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게 아드리안이 준비해 놓은 드레스였어?”
라베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입술 끝만 살짝 올렸다.
여유만만하게 미소 짓는 얼굴을 만들고 싶은 모양인데, 입술 끝이 바르르 떨리는 거 보니 여유는 이미 물 건너갔다.
산샤는 팔짱을 끼고 턱도 치켜들었다.
최대한 도도하게 보이도록 자세를 잡고 물었다.
“아드리안이 어째서 내 계승을 챙기는 거야?”
“그게, 그러니까….”
라베나가 우물쭈물하는데 아니타와 함께 갔던 조수가 방으로 돌아왔다.
“라베나 님….”
“어머엉, 목욕물 준비가 다 됐구나!”
조수가 말을 하기도 전에 라베나는 호들갑스럽게 나서더니 산샤의 등을 밀었다.
“레이디, 어서요. 시간이 없어서 목욕을 길게는 못 하고, 짧고 간단하게 하셔야겠네. 어서, 어서요.”
그러나 산샤는 버텼다.
여기에서 밀리면 수호자 집단이 뭣 때문에 이러는지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안 올지도 몰라.
“밀지 마. 아직 대답을 못 들어.”
“아, 진짜. 무슨 대답이요?”
“그렇게 모르쇠 하겠단 거지?”
산샤는 다리에 힘을 주고 턱을 더 높이 쳐들었다. 최고로 고집스러워 보이면 좋으련만.
“대답 안 해주면 여기서 꼼짝도 안 할 거야. 나는 드레스 귀한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아무거나 걸쳐 입으면 그만이라고!”
“에휴….”
라베나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고집스러운 레이디네요.”
“그러니까 대답을 하라고. 너희 수호자 집단이 왜 내 계승식에 총동원되었는지….”
“집단은 없다니까 그러시네요. 관심이 왜 있겠어요? 모리츠 자작이 하는 게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레이디가 빨리 계승해서 제대로 영지를 경영해줬으면 하는 마음인 거죠. 그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어…?”
이건 아드리안이 했던 말과 똑같잖아.
반박하기 곤란한 말이기도 하고.
산샤는 버틸 힘이 피시식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수호자랑 미리 입 맞췄어?”
“레이디도 차암, 맞추긴 뭘 맞추겠어요. 다들 같은 마음이니까 그렇죠. …자, 자! 대답 들었으니까 목욕하러 갑시다.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라베나에게 마구 밀려가면서 산샤는 개운치 않았다.
이상해.
수상해.
뭔가 있어, 아드리안.
* * *
“그렇죠? 엄청나게 수상하죠?”
아드리안이 눈썹을 치뜨는 걸 보며 루카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츠 상처가 심했다고 하지 않았어?”
“심했죠. 머리가 깨져서 피가 떡이 됐거든요. 상처부터 치료하자고 해도, 안 된다고, 다른 사람은 시킬 수 없다고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고 했다네요.”
“그리고는 전보를 보내?”
“예. 수신은 제도에 있는 블루밍 거리 닐스 미켈 남작. 내용은 간단합니다. ‘빠른 내방 바람.’”
“닐스 미켈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 들어가서 내일 오전에 보고 가능합니다. 이제 슬슬 전하도 준비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요.”
“그래야지.”
아드리안이 겉옷을 걸치며 물었다.
“산샤가 클라이드 사람들은 다 몰고 갔다지?”
“예. 클라이드 거리가 텅텅 비었어요. 알고 하신 건지, 어쩌다 보니 그런 건지. …모리츠가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했을 거야. 산샤는 현명하니까….”
루카는 아드리안을 보며 슬쩍 눈을 흘겼다.
“그렇게 뿌듯해하실 것 까지는…. 현명하신 것치고는 앞뒤 안 가리고 저돌적이시던데….”
“저돌적인 게 또 큰 장점이기도 하지.”
“전하가 누구를 이렇게 저돌적으로 칭찬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칭찬할 만하니까 하는 건데, 왜?”
“점점….”
루카는 뒷말은 흐렸다. 눈꼴신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기도 하니까.
게다가 자신이 사고 친 것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전하?”
아드리안이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전하.”
한참 뜸을 들이다가 아드리안을 부르고 루카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으음…. 옷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평소 입는 거랑 다르게 격식에 맞춰 입으셔야 하니까….”
“계승식에 참석해야 하니까….”
“그렇지요. 클라이드의 수호자로서 참석하셔야죠.”
그러고는 루카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루카?”
“예?”
“옷이 얼마나 불편한지 물어보고 싶었던 게 아니잖아. 이젠 나가야 하는데…. 어쩔래? 계속 그러고 있을래, 하고 싶은 말을 할래?”
루카는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고, 아드리안은 그대로 돌아섰다.
“다녀와서 이야기하자.”
“잠깐만요, 전하!”
루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레이디를 만나기 전에 들으셔야 할 말이에요. 가서 만나면 레이디가 왜 ‘전하’냐고 물어볼지도 몰라요.”
“왜?”
“아니, 제가 레이디 앞에서 딱 ‘전하’까지는 아니고, 전ㅎ…라고 했는데…. 레이디가 그게 뭐냐고, 수호자를 전하라고 부르는 거냐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실수할 것 같더라니….”
“그렇지만 전하를 전하라고 부르지 못하면 뭐라고 부릅니까? 다른 데에서는 실수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레이디 앞에 서면 실수를 하게 되는 게 문제인 거죠.”
“루카!”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에 루카는 움츠러들었다.
아드리안이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루카를 보고 있었다.
루카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화나셨어요?”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해. 두 번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믿겠다.”
“예! 당연하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루카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아드리안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 이렇게 간단히요?”
루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니, 막 가시면 어떻게 해요? 대책을 세워야지요.”
“대책이랄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산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예?”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벌써 잊어버렸을지도 몰라.”
“그게 어떻게 안 중요해요? 무지하게 중요한 문제인데…. 다들 전하가 전하인 거 알면 기절할 텐데요.”
“산샤는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니까. 특별하잖아….”
아드리안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리라. 아드리안 만큼 산샤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루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괜찮은 건가?
걱정거리도 아닌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전하, 전하라는 호칭에서 레이디가 뭔가 기억해내지 않을까요? 그럼 더 좋은 건데…. 그렇죠?”
아드리안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가 버렸고, 루카는 외쳤다.
“같이 가요, 전하, 아니, 아드리안 경!”
* * *
클라우스 아드리안 라인하르드.
아드리안은 라인하르드 제국의 황태자였다.
라인하르드 제국은 ‘바람을 다스리는 자’들이 정복하여 이룬 나라였다.
바람의 힘으로 주변 왕국을 죄다 휩쓸어 버리니, 제국에 무릎 꿇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제국에 마력이 사라지면서 ‘바람을 다스리는 자’들도 사라졌다.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던 황제가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어지자, 반역하는 무리가 생겨났고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제국의 백성들은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다시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했다.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반역을 평정하고 혼란을 잠재우기를….
그때 클라우스 아드리안 황태자가 태어났다.
황태자가 태어난 순간 산실에 돌풍이 불어닥쳤다던가.
황태자는 요람에서부터 바람의 정령과 교감을 보였고, 제국은 열광했다.
드디어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나타났다고 기뻐하며, 그가 각성하기만으로 또 학수고대했다.
루카는 그런 황태자의 놀이 친구가 될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원래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이쪽 세계 인물로 빙의한 탓에 이세계다운 마법의 힘이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황태자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름은 당연히 모를 테고, 얼굴은 알려나?
놀이 친구라고는 했지만, 루카가 맡은 진짜 임무는 황태자와 노는 게 아니라 황태자의 하루를 그대로 황제에게 보고하는 거였다.
황제는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알고 싶어 했다.
그런데 보고할 거리가 별로 없었다.
황태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표정도 없는 아이였다.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었다.
감정이라는 게 아예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전하가 한동안 장미를 바라보더니 살짝 미소 짓더라’라고 보고한 다음 날, 장미가 싹 다 베어진 것을.
황태자가 뭘 좋아하더라고 보고한 것은 다음 날부터 보이지 않았고, 뭘 싫어하더라고 보고한 것은 더 자주 보였다.
황제는 황태자를 괴롭히려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황태자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어머니 황후는 황태자를 낳고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다는데, 한 달에 한 번 겨우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아들을 잡고 볼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너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한다’라고 원망하면서.
그뿐이랴.
황후 가문에서는 날마다 찾아와서 황후가 죽기 전에 권력 기반을 탄탄하게 하라고 압박했다.
그럼 황비 가문에서는 가만히 손 놓고 있었을까.
황태자를 폐위하고 조나스 악셀 황자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각종 모략을 일삼았다.
온통 세상이 황태자를 잡아먹으려고 아웅대고 있었다.
황태자는 괴롭힘 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 독약이 들어 있을까 봐.
황태자가 그런 상황을 견디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무심한 척하는 거였다.
황태자의 표정이 무심하면 무심할수록 그의 마음은 지옥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루카는 알게 되었다.
루카는 황태자가 안쓰러웠다.
무표정한 황태자가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그래서 루카는 황제에게 거짓말하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한 것을 안 했다고 하고, 안 한 것을 했다고 했다.
거의 변화 없는 황태자의 표정을 잘 관찰했다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고, 좋아하는 것은 싫어한다고도 했다.
황태자가 숨은 쉬면서 살기를 바랐고, 자기라도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고 싶었으니까.
그러다 황후가 승하했다.
병석에나마 황후가 있을 때와 아예 없어진 다음의 황태자는 운신의 폭이 천양지차로 달랐다.
조나스 황자의 외숙부인 호레스 밀란을 주축으로 하는 황비 가문은 황태자 자리를 내놓으라고 압박해 왔다.
요람에서 바람의 정령과 교감했을 뿐, ‘바람을 다스리는 자’로 각성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폐위되어도 상관없지 않겠냐고도 했다.
그런데 황제는 다른 건 다 내놓으면서도 황태자 자리만은 내놓지 않았다.
백성들은 황제가 황태자를 너무나 사랑하나 보다 하고 감동했지만….
그럴 리가 있나.
황제는 황태자의 숨통을 아예 끊어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