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이제나저제나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던 어느 날.
황제는 북부 지역을 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황태자와 함께 가겠다고.
루카는 드디어 황제가 황태자를 죽일 결심을 했나 보다 생각했다.
황태자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두가 여행 준비로 바쁠 때 홀로 고요했다.
원래도 무표정한 사람이었지만, 표정은 물론 움직임도 거의 없어서 석상이 되어 버렸나 싶을 정도였다.
해가 져 어두운 방 안에서 불도 켜지 않고 꼼짝없이 앉아 있던 적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읽는 줄 알았던 황태자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루카, 너는 순행에 따라오지 않는 게 좋겠다.]
루카는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황태자가 무려 자신의 이름을 알아!
근데 왜 첫 말이 ‘따라오지 말라’야?
[따라오지 말라니요? 왜요? 저만한 시종이 없을 텐데요.]
버럭 항의하는 루카에게 황태자는 나직하게 경고했다.
[큰소리 내지 마라. …감시하는 눈이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감시하는 것도 알고 있었어?
아는 거 하나 없는 것 같더니, 완전히 속이고 있었던 거야?
황태자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스치는 바람에도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너와 나를 지켜보는 눈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해야지.]
루카는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속삭였다.
[왜 순행에서 빠지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황태자가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너는 살았으면 좋겠어서….]
[예?]
[나를 감시한 자 중에 나에게 호의를 베푼 건 너밖에 없었다.]
[예?]
[네가 나를 위해 해준 것들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지만, 항상, 많이, 고마웠어.]
[예에?]
감시의 눈 때문에 혼잣말처럼 하는 건 알겠지만, 루카는 자꾸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근데 그거랑 순행에 따라가지 말라는 게 무슨 상관….]
그때 갑자기!
황태자가 외쳤다.
[무례하구나. 당장 이 자를 지하 감옥에 가둬 빛을 볼 수 없게 하여라.]
한 달 뒤.
감옥에서 나왔더니 세상이 뒤집혀 있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승하했다.
황비의 소생이었던 황자 조나스 악셀이 황제가 되었고, 제국은 호레스 밀란 대공의 것이 되었다.
황제 일행은 사고를 당하여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했다.
예정대로 따라갔다면, 자신도 벌써 땅에 묻혔으리라.
황태자가 자신을 살린 거였다.
루카는 황태자도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살아 있어야만 했다.
자신을 살려 준 사람이니까.
결국 루카는 황태자를 찾아냈다. 어쩌면 황태자가 자신을 찾아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만난 날, 루카는 간 떨어질 뻔했다.
‘아드리안’이라는 이름을 쓰는 그가 자신을 덥석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지 뭔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며, 그야말로 뜨거운 눈물을 펑펑….
디아머드 성에서 아드리안은 평범한 아이 같았다. 행복해 보였다는 뜻이다.
그게 산샤 덕분인 것은 눈감고도 알 수 있었다.
우리 전하는 앞으로 쭉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시면 되겠구나!
그렇게 안도했었다.
빈 관이나마 장례를 지르고 죽은 사람 취급받는 게 우리 전하에게는 최고 행운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로베르트 백작 부부가 여행 중에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고, 돌아가신 바로 그날에 후견인이라며 모리츠 자작이 나타났다.
로베르트와 같이 여행 중이던 아드리안과 루카는 디아머드 성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루카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북부를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산샤만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겨우 열세 살이라고. 자신이 보호해 줘야만 한다고.
그래봐야 자기는 열다섯 살이면서.
아드리안은 산샤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며 클라이드의 수호자가 되었다.
수호자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피눈물 나는 사연이 하나 가득 있었지만, 어쨌든 아드리안은 해냈다.
그리고 버티고 기다려왔다. 산샤가 밖으로 나오기만을.
아드리안의 시간은 오로지 산샤를 위한 것이었다.
* * *
글라키에스 신전은 신전이라고는 하지만 신전이 아니었다.
디아머드 성 깊숙한 곳에 있는 하얗고 넓은 바위산이었다.
[하얗고 넓은 바위산 한가운데 투명할 정도로 반짝이는 돌무더기가 있었다.
바위 주변에 높다란 벽을 쌓아 사람의 접근을 막았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성스러운 바위산이라고 불렀다.]
디아머드 초대 백작 카이가 쓴 ‘글라키에스 신전 건설 역사’에 적힌 말이다.
신관도 따로 두지 않았다.
여황의 문을 여닫는 디아머드 백작 가의 계승자가 신관이라면 신관이랄까.
글라키에스는 존재하지만 숭배받지 않는 존재라고 했다.
[디아머드 사람들은 세세토록 영화로울지라. 제대로 된 계승자만 있다면….]
이것이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의 뜻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계승자, 산샤의 계승식을 맞이하여 성스러운 바위산의 벽이 활짝 열렸다.
계승식에 초대된 손님들은 바위산에서 산샤 디아머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은 각 지방을 대표하는 귀족들, 클라이드의 수호자 아드리안, 그리고 황제 특별 사절인 마르틴 바이다 후작이었다.
마르틴 바이다 후작이라니!
명실공히 제국의 2인자, 섭정 대공 호레스 밀란이 신임하는 최측근이 아닌가.
지방 귀족들을 하나 같이 마르틴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어보려고 얼쩡거렸다.
행여나 지방 귀족이라고 우습게 보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그러나 마르틴은 그들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
그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드리안만 보고 있었다.
황제의 특별 사절 마르틴 바이다 후작은 클라이드의 수호자인 아드리안에게 뭉클뭉클 솟아나는 관심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클라이드의 수호자라니 이름은 그럴듯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아드리안이 후작에게 먼저 무릎을 구부리고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인사만 안 한 게 아니라 시선 한 번을 안 줬다.
그래서 마르틴은 더욱더 애가 타서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어떻게든 아드리안의 시선을 잡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마르틴 바이다 후작이 전하에게 관심이 많은데요?”
루카가 바짝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렇지만 아드리안은 마르틴 쪽으로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관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것 같은데?”
“당연한… 뭐요? 전하가 너무 아름다워서요?”
“루카!”
나직하게 부르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 루카는 계면쩍게 웃었다.
“전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드리안이 남 이야기하듯 무심하게 대꾸하자 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호레스 밀란이 바이다를 특사로 보낸 건 레이디 산샤를 황후로 책봉하기 위한 사전 조치랍니다.”
아드리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제국 최고의 마정석 광산을 가진 백작 가문이니…. 밀란이 탐낼 만도 하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상관없이요.”
루카는 잠깐 말을 멈추고 아드리안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드리안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밀란이 잘못 생각했군.”
“예?”
“바이다가 왜 굳이 황제에게 넘기겠어? 그라고 마정석 광산이 탐나지 않을까.”
“그런가요?”
“축하객 중에 미혼의 남자가 많은 것도 다 이유가 있을 텐데….”
루카는 새삼스럽게 바위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축하객들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전하는 괜찮으세요?”
아드리안이 갸웃하며 루카를 바라봤다.
“뭐가?”
“이놈 저놈 레이디를 탐내는 게 전하 마음에 괜찮으시냐고요.”
“괜찮지 않을 리가 없잖아. 탐내는 가문이 많을수록 산샤의 위치가 공고해지는데…. 오히려 좋지.”
“예?”
“후보가 많으면 고르기도 쉬울 테니까, 가장 합당한 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루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흘겨보기까지 했다.
“이러다 영영 뺏긴다니까요?”
“내 것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뺏겨?”
“…아니,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루카가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는데, 아드리안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만 가 봐, 루카. 경비병에게 잡혀 끌려가기 전에.”
말 대로, 언제 왔는지 경비병이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계승자가 입장할 때는 시종들은 다 나가고 초대받은 축하객만 남으라고 하더니….
산샤가 입장할 시간이 되었나 보다.
빰빠라빰!
나팔 소리가 성스러운 바위산에 울려 퍼졌다.
디아머드 계승자 산샤 디아머드가 곧 입장한다는 신호였다.
삼삼오오 모여서 마르틴 바이다 후작의 눈에 들 작전을 모색하던 축하객들은 각자 정해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두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자, 벽을 따라 도열 해 있던 디아머드 기사단이 착착 ‘받들어 검’을 하여 디아머드 백작가의 정통 계승자에게 예를 표했다.
드디어 본성으로 통하는 벽이 열리고 성스러운 바위산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화동이 꽃을 뿌려 꽃길을 만드는데….
마침내.
산샤가 들어섰다.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머리가 나부끼고 광택이 나는 에메랄드빛 드레스는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런데 무엇을 입었는지, 머리 모양을 어떻게 했는지는 금세 잊어버릴 정도로 산샤의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드레스나 장식품보다는 산샤에게 집중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클라이드에서 최고로 세련된 디자이너 라베나의 솜씨였다.
산샤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축하객 한 명 한 명과 눈인사를 나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아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지 그녀가 곧 여황 글라키에스인 것 같았다.
축하객들은 술렁거렸다.
백치가 되었다고 듣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헛소문에 속고 있었나?
축하객 하나가 옆에 앉은 아드리안에게 속삭였다.
“혹시…, 레이디 산샤가 태어나던 날 하늘에 보랏빛 구름이 가득했었다는 소문, 들었어요?”
반대쪽에 앉은 축하객은 더한 소리를 했다.
“하늘의 천사들이 노래를 부르고 산실에서는 황홀한 향기가 풍겼다고 했죠.”
“맞아요, 맞아. 그래서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의 현신이라고 한 거잖아요.”
내내 무심하던 아드리안은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 산샤를 바라봤다.
산샤에게 이 소리가 들릴 텐데….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게, 화가 난 건가? 아니면 웃는 거?
산샤는 꾹 참고 있었다.
성스러운 행진을 하는 도중에 웃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지난 생의 계승식 때도 축하객들이 말도 안 되는 탄생 설화를 읊어댔었다.
그때는 너무 긴장해서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몰랐었지.
그런데 저런 말이었다니.
모든 게 지난 생에 했던 계승식과 똑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모리츠.
지난 생에는 여유만만하게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더니, 이번에는 웃을 여유가 없는 모양이다.
머리에 붕대를 돌돌 감고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고 있는 게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지난 계승식에서 그를 봤던 기억이 없다.
봤으면 잊을 리 없고, 있으면 못 봤을 리도 없다.
지난 생엔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번 생에만 참여했을 리도 없고.
그런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