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모리츠가 부르르 떨면서 칭얼거렸다.
“당장 어디로 가란 말이냐? 나는 갈 데가 없어.”
풉, 산샤는 터진 웃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무서웠던 모리츠였는데….
이렇게 유치하게 우는소리를 하다니….
“성 밖에서 지내려면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지낼 처소가 없단 말이다.”
“처소가 없긴 왜 없어요?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 목록이 화려하던데….”
“뭐…?”
“클라이드에만 타운 하우스 두 채, 애플힙에는 코티지가 있고, 헬가본에는 장원 딸린 대저택이 있잖아요.”
모리츠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동안 산샤 쯤은 손가락만 튕겨도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해 왔는데….
바보 천치라고 무시하는 마음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랜 시간 소통을 거부하며 은둔생활을 하던 아이가 자신의 부동산 목록을 술술 읊어대니까 어마어마하게 당황스러웠다.
은둔이 은둔이 아니었던가.
“아!”
산샤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제도에도 타운 하우스가 한 채 있었죠, 참.”
“어떻게…. 그것까지….”
“가주니까요. 가문의 재산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알고 있어야죠.”
“가문의 재산이라니…. 내 집인데….”
산샤는 코웃음을 쳤다.
“설마 숙부님 돈으로 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도대체 너는…. 언제 이렇게 된 거냐? 어쩌다 이렇게 똑똑해졌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고…. 그랬던 애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어렸을 때는 무서웠던 게…. 지금은 안 무서워졌거든요.”
“뭐가 어째?”
“당신이 하나도 안 무섭다고요.”
빠드득, 모리츠가 이를 갈았다.
동시에 모리츠의 오러가 화악 솟구쳤다.
“왜지? 왜 안 무서워하게 됐어?”
방 안을 가득 채운 오러가 터질 것 같았다.
회귀 전의 산샤라면 무서워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는….
산샤는 빙긋이 웃으며 평온하게 대답했다.
“철들었나 봐요.”
모리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그것이 이토록 기쁘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자, …이제 나가보세요. 자작은 이삿짐부터 싸야죠. 계승식 끝나고 하려면 급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간단히 쫓아낸단 말이냐?”
“당연하죠. 더 간단할 수도 있는데, 계승식은 보게 해드리는 게 좋겠어서….”
“그렇지만….”
산샤는 손을 내저어 모리츠의 말을 막았다.
“더 할 말도 없고, 더 들을 말도 없네요.”
“아니 그래도….”
“시간도 없어요. 드레스가 이 모양이라 늦지 않게 준비하려면 시간이 빠듯하거든요.”
“그래도 말이다.”
산샤는 모리츠는 무시하고 아니타를 불렀다.
“아니타, 자작님 가신다. 문 열어드려.”
“예?”
아니타가 깜짝 놀라면서도 산샤의 손짓에 따라 문을 열었다.
행여나 모리츠가 나가는 데 방해가 될까 봐서 문에 바짝 붙어 몸을 숙이기도 했다.
모리츠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이걸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
산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련하시겠어요. 갈 길이 멀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답니다.”
“이… 이….”
할 말은 많았지만 나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모리츠는 옷자락을 날리며 방에서 나가 버렸다.
아니타는 모리츠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괜찮으시겠어요?”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요. 자작님한테 저래도 되겠냐고요. 후견인으로 지낸 세월이 얼마예요. 성에 자작님 편이 없을 것 같아요?”
“흐응….”
“자작님만 쫓아낸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요.”
“별걸 다 아는구나.”
“당연히 알죠. 그동안 아가씨를 보필한 게 누굽니까?”
“보필이라고?”
보필이라는 말을 써야 할 정도로 아니타가 자신의 편에 서서 자신을 도왔던가?
언제나 아니타가 모리츠의 사주를 받아 자신을 무시하고 구박해 왔잖아.
아니타는 절대 자신을 보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구구절절 따지고 싶지 않았다.
문제를 따져 묻는 건 계속 같이 지낼 사람과 하는 거지.
아니타도 내보낼 사람이니까.
“라베나가 도착했겠다. 가서 데려와.”
아니타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푹 고개를 숙이며 고분고분하게 돌아서는데, 또,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앞에 그렇게 떡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휘청, 아니타가 밀리며 크게 흔들렸다.
아니타를 밀어버리고 들어선 건 라베나였다.
라베나는 들어서자마자 새된 비명부터 질렀다.
“어머, 레이디! 아직도 이 꼴이시면 어떻게 해요? 준비하고 계시라고 했잖아요. 자기들, 어서어서…. 한시가 급하다. 서둘러.”
라베나의 독촉을 받으며 크고 작은 상자를 든 조수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라베나!”
산샤는 깜짝 놀라며 일어서는데, 아니타가 꽥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너, 여기가 어디라고 막 함부로 들어와?”
“어머?”
라베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계승식에 입을 드레스를 가져왔다고 했더니, 바로 안내해주던걸요.”
“누가?”
“누군지 알 게 뭐예요. 이 댁 고용인 중 한 명이겠죠.”
“어떤 미친놈이 낯선 여자를 아가씨 방으로 안내한단 말이야?”
아니타가 꽥꽥거리자 라베나는 유들유들하게 대답했다.
“레이디가 시급하게 단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미친놈이겠죠?”
“뭐야?”
아니타가 목이 갈라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지만, 라베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랫사람 부리듯 명령했다.
“목소리 큰 그쪽은 당장 목욕물을 받아줘요.”
“뭐? 이 재수 없는 여편네가….”
아니타가 팔을 걷어붙이고 당장이라도 라베나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려다가,
“아니타!”
산샤의 부름에 그대로 정지했다.
아니타는 그대로 돌아보며 울먹였다.
“거래하던 부티크에 연락하자니까요. 뭐 이런 막무가내인 여자 옷을 입으시게요?”
산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타 만큼 세상만사 무서운 거 없이 무례하고 방자하고 막무가내인 사람이 있었을까.
그런 아니타를 울리는 라베나라니….
아니타의 분한 마음은 알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문제.
싸우게 둘 수가 없었다.
“아니타, 목욕물부터 받아.”
아니타가 크게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요.”
아니타가 순순히 물러서자, 라베나는 자신의 조수 한 명에게 명령했다.
“자기는 따라가서 준비해 온 장미 꽃잎을 띄워보렴. 자극적이고 강한 향보다는 은은하게 향이 나는 듯 안 나는 듯, 그래야 하는 법이거든.”
“예, 라베나 님.”
조수가 다소곳하게 대답하고 상자 하나를 챙겨 들고 아니타에게 말했다.
“가시죠. 목소리 크신 분.”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아니타가 횅하니 나가자, 상자를 든 조수는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나머지 조수들은 가지고 온 상자에서 속옷부터 드레스, 장신구까지 꺼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르륵 걸어놓고 다림질까지 하는 것을 보며 산샤는 물었다.
“이게 다 뭐야?”
“뭐긴요. 다 아가씨가 입으실 거죠.”
“드레스 하나 가져오는 게 아니었어?”
“에이….”
라베나가 산샤를 흘겨봤다.
“어떻게 드레스 하나만 입어요. 패션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가요? 사람과 의상과 장신구와 기타 등등, 아름다운 표정까지 합쳐져야 완성되는 건데요.”
“그렇지만 갑자기 이게…. 다 어디서 난 거야? 내 치수에 맞게 다 있었단 말이야?”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죠.”
“준비하고 기다려?”
“당연하죠. 계승식이 다가오는데요.”
“준비하고 기다렸다고?”
재차 묻자 라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뭐가 잘못됐어요?”
“라베나, 너도 클라이드 수호자 집단이야?”
“어머? 집단은 또 뭐예요? 수호자의 보호를 받는 거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당연하죠. 클라이드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수호자에게 보호를 받아요.”
“아드리안에게 속해 있다고? 아드리안이 시켜서 이러는 거야?”
“아…드리안…이라….”
라베나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홱 돌아서서 분주한 척 드레스를 만지기 시작했다.
“라베나?”
“예, 레이디! 말씀하세요. 듣고 있어요. 정말 시간이 이렇게 빠듯할지 몰랐네요. 아휴, 바쁘다. 바빠.”
조금 전보다 세 배는 분주한 척하는 라베나는 몹시도 수상했다.
“라베나, 궁금한 게 있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뭐든 대답해드려야죠.”
루카와 했던 대화와 똑같다.
궁금한 건 뭐든 대답해 주겠다더니, 정작 물어보니까 모르는 척했었지.
“너희 수호자 집단은 내 계승식을 준비하고 있었지?”
멈칫, 라베나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더니,
“와하하하!”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아드리안, 루카에 이어 라베나.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데, 이번에야말로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 거야!
기필코 확실한 답을 듣고야 말 거라고.
산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라베나를 훑어봤다.
“그렇게 웃다가 어영부영 넘어갈 건 아니지?”
“어머, 레이디도 참! 넘어가긴 뭘 넘어갑니까? 일단 벗어야죠?”
라베나는 손가락 하나로 조수를 불렀다.
“자기야, 레이디 옷을 좀 벗겨 드리렴. 그쪽 팔은 조심조심…. 아예 그냥 쫘악 찢어버려. 상처에 스치지도 않게. 레이디 살짝 돌아보세요.”
마음으로야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때까지는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산샤는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면서 다시 물었다.
“아드리안이 너에게 시킨 일이야? 응?”
라베나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두 번째 조수를 불렀다.
두 번째 조수가 지시에 따라 드레스를 산샤 앞에 대 보였고, 세 번째 손가락에 움직인 조수가 거울을 움직여 잘 볼 수 있게 해줬다.
“자, 어때요?”
라베나가 뿌듯함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레이디의 녹색 눈동자가 더 깊어 보이죠? 그야말로 디아머드 정통 계승자의 카리스마가 풍겨 나오잖아요!”
“아….”
산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완전히 다른 산샤가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거래하던 부티크’에서 입었던 것은 창백한 피부를 더 창백하게 보이게 했었기 때문에,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보이곤 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아픈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라베나의 옷은 전혀 달랐다.
라베나의 말대로 눈동자가 깊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머리카락은 어떻게 한 거지?
그동안 붉은 기가 있는 갈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햇살을 머금은 붉은빛으로 보였다.
붉은색이 압도적으로 빛난달까.
과연, 당당한 계승자 같아 보였다.
“라베나, …너는 정말 클라이드에서 최고로 능력 있는 디자이너구나.”
라베나가 손끝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그러니 제가 계승식 드레스를 준비하는 게 맞죠. 수호자의 안목이 어찌나 출중하신지… 아차.”
신나서 말을 하던 라베나가 그대로 입을 꾹 눌러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