에서 오는 마차에서부터 술을 마셔댔으니 취하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그들은 똑같은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고 있었다.
오, 오, 오!
우린 이제 살았다.
우린 이제 살았어.
오, 오, 오!
이런 듣도 보도 못하던 노래라니.
산샤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웃음소리에 뚝, 노래가 끊겼다.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산샤를 봤다.
마부가 소리쳤다.
“레이디 산샤!”
“와아!”
그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쿵, 쿵, 쿵.
여기저기서 무릎 꿇는 소리에 산샤는 움찔움찔 놀랐다.
저 무릎을 다 어쩌나. 무릎을 못 꿇게 하는 법을 만들든지 해야지, 원.
그러나 지금은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뻤고 흥분했고 취했으니까.
어떻게든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고 싶을 테니까.
몇몇은 무릎을 꿇어 머리를 조아렸고, 몇몇은 산샤의 손을 잡아 키스를 퍼부었으며, 또 몇몇은 차마 가까이 오지도 못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비장하게 외치기도 했다.
“레이디 덕에 살았습니다.”
“이제 나 자신을 노예로 파는 일은 안 할 겁니다. 당장 노예시장부터 부숴 버릴까요?”
“이게 다 레이디 덕입니다.”
산샤는 당황했다.
그들의 칭송이야 무척이나 좋았다.
‘이 소리를 들으려고 아드리안의 반대도 무릅쓰고 여황의 문을 열었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사람들 상태가 정상이 아니네.
눈은 희번덕해져서 돌아가 있고 발음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 취한 거지?
신체적 나이는 스물이지만 정신은 순백의 열세 살에 머물러 있는 산샤로서는 이런 행태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껏 술 마시는 장면이라고는 식전주 한잔 본 것밖에 없었고, 후계자 수업에서 이런 건 안 배운다고.
산샤는 한 발 떨어져서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마부를 불렀다.
“마부! 왜 보고만 있어? 사람들을 진정 좀 시켜 봐.”
“에엑? 마부라니욧!”
순간 마부가 홱 돌아간 입으로 소리쳤다.
“마부라고 하지 마세요. 제 이름 랄프입니다. 랄프! …해보세요. 랄프!”
“…?”
“해보시라니까요. 우리 모두 이름이 있는데 이름을 부르셔야죠. …랄프!”
왜 이러니?
이런 것도 술주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