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산샤는 자신을 태우고 온 마부를 금방 찾았다.
다 큰 어른이 철퍼덕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있으니 못 찾으래야 못 찾을 수가 없었다.
헐벗은 사람들을 올려놓고 구경하던 노예시장의 단상은 비었고 그 주변도 한산한데, 마부 주변에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자기네들끼리 속닥이면서 마부를 구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감했다.
저렇게 울고 있는 사람에게 마차를 태워달라고 할 수도 없겠으나, 저 구경꾼들의 시선을 받으며 마부 옆으로 가는 것도 곤란했다.
산샤는 마부가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쪼그리고 앉았다.
얼마나 더 울 건가?
왜 울고 있는 거지?
그만 좀 울지.
그때 뚝. 마부가 울음을 멈췄다.
오, 신기하다.
마치 듣고 멈춘 것 같아.
산샤는 벌떡 일어섰는데, 내내 마부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슬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마부와 시선이 마주칠까 봐 두려운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부가 잽싸게 그중 한 명을 붙잡았다.
“내 이야기 좀 들어 주십시오. 세상에 이런 억울한 경우를 당할 수도 있단 말이오?”
“아까 다 했으면서…. 몇 번이나….”
“전 재산 털어서 만든 마지막 밑천이었단 말입니다. 멀쩡한 놈들이 사방에 깔렸는데 하필 내 돈을 사기 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아니…. 그게…. 나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소.”
“모르긴 왜 몰라? 알아야지!”
닦달하는 마부를 이리저리 피해 보려던 남자가 궁지에 몰리자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몰라요, 몰라! …사람이 이렇게 양심이 없어. 이래저래 민폐만 끼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마부가 질세라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어디가 민폐야? 내가 뭘 어쨌다고 민폐야?”
“몇 시간째 울고불고…. 장사를 못 하게 하니까 시장도 닫고….”
“장사야 닫을 시간이 됐으니까 닫은 거지.”
“어쨌든! 이건 민폐란 말이지.”
“그러니까 내 말을 좀 들어주라고요.”
“아, 시끄럽다고!”
남자는 매정하게 마부를 뿌리치고 후다닥 가버렸다.
마부가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도망가버린 상태.
마부는 다시 통곡하려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런데 그대로 멈춰 버렸다.
껌뻑껌뻑 떴다 감았다 하는 눈이 딱 산샤를 향하고 있었다.
몇 번 더 껌벅거리더니 번개처럼 달려와 바로 앞에서 콰당 무릎을 꿇었다.
아악! 산샤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뭐야, 왜 이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일어나. 일어나서 이야기해. 왜 무릎부터 던지고 보는 거야? 아프지 않아?”
“귀한 집 아가씨를 보면 당연히 꿇어야죠. 다친 데는 괜찮으십니까? 수호자와 같이 가셨는데 왜 다시 나오셨습니까?”
“일어나. 아무리 귀족이고 평민이라도 길바닥에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어. 디아머드에 이런 법은 없었다.”
“법이라니요? 원래 이러는 거 아닌가요?”
마부는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무릎은 땅바닥에 붙어 버렸는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면 왜 울고 있었는지 내가 다 들어 줄게.”
그래도 마부는 요지부동, 눈만 껌뻑거렸다.
“그렇지만 어떻게 귀하신 분 앞에 뻣뻣하게 서 있겠습니까?”
“안 일어나면 그냥 간다?”
몸까지 반쯤 돌리자 벌떡, 마부가 일어섰다.
“정말 들어주실 겁니까?”
“그래. 대신 알아들을 수 있게 앞뒤 맥락을 잘 갖춰서 말해야 해.”
마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짝 다가왔다.
“아까 그 아이들 말입니다. 상습범이라지 뭡니까?”
“상습범?”
“스스로 제 몸을 노예로 팔아서 돈만 챙기고 도망가버린대요. 어디다 잡아놔도 도망 못 간 적이 없다네요. 그렇게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래요.”
“한둘이 아니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일 텐데 왜 번번이 당했대?”
“물건이 좋잖아요.”
“물…거언?”
산샤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는데도 마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떠들었다.
“어떤 사람은 단상에 올려서 파는 데까지 성공해서는, 경매를 부르는 게, …마구 값이 올라서는, 집 한 채 값을 벌었다지 뭡니까? 근데 거기서도 도망가 버려서 그 사람은 다 물어주고 손해배상까지 했답니다.”
“아, 그래?”
산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부는 아이들에게 고마워해야겠네.”
“예?”
마부가 펄쩍 뛰며 소리 질렀다.
“제가 한 말을 어디로 들으셨어요? 전 재산을 먹고 튀었다니까요!”
“누구한테 팔아 봐. 잠깐 기쁘기는 하겠지만, 애들은 결국 도망갈 거고, 마부는 손해배상까지 해줬어야 하잖아.”
“…에?”
“전 재산이었다면서? 뭐로 손해배상 할 거야? 마부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 했을걸. 그 지경까지 안 가게 미리 도망가줬으니까 고맙지.”
“아…!”
마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진짜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게 왜 사람을 팔아서 돈 벌 생각을 해? 사람은 물건이 아니잖아.”
“그렇지만 내 자식을 팔 수는 없잖습니까.”
“뭐?”
“굶어 죽을 수도 없고요. 뭐라도 팔아야 먹고 사는데…. 걔들도 길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야 백번 좋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모두에게 좋은 거 아닙니까.”
“디아머드의 정의는 어쩌고?”
“디아머드 뭐요? 그게 뭡니까?”
“그게 뭐냐니? 정의! 사람이 가장 귀하다. 디아머드의 정신이잖아.”
마부가 슬쩍 뒤로 물러서더니 산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입술을 비틀고 있는 게 비웃고 싶지만,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 적 정신을…. 그게 다 먹고살 만할 때 이야기죠. 지금은 살아남는 게 정의입니다.”
그래! 먹고살게 해주겠다.
그러면 디아머드 정의도 다시 세워지겠지.
산샤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부를 찾아온 거야. 나 좀 태워다 줘.”
“안 됩니다.”
단호하기도 해라.
마부가 단호한 거절에 일가견이 있네.
“어디로 갈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안 된대?”
“물어보면 뭐 합니까? 여기에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건데요.”
“안 움직이면? 다 큰 어른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계속 꺼이꺼이 울고 있을 거야? 사람들 민폐나 끼치면서?”
“아니, 언제 그런 건 다 보셔서….”
마부가 머쓱해하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돈을 찾아야죠. 원래는 그놈들을 잡아 족치려고 했는데…. 레이디 말을 들어보니 고마운 점도 있어서, 그냥 돈만 찾고 놔주겠습니다.”
“얼만데?”
“예?”
“얼마면 되냐고. 그 돈 내가 줄… 왜 그런 눈으로 봐?”
마부가 뜨악한 눈으로 산샤를 훑어보다가 쓰읍 고개를 기울였다.
“레이디, 혹시 그놈들하고 한 패거리 아닙니까?”
“뭐?”
“그놈들이랑 같이 타고 왔잖아요.”
“그건 자네 마차를 내가 얻어 탔으니까….”
“어쩐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더라니. 그게 다 사기꾼들이 그러는 거잖아. 내가 아무리 순진하다고 그런 것까지 모를까.”
마부가 눈을 부라리며 덤벼들었다.
산샤가 슬쩍 물러서는 걸 보고 마부는 소리를 질렀다.
“뭐, 어쩔라고? 도망이라도 가보겠다는 거여?”
도망가야겠다.
산샤는 휙 팔을 뻗으며 외쳤다.
“어, 저기! 아이들!”
홱 돌아본 마부도 소리쳤다.
“거기 서라! 이놈들! 거기 서.”
마부가 달리기 시작했다.
산샤는 허공을 가리켰던 그대로 서서 물끄러미 마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냥 외쳐본 거였는데, 뭐가 있긴 있었나?
그렇지만 마부가 이대로 가버리면 안 되는데.
“마차! 마차를 태워줘야지. 거기 서, 마부, 가면 안 돼!”
* * *
중앙광장의 동쪽 노천카페.
카페 종업원은 물 주전자를 받쳐 들고 손님 한 명을 주시하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 얼굴빛을 바꿔가며 들썩들썩 혼자 주먹질을 하던 손님이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컵을 테이블에 놓자마자 종업원은 쪼르르 달려가서 넘치도록 가득 물을 따라주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지나가던 종업원이 눈으로 물었다.
왜 저래?
물 담당 종업원은 입술을 빼물고 고개를 저었다.
몰라.
분을 삭이지 못하고 혼자서 난리 법석인 손님은 모리츠 디아머드 자작이었다.
산샤가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한 즉시 클라이드로 달려와서 이때까지 온갖 군데를 뒤지고 다녔다.
‘가출하면 곧 클라이드’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볼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다.
그런데 아무리 들쑤시고 다녀도 이 계집애가 보이지 않았고, 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붉은 갈색 머리, 녹색 눈,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고급스러운 옷차림. 분명히 눈에 띄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산샤 디아머드, 이 얄미운 계집애!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모리츠는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켰다.
지켜보고 있던 카페 종업원이 쪼르륵 달려와 잔을 채웠다.
또 벌컥벌컥.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종업원이 한 걸음도 못 가고 달려와 또 물을 채웠다.
아무리 찬물을 마셔도 열이 식지 않았다.
뱃속에 화산이라도 자리 잡은 것 같았다.
7년 동안 성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안 나갔던 애가 오라는 데가 있을 리도 없고.
당연히 어리바리 헤매고 있을 줄 알았건만, 어디로 갔냔 말이다.
“나가기는 왜 나간 거야?”
모리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도 스무 살 생일만 기다렸던 거 아냐? 가주가 되면 나를 쫓아내려고 벼르고 있었던 게 아니냐고….”
계승식 시간은 바짝바짝 다가오는데….
어디 가서 이 계집애를 찾는단 말이냐.
이렇게 감쪽같을 수가 있나.
이건 꼭, 아예 안 온 것 같다.
어?
모리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타가 뭐라고 했더라?
[아가씨 집이 여긴데, 뭐 한다고 창문으로 뛰어내렸겠어요?]
그때는 산샤 집이 여기라는 말에 울화통이 터져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아니타 말이 맞았다.
나갈 이유가 없어.
창문도 쉽게 내려갈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고는 정원 산책이나 하던 애가 나뭇가지를 밟고 내려가는 게 가능했을 것 같지 않다.
그래, 그렇구나.
안 나왔구나.
쥐새끼같이 숨어 있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모리츠는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중앙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을 그때!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비켜, 비켜! 저리 비켜요.”
사람들은 우왕좌왕, 서로 동선이 엉키며 난리가 났는데 모리츠가 돌아본 순간에 꽈당!
달려오던 자와 부딪쳐 나동그라져 버렸다.
“아악, 미안, 미안! 다치지 않았어요?”
상대방이 큰소리로 사과부터 했다.
모리츠는 나동그라진 그대로 상대를 빤히 보기만 했다.
으흐흐.
큰소리로 웃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입술 끝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상대가 홱 고개를 들어 모리츠를 바라봤다.
망연자실.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모리츠…!”
모리츠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여유만만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산샤 디아머드, 여기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