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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7화 (7/97)

7화

모리츠는 여전히 무시무시하고 흉악했다.

티케이크 한 번 안 먹은 걸로는 효과가 없는지, 그의 악의적인 오러가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였다.

산샤는 되도록 천천히 일어나서 세심하게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심호흡을 했다.

이젠 예전의 산샤가 아니니까.

모리츠 따위 하나도 두렵지 않으니까.

산샤는 다리로 단단하게 버티고, 가슴을 펴고, 마지막으로 빡!

눈에 힘을 준 다음에 모리츠를 노려봤다.

모리츠가 여유를 가장하며 유들유들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 있는 걸 모르고 그렇게 찾아다녔구나, 산샤 디아머드!”

모리츠가 산샤 이름을 내뱉자,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던 마부가 소리를 질렀다.

“레이디 산샤?”

“허업, 레이디 산샤!”

마부 따라서 소리를 지른 건 채찍 남자였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생각하기도 전에 쿵!

남자가 무릎을 내던졌다.

으윽. 저래서야 디아머드 남자들의 무릎이 남아나겠나.

산샤는 괜히 제 무릎이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무릎을 꿇은 남자는 이마를 콩콩콩 땅에 박아댔다.

“레이디 산샤인 것도 모르고 제가…. 저의 실수를….”

그냥 두면 또 피범벅을 만들겠지?

산샤는 재빨리 외쳤다.

“용서한다. 아까도 용서했었다. 아까는 몰라서 말을 못 했을 뿐이야. 그러니 어서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손짓까지 하는데도 채찍 남자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크게 벌렸던 입은 벌린 그대로 눈만 떼구르르 굴리고 있었다.

정말 일어나도 되는지, 진짜 용서를 받은 건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 말은 진심이야. 그러니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물러나. 너까지 거들 필요 없으니까.”

“아니, 저어….”

그래도 채찍 남자가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데, 마부가 나서서 채찍 남자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아무리 귀족이네 평민이네 해도 길바닥에서 무릎을 꿇는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디아머드의 정의는 이런 게 아니라고.”

“어? 무슨 정의?”

어리둥절한 남자를 보며 산샤는 웃었다.

마부가 디아머드 정의를 말하다니, 자신이 말한 게 빛을 발한 것 같아서 자랑스러웠다.

디아머드 정의가 살아 있다고!

모리츠 따위, 흥이다!

그때 모리츠가 다정한 척 손을 내밀었다.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아니? 어서 돌아가자.”

산샤는 마부에게 배운 대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하고는 안 가.”

실룩, 모리츠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안 가긴, 그러면 되겠니? 가서 여황의 문을 열어야지. 디아머드의 모든 사람이 기다리고 있단다.”

“알고 있어. 내 마음도 같으니까. 나는 여황의 문을 열 거야. 열어서 마정석을 채굴할 수 있게 할 거야.”

우와!

구경꾼들 사이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산샤를 바라보는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서 가자니까.”

“그렇지만 당신하고는 안 가. 나는….”

산샤는 마부를 가리켰다.

“저 마부의 마차를 타고 갈 거야.”

마부가 성큼 나섰다.

“감사합니다. 레이디를 태울 수 있다니…, 제 평생의 영광, 가문이 영광입니다.”

산샤는 모리츠를 돌아봤다.

“들었지? 그러니까 당신은 비켜.”

“무, 무슨 개소리야?”

모리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너의 후견인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결정….”

그렇지만 모리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구경꾼 중 누군가 그의 말을 끊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산샤! 제 마차를 타십시오. 이놈 마차는 짐마차 아닙니까?”

“헛소리!”

마부가 단호하게 나섰다.

“레이디는 이미 내 마차를 지목하셨다. 어딜 끼어들어.”

“그거야 네 놈 마차 상태를 모르니까 그러셨겠지.”

“뭐야? 애초에 여기 오실 때도 내 마차를 타셨다고. 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어리바리한 놈. 남매 사기단에 당한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마부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고, ‘엄마야’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때 산샤가 크게 외쳤다.

“우리 모두 갈 거야.”

“예?”

“저 마부뿐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 다 같이 가서 여황의 문이 열리는 걸 함께 볼 거라고.”

“산샤 디아머드!”

이번에는 모리츠가 소리를 질렀다.

“여황의 문을 여는 건 제국의 안녕과 디아머드의 번영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어디 미천한 것들이 그 자리에 함께 간단 말이냐.”

“흥.”

산샤는 모리츠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나는 제국의 안녕이나 디아머드의 번영은 모른다. 내가 문을 여는 건 디아머드 백작령의 백성을 위해서니까 다 같이 가서 지켜보는 게 맞아.”

우와! 모두 환호성을 질렀고,

“자, 이제 계승식에 가볼까?”

산샤가 앞장서자 우르르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모리츠와 산샤 사이로 밀려들자 모리츠는 산샤에게서 점점 더 멀어졌다.

이대로 영영 놓쳐버릴 것 같았다.

“안 돼애!”

모리츠가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산샤 저 계집애를 잡아야 해.

절대 내 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어.

놓칠까 보냐.

산샤의 손목을 낚아채려는 그때, 누군가가 모리츠를 확 밀어버렸다.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는 그의 머리 위로 휘리릭 착, 채찍이 날아왔다.

모리츠가 놀라 움츠렸는데, 채찍은 노예시장 단상의 차양막을 감아 뜯어냈고.

우르르 쾅쾅!

기둥이 그대로 모리츠를 덮쳤다.

무너진 것들에 묻힌 모리츠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망연자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자욱한 흙먼지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산샤 옆으로 채찍 남자가 다가왔다.

“레이디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채찍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작님을 다치게 했는데…. 이게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용서받지.

상을 줘야 할 판인데.

“자작이 혼자 걷다가 걸음이 꼬였나 봐, 괜히 혼자 기둥 잡고 넘어지네. 우리 다 봤잖아. 그렇지?”

구경꾼들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죠. 자작님이 감정이 격해지신 거 같더라고요.”

“왜 그랬을까? 여황의 문이 열릴 걸 생각하고 흥분하셨나?”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어, 저기….”

무너진 잔해 한쪽 끝이 조금씩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 틈으로 흉악한 오러도 삐져나왔다.

명이 길구나, 모리츠.

산샤는 그대로 돌아섰다.

내 손으로 끝내줄 테니,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라.

* * *

디아머드 성으로 향하는 마차 행렬은 축제 분위기였다.

부어라 마셔라 떠들며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그 와중에 어찌나 말이 많던지….

잠깐 사이에 ‘눈 깔아라’ 남매 이름이 트리스와 티몬인 것을 알았고, 모리츠의 부동산 소유 현황을 파악했으며, 제국의 정치 상황을 배웠다.

산샤가 눈 귀 입을 막고 있던 동안 라인하르드 제국은 황제가 바뀌어 있었다.

선 황제 도미니크 라인하르드는 클라우스 황태자와 함께 북부 지역을 순행하다가 사고를 당했고, 당시 열 살이었던 황자 조나스 악셀이 황위에 올랐다고 했다.

지금 라인하르드 제국은 조나스의 외숙부 호레스 밀란이 섭정 대공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옆에 있던 사내가 속삭여왔다.

“사고는 호레스 밀란 대공이 자객을 보낸 거랍니다. 자기 조카를 황위에 올리고 권력을 잡으려고요.”

“클라우스 황태자 전하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랍니다. 시체가 끝내 발견되지 않아서, 빈 관을 묻었대요.”

“참, 아까운 일이죠. 황태자 전하가 ‘바람을 다스리는 자’로 통치하실 거라고 했었는데 말이죠.”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뭔데?”

산샤가 묻자, 다들 그것도 모르냐는 듯 앞다퉈 설명했다.

“제국에 전설이 전해져 오잖아요. 바람을 다스리는 자가 제국을 영광의 길로 이끌 것이다.”

“전하가 아기 때 요람에서 바람 정령과 교감하는 것을 보이시고…, 다들 그분이 각성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지요.”

“아!”

산샤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각성한 황태자가 곧 나타나서 밀란 대공을 날려버리겠네?”

“예에?”

모두 기겁하며 산샤를 바라봤다.

“아이고, 그럴 리가요.”

누군가는 손사래까지 치며 나섰다.

“전하가 정말 살아 계신다면, 완전히 꼭꼭 숨어 계셔야지요. 대공이 가진 군사가 얼만데….”

“밀란 대공은 못 이겨요. 이제 제국은 밀란 가문의 것이라고 봐야죠.”

“지금 황제는 허수아비라니까요.”

“…아, 그래?”

산샤는 조용히 찌그러졌다.

실종되었다는 황태자와 본 적도 없는 현 황제가 걱정되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까.

“…천벌 받을 인간들이 많기도 하네.”

가만히 한숨 쉬는 산샤를 보고 말없이 술만 마시던 노인이 말했다.

“우리 가주님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앞으로 쭉 행복하시면 됩니다. 반려도 맞이하시고, 가주님 닮은 예쁜 아이들 낳으시고, …그러셔야죠.”

노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선대 백작님과 백작 부인이 생각나네요. 어찌나 그림같이 예쁘시던지…. 두 분 참 행복하셨죠. 보는 백성들이 행복할 정도로.”

산샤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는 것만으로 너무 좋아서 가슴에 풍선이 든 것처럼 웃음이 터져 나오고는 했었다.

그렇지만….

“…돌아가시고 말았잖아.”

‘살해당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산샤를 애잔하게 보며 노인이 말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인데요. 언제 죽었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두 분은 사는 동안 후회 없이 행복하셨을 겁니다.”

“이제 가주님만 행복하시면 됩니다.”

“우리 모두 가주님을 응원하고 있단 말입니다.”

산샤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두 초롱초롱한 눈으로 산샤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밖으로 나오질 않으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애잔하던지…. 부모님 돌아가신 상처가 깊으신 게로구나 하면서….”

“얼음여황 글라키에스께 돌봐주시라 날마다 기도했답니다.”

산샤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에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었구나.

이들의 응원으로 버텼던 거로구나.

“고마워, 모두.”

산샤는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제대로 인사를 챙기시면, 저희가 한 게 없는데….”

사람들이 머쓱해하며 허허 웃는데,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그 드레스, …오늘 입을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드레스?

여자의 시선을 따라, 산샤는 새삼스럽게 제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소매는 이미 잘려 없어졌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데다가 여기저기 찢어지기까지 해서 상태가 엉망이었다.

“어째요? 상태가 그 모양이라….”

“괜찮아. 성으로 돌아가 아무 옷으로나 갈아입으면 되니까.”

“어머어!”

여자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레이디,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실망이에요.”

“왜, …뭐? …왜 이래?”

“드레스를 모욕하고 있잖아요!”

산샤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 드레스를 모욕해?

“아무 옷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갑자기 여자가 마차 벽을 탕탕 때리더니 소리쳤다.

“마부, 마차를 세워. 당장 내 부티크에 다녀와야겠어.”

마차가 멈추었고, 여자가 뛰어내리면서 소리쳤다.

“내가 딱 맞는 드레스를 챙겨갈게요. 먼저 가서 씻고 머리를 만지고 계세요. 아셨죠?”

“아니 그게….”

“내 이름은 라베나예요. 클라이드에서 최고로 세련된 부티크를 운영하는 디자이너랍니다.”

라베나가 다시 소리쳤다.

“자, 마부, 출바알!”

마차는 움직였고, 산샤는 뭐에 홀린 듯 눈만 껌뻑껌뻑 떴다 감았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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