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드디어 산샤는 여황의 문 앞에 섰다.
앞서가던 악동과 화동이 자리를 잡아 앉고, 성스러운 바위산 여황의 문 앞에는 오직 산샤만 남았다.
갖은 소문을 주워섬기던 축하객들도 입을 다물었고, 성스러운 바위산은 정적에 휩싸였다.
산샤는 투명할 정도로 반짝이는 돌무더기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자, 찰랑찰랑 일렁이던 마음이 바람 잔 날 얼음강 같아졌다.
산샤는 글라키에스를 소환하는 문구를 외쳤다.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여, 그대를 소환한다. 그대의 반려 카이의 후손 로베르트와 마리에의 딸 산샤가 디아머드의 주인 될 자인지 지켜보라.”
글라키에스의 응답은 즉각적이었다.
산샤의 부름이 끝나자마자 돌무더기에서 신성한 기운이 새벽 물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오!”
누군가 감탄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안개가 일렁거리는 모습은 마치 돌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파파팟!
하얀 불꽃이 돌무더기에 올린 산샤의 손에 모여들었고, 손가락 끝으로 들어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빛이 다시 바위 위의 손으로 응집되는 순간에 번쩍, 하얀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루룽!
천지를 가르는 듯한 소리였다.
“마정석 광산이 열리나 봐요.”
누군가가 감격에 겨워 소리 질렀다.
천지 가르는 소리가 멈추고 사위가 고요해지자, 바위산 중심에 있는 돌무더기가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과연 산샤 디아머드!”
“디아머드 주인은 역시 레이디 산샤였군요.”
축하객들은 흥분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 * *
본성에서 간단한 연회가 열렸다.
축하객들은 끊임없이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떠들었다.
떠들어도 떠들어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귀족들이 어찌나 들러붙어 귀찮게 하는지….
그렇다고 연회장을 아주 떠날 수도 없어서 산샤는 커튼 뒤에 숨었다.
커튼 뒤에서는 축하객들이 하는 소리도 잘 들렸으니까, 심심하지도 않았고….
“마정석을 채굴하지 못한 세월이 얼마예요. 생각도 하기 싫네요.”
“우리에겐 잃어버린 세월이죠. 버린 시간.”
“그런데 말이죠.”
누군가가 은밀하게 몸까지 낮추며 속삭였다.
“왜 모리츠 자작은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걸까요?”
“로베르트 백작의 동생이잖아요. 디아머드 백작 혈통이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입 밖으로 내서 말하지 않았지만,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모리츠 자작이 사실은 디아머드 혈통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
산샤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모리츠는 아버지 동생이 맞다. 이런저런 거 다 떠나서 얼굴이 아버지와 똑 닮았으니까.
“어휴, 아무렴 어때요. 이렇게 문을 열었는데요.”
주렁주렁 보석을 달고 있는 영애 하나가 외쳤다.
“이젠 마정석을 펑펑 쓸 수 있는 거죠? 아낄 필요 없죠? 그동안 불편한 게 얼마나 많았는데….”
“앞으로는 쭈욱 번영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렇지요? 암요. 그렇고말고.”
“그게 다 레이디 산샤 덕이지요.”
“우리의 영광입니다. 레이디 산샤는….”
“그런데…, 레이디 산샤가 어딜 가셨나?”
귀족들이 눈을 반짝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산샤는 스륵 커튼 뒤 그림자 속에 깊이 묻혔다.
이렇게 과하게 찬양을 해대서 숨어 있는 거란 말이다.
아드리안에게 물어볼 말이 많았는데, 곁에 가볼 수도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각 지방 대표 귀족들이 죄다 아드리안 곁에 몰려 있단 말이지.
불편한 자리에선 되도록 말을 아끼고 우아하게 미소만 짓는 거라고 했던가.
아드리안이 그걸 능수능란하게 해내고 있었다.
오히려 지방 귀족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수상해.”
“뭐가요?”
“헉! …아니타!”
아니타가 자신에게 바짝 붙어서, 자신이 보는 것을 같이 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깜짝 놀랐잖아.”
“부르는 소리 못 들으셨어요?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숨바꼭질이나 하고 계시고….”
불렀다고?
전혀 못 들었는데….
아드리안을 너무 열심히 보고 있었나?
“손님들 사이에 있어야지, 이렇게 혼자 나와 있으시면 어째요?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게요.”
“왜 찾았는데?”
“라베나가 옷 갈아입으러 들어오시래요.”
“또? 무슨 옷을 또 갈아입어?”
“이런 중요한 날엔 시간별로 옷이 달라야 한다는데요? 오늘 가져온 거, 다 한 번씩 입을 거래요.”
“하아….”
산샤는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너무 과하다.
“연회라는 게 원래 이런 거니?”
“제가 뭘 아나요? 클라이드 최고 부티크 디자이너라고 아가씨가 데려오셨잖아요. 저는 모르는 일이지요.”
“반항하는 거야?”
와락 인상을 구긴 아니타는 표정으로 억울하다고 항의했다. 그렇지만 말은 고분고분하게.
“그럴 리가 있나요? 정말로 모르니까 모른다는 거죠. 어쨌든 클라이드 최고라니까요. 라베나가 어찌나 막무가내인지 무섭다고요.”
산샤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너도 무서운 게 있구나?”
“당연하죠. 세상에 무서운 것들뿐인데요.”
“세상이 너를 무서워할 것 같은데….”
아니타가 아닌 척, 흘겨보더니 물었다.
“…근데. 뭘 그렇게, 넋 놓고 있었던 거예요? …저 사람?”
아니타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황제가 보낸 마르틴 바이다 후작과 아드리안이 있었다.
아드리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는 마르틴의 입술이 귀에 걸렸다.
아주 좋아 죽는다.
아드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안기도 했는데, 아드리안이 귀찮은 듯 털어냈고….
그게 또 좋다고 마르틴은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너, 저 사람 좀 알아?”
“아니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오늘 처음 왔잖아요.”
“그렇지? 너도 처음이지? 처음 보는 사람이지?”
“…근데 사람이 좀 이상하죠? 아무 데서나 막 웃고, 자꾸 수호자 옆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수상하고….”
산샤는 아니타를 돌아봤다.
“모른다는 게 황제 특사야? 마르틴 바이다 후작?”
아니타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그럼 클라이드의 수호자 아드리안 경을 모를까 봐요?”
“안다고?”
“왜 몰라요? 아드리안 경인데!”
이렇게나 당당하게?
산샤가 아는 한 아니타는 일 년에 두 번 집에 다니러 갔다 온 거 말고는 항상 산샤 옆에 붙어 있었다.
저택 밖에 나갈 일이 없던 아니타도 아는 사람이라니.
“그렇게 자신 있게 아는 사이란 말이야?”
“어어?”
아니타가 산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가씨 왜 이러신대? 아가씨도 아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아드리안 경이라니까요. 클라이드의 아드리안. 당연히 아셔야죠.”
이리저리 따져보면 디아머드의 계승자로서 클라이드의 수호자는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람인 것 같기는 했다.
그렇지만 산샤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기억에 없어.”
“왜 모를까? 모를 수가 없는데….”
아니타가 중얼중얼 갸웃거리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아가씨가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뭐 모를 수도 있겠네요.”
“뭐야?”
산샤가 발끈 화를 내는데, 아니타는 시치미를 뚝 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라베나 그 여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다고요. 얼른 가요. 얼른.”
* * *
세 번째인데도 처음처럼 요란법석을 떨며 드레스를 갈아입었지만, 산샤는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봐야 커튼 뒤에 숨어 있을 거, 굳이 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었다. 주인 노릇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정원으로 나갔다.
먼발치에서 모습을 보게 하고 말을 걸지는 못 하게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는 작전이었는데, 정원에는 다른 난관이 있었다.
정원에 나와 있는 손님들은 산샤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신 끼리끼리 부둥켜안고 있었다.
얌전히 안고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쪽쪽’ 빨아대는 축축한 소리와 ‘으응, 하아’ 등등 각종 신음을 구사하고 있었다.
예의상 그들을 피해 주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하아….”
이쪽에선 힘들어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군요, 레이디.”
헉!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산샤는 상대를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안도하는 것을 보고 아드리안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렇게까지 안도할 일이….”
“아니, 무슨 일은 없고, …당신이어서 안심이 된 거예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나 태어날 때 오색구름이 떴다는 말, 들었죠?”
“…세상에 없는 향이 풍겨 나왔다고도 하더군요.”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하는지…. 자기네들끼리만 하면 또 몰라.
나한테 달려와서는 레이디가 태어났을 때 글라키에스가 기뻐하여 ‘내 아이로다’ 했다면서요? 이러면 웃어야 하는 거야, 울어야 하는 거야.”
“웃으라는 거겠죠.”
“마도구를 마음대로 쓸 수 없어서 조금 불편했던 것뿐이면서, 세상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도 싫고….”
“조금의 불편도 견디기 힘든 게, 귀족들이니까.”
산샤는 괜히 아드리안을 흘겨봤다.
“내 편이에요, 귀족들 편이에요? 이상하게 징징이들을 변명해주고 있는 것 같잖아.”
피식, 아드리안이 웃었다.
“그래 보이면 그런 모양이죠.”
이렇게 간단히 영혼이 손톱만큼도 섞이지 않은 태도로 인정해 버린다고?
산샤는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깜빡깜빡하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다시 볼 거라더니,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무심하게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레이디가 모르는 게 많죠.”
또 저 소리.
아델라이드에서 치료할 때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
모르는 게 그렇게 많으면 알려주던가.
“내가 뭘 그렇게 모르는데요?”
“당장 여기 나와 있는 것도 뭘 알아서 하는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산샤는 새삼스럽게 정원을 돌아봤다.
“내 집 내 정원에 나와 있는 것도 뭘 알아야 할 일인가요? 이렇게 환하게 불을 밝혀놨는데?”
“아무리 불을 밝혔어도 어둡고 숨어 있을 곳도 많아서 어디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잖아요.”
“어?”
“게다가 레이디는 가진 패를 다 써버렸으니, 언제 무슨 일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고.”
“그런 건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 들어가죠.”
“이미 정원은 만석이에요. 나 죽이겠다고 숨어 있을 자리가 없어요.”
“만석?”
“저기….”
손가락을 들어 나무를 가리키던 산샤는 말꼬리를 흐렸다.
나무 그림자에 숨어 부둥켜안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거칠 것 없는 산샤 디아머드’가 막혀 버렸다.
부끄러워서 말을 할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