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8화 (8/97)

8화

산샤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은 벌써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창틀만 어긋난 상태로 조심스럽게 닫혀 있었다.

“이건 고칠 시간이 없었나 보네.”

창틀 하나 고칠 수 없는 시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오고 말았구나.

“아가씨! …아아악!”

아니타가 수선스럽게 뛰어 들어오다가 비명부터 질렀다.

“옷 꼴이 이게 뭐예요? 그렇게 예쁘게 입혀 드렸는데, 이게, 이게…. 아이구우.”

아니타의 수선이야 익숙한 것,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라베나가 올 거야.”

“아이구, 말을 하시네.”

흠칫, 산샤가 말하는 것에 놀랐던 아니타는 금세 자연스럽게 물었다.

“…라베나가 누구예요?”

“클라이드에서 최고로 세련된 부티크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모르는 사람인데요?”

“클라이드 부티크를 네가 다 알지는 않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라베나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을 테니까, 준비해 줘.”

“어어. 이 아가씨 보게.”

아니타가 눈을 부라리며 덤벼들었다.

“아가씨, 진짜! 이러시면 곤란해요. 갑자기 사라지지 않나, 옷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오질 않나. 부티크 주인까지 막 부르지 않나. 라베나인지 뭔지, 오면 바로 돌려보내겠어요.”

“뭐?”

“옷이 필요하면 거래하던 부티크를 불러야죠. 옷 치수며 뭐며 다 거기 있는데…. 아가씨 치수 맞는 옷들도 미리 준비되어 있으니까…. 지금 부르면 계승식 전엔 빠듯하게나마 맞춰올 수 있을 거예요.”

“아니타….”

“왜 불러요, 바쁜데…. 어머, 내 정신 좀 봐.”

아니타가 갑자기 발을 굴렀다.

“아휴, 오후 차 마실 시간이 됐네. 있어 보세요. 가져올게. 차 마시고 옷을 갈아입읍시다.”

말하는 동시에 이미 움직이는 아니타가 벌써 방문 손잡이를 열었다.

“아니타!”

산샤는 아랫배에서 기운을 끌어올려 근엄하게 아니타를 부르고, 지그시 노려보았다.

아니타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돌아봤다.

“바쁜데…. 왜 부르고 그러신대요. 불렀으면 말을 하든가. 왜 보고만 있대. 할 말도 없으면서 괜히 바쁜 사람 불러 세우지 마시라고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종알거렸지만 조금은 눈빛이 흔들린 것 같았다.

“아무리 바빠도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어.”

“그게, 뭔데요? 확실히 해야 할게….”

“내가 너의 윗사람이라는 거.”

“예?”

“내가 너의 주인이란 말이야.”

“헛, 참!”

아니타가 헛웃음을 뱉었다.

“뭐예요? 새삼스럽게.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러니까 제가 존댓말 쓰고 ‘아가씨’라고 부르고 그러잖아요.”

“너는 나를 무시하고 있잖아.”

아니타가 왕방울만 한 눈을 굴리며 덤볐다.

“내가 언제요? 내가 언제 아가씨를 무시했어요?”

“라베나를 제 마음대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질 않나….”

“아휴, 그깟 옷집 주인…. 그렇게 그 여자 옷을 입고 싶으면 그러세요, 그럼. 라베나인지 뭔지 안 돌려보내면 되잖아요.”

“심지어 내 말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너 혼자 말하고, 혼자 결정해 버리지. 바로 지금처럼.”

“억…!”

아니타가 발을 굴리면서 씩씩댔다.

그래도 입만은 다물고 있는 건, 혼자 말한다고 지적받아서인가?

“내 말은 다 끝났다. 할 말 있으면 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니타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해하시는 거예요. 아가씨. 그동안은 아가씨가 말을 못 하니까. 혼자 물어보고 혼자 대답하고 그랬던 거지. 그게 버릇이 되어서 지금도 그런 거고….

물론 앞으로도 또 그럴 수 있겠지만, 그건 내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애라서 그런 거고요. 절대 아가씨를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

“당연하죠. 아가씨한테 가장 맞는 거, 좋은 걸 찾아드리느라 말이 많아지는 거고요. 아가씨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을 피우니까 말이 좀 길어질 때가 있는 거지. 절대 아가씨를 무시해서 하는 거는….”

“알았어.”

“아직 할 말이 좀 남았는데….”

“네 생각은 충분히 알았어. 하지만 이것도 확실히 하자.”

“예?”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내가 모르는 게 많지 않아.”

“예?”

“나에게 좋은 것은 내가 정할 거야.”

“예…. 에?”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

“아니, 그래도 그게….”

“누가 주인인지 잊지 말라고.”

아니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면서도 고개는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가서 차를 가져올게요.”

“안 마셔.”

아니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산샤를 쳐다봤다.

“아니, 왜 안 마셔요? 차를 마시면 심신이 편안해지고…. 영리해지고…. 응,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걸 왜 안 마시겠대요?”

“차를 마시고 싶으면 그때 말할게.”

“안 돼요. 시간 맞춰서 마셔야죠! 차도 마시고 케이크도 먹고…. 제가 얼른 가서 차랑 티케이크를….”

“아니타!”

산샤는 아니타를 똑바로 봤다.

아니타는 산샤의 눈치를 살피며, 어깨가 처지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휴, 그래요. 알았어요. 안 마실 거면 말아요. 나도 뭐 수고를 덜고 좋네, 뭐.”

“라베나가 오면 바로 안내하고.”

“그래도 드레스는 원래 거래하던 데를 불러야 하는데….”

산샤가 돌아보자, 아니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라베나를 잘 안내하겠습니다.”

탁.

아니타가 문을 조심스럽게 얌전히 문을 닫았다.

아니타가 자신의 지시를 따랐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 같았다.

역시 자신이 달라지니까 지난 생과 다른 결과를 얻는구나.

산샤는 기뻤다.

바로 그때.

기껏 얌전히 닫혔던 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그리곤 모리츠가 으르렁거리며 들어섰다.

“산샤 디아머드!”

열린 문 사이로 아니타가 문고리를 잡았던 자세 그대로 뻥한 표정이 되어 있는 게 보였다.

모리츠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 질렀다.

“너 무슨 짓이냐! 시장 바닥에서 어른에게 말본새가 그게….”

“숙부님, 아깐 죄송했어요. 말을 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실수가 좀 있었네요.”

“어?”

모리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줄줄 흐르는 피를 훔쳐내며 달려올 때는 산샤를 씹어 먹어도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무너진 기둥들 사이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수백 년간 낮밤으로 북적거리던 클라이드가 텅 비었더란 말이지.

누구든 그런 꼴을 당했으면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도와줄 사람 하나 남기질 않고 다 데려가?

빠드득빠드득 이를 갈았다.

산샤가 끌고 간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왔던 건 모리츠에겐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무조건 산샤가 나쁜 거니까 보자마자 질근질근 밟아 버리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준비한 말도 다 못 해보고 막혔다.

꼬투리 잡을 게 수도 없이 많았는데 왜 하나도 생각이 안 나지?

아! 하나 생각났다.

“…비천한 것들을 디아머드 계승식에 참여시켜? 디아머드 계승식은 말이다. 제국의 시선이 집중되는 중요한 의식이란 말이다. 성스러운 바위산엔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한정되고….”

“그 사람들은 마정석 광산으로 갔어요. 어차피 마정석 광산이 열리는 걸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니까….”

“어…. 어?”

이 계집애가 왜 이렇게 말을 잘해?

번번이 말이 막히자 모리츠의 얼굴은 뻘겋게 달아오르고 열기가 확확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상처가 심하네요, 숙부님?”

“…뭐?”

“그 정도면 꽤 아팠을 텐데, 아픈 줄도 모르고 달려오셨어요?”

“무, 무슨….”

“자기 꼴이 어떤지 아직 모르시나 보네. 거울을 좀 보세요.”

“뭐라는 거야, 대체 무슨 헛소리를….”

모리츠는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가 ‘크하악’ 비명을 질러 버렸다.

달려오는 내내 연속해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 몰랐다.

깨진 게 머리인가, 이마인가?

정수리에서부터 이마까지 덕지덕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어머, 끔찍해라.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몰랐어요?”

산샤가 몸서리를 치는데,

“머리카락을 다 밀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전히 문고리 잡고 서 있던 아니타가 끼어들었다.

“아니타!”

모리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산샤에게 뭐라고 할 순 없으니 아니타라도 잡아야지.

“문 닫아. 너는 멀리 가 있고.”

“예에….”

“아니타!”

산샤도 아니타를 불렀다.

“들어와 있어.”

“예?”

아니타가 제 귀를 슬쩍 후벼 팠다.

자작 앞에서는 숨도 크게 못 쉬던 아가씨가 자작과 반대되는 명령을 하다니….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까지 하네.

아니타는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아가씨?’

산샤는 일부러 더 크게 손짓을 하면서 말했다.

“들어오라니까! 들어와서 문을 닫아.”

“들어오긴 어딜 들어와.”

모리츠가 소리를 질렀다.

“멀리 가 있으라고 했잖아.”

“들어오라고, 아니타.”

“나가라고 했다, 아니타.”

아니타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둘 다 자신의 상전이 아닌가.

어느 쪽 말도 거역할 수 없고, 그래서 어느 쪽 말도 들어줄 수 없었다.

이 양반들이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자신을 들어오게 하거나 나가게 하는 걸로 힘겨루기를 하면 어쩌자는 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둘이 동시에 외쳐 불렀다.

“아니타!”

아니타도 급한 마음에 꽤액 소리를 질렀다.

“어쩌라고요?”

그러자 산샤가 말했다.

“아니타, 네 주인이 누군지 생각해.”

“아!”

그러면 더 고민할 게 없다.

아니타는 실세를 파악하는 능력은 탁월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니타는 바로 방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아니타! 이 방자한 계집!”

모리츠가 부르르 떨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산샤가 피식 웃었다.

“아니타가 현명한 선택을 했네요. 디아머드 백작 가의 주인이 누군지 확실히 알아봤어요.”

모리츠가 산샤와 아니타를 싸잡아서 노려보기 시작했다.

산샤는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짧게 말하죠. 오늘부로 내가 디아머드 가주입니다. 이제 후견인은 필요 없으니 성에서 나가주세요.”

“…뭐?”

매섭던 눈이 갈 데 없이 흔들렸다.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모리츠는 더듬거렸다.

“아니 그게 무슨…. 나가라니? 갑자기?”

“어떻게 ‘갑자기’라는 거죠? 내가 가주 자리를 계승한 다음에도 성에 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아… 아직 완결된 게 아니지 않니. 연회도 열어야 하고, 평생 반려도 정해야하고, 황제의 승인도 받아야 한단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가주예요.”

“연회가 남았다니까! 내가 집안의 어른으로서 책임지고 너의 반려를 찾는 연회를 열어야 한단 말이다.”

“성에 살고 있어야만 연회를 열 수 있는 게 아닌데?”

“그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산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간단한 문제 아니랄까? 엄청나게 간단한데?”

“복잡한 여러 가지…, 너는 모르는 것들이 있단 말이다.”

“내가 모르는 거라면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네요.”

“뭐라고?”

모리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산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복잡한 일일수록 간단하게 생각하세요. 먼저 성에서 나가요. 할 일이 남았다면, 성 밖에서 살면서 출퇴근하도록 해요. 다른 사무관들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니까….”

“모리츠 디아머드 자작.”

산샤는 턱을 치켜들고 모리츠를 눈 아래로 깔아봤다.

“나, 산샤 디아머드가 가주로서 명합니다. 당장 거처를 디아머드 성 밖으로 옮기세요.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