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여황의 문을 여는 능력이, 지금 레이디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 건 알아요?”
아드리안이 묻자 산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레이디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게 그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인 것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돌아가서 문을 열겠다?”
“해야 할 일이니까요.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요.”
“그 문을 열고 나면 무슨 일이든 당할 수 있다는 것도 알죠?”
당연히 알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벌써 한 번 살해당했었는데….
혹시 이번에 죽어도 다시 회귀할 수 있을까? 될 때까지 계속 시간을 되돌려 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보장된 건 없고,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설령 오늘 밤 얼음절벽으로 끌려간다고 해도.
자신밖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에 모두의 생명이 걸렸다는데.
딱 하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생과는 다를 거라는 거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있다가 당했던 지난 생과는 달리 이미 많은 것을 알았다.
지난 생과는 다른 산샤가 되었으니, 모든 것이 지난 생과는 다를 거라고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여황의 문을 열면 디아머드 백성들은 다시 마정석을 채취할 수 있어요.”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이 세상엔 없어요.”
“내가 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할래요.”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
산샤는 잠시 궁리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두렵긴 하죠.”
얼음강에 빠져 뼛속까지 얼어붙는 느낌은 아무래도 괴로우니까.
죽더라도 얼음강에 빠져 죽진 말자.
어머니 아버지는 천국에 계실 텐데, 혼자 떨어져서 글라키에스 얼음 궁전에 잡혀 있기는 싫어.
“그래도 내가 뭘 했는지 알고 죽으면 가치 없는 죽음은 아니니까….”
“하아….”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네 가문 사람들은 정말….”
“우리 가문 사람들이, …왜요?”
아드리안은 한참 대답할 말을 고르다가 툭 내뱉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흐으,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아보려고도 했지만, 굳이 참아야 하나?
산샤는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건 엄청난 칭찬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좋아했다고요.”
“참 좋아할 말이군요.”
“어머니가 말씀하셨죠. 짐승도 위험에 닥치면 도망가는 법이고, 도망가는 것도 용기라고. 나는 용감한 사람이니까 딱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할 거예요.”
“과연?”
“하하하.”
산샤는 다시 웃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마음 놓고 웃어보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나뭇잎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어대던 그만큼 행복해진 것 같았다.
산샤가 크게 웃으면 웃을수록 아드리안은 못마땅해했지만, 그것도 즐거웠다.
“…좋아요. 이번에는 당신이 대답해 봐요.”
“뭘?”
“화를 내면서까지 내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건 무슨 이유예요?”
“내가요?”
“모를 줄 알았어요? 딱 봐도 보이고, 숨기려고도 하지 않던데?”
순간 아드리안의 눈빛이 미미하지만 흔들렸다.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말해야 해요. 속이려 들지 말고.”
“속일 생각은 없어요. 단지 이유가….”
아드리안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꼭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걱정을 할 수 있나요? 디아머드를 멀쩡한 사람이 계승하기를 바라는 게 이상한가요? 계승한 사람이 허무하게 죽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걸 이해할 수 없어요?”
어? 이건 아닌데.
질문을 질문으로 덮어버리다니…. 엄청나게 수상하잖아.
“그러니 시간을 좀 두는 게 어때요? 여황의 문을 당장 오늘 열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충분한 준비가 된 다음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산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들 오늘만 기다리며 살았을 거예요. 하루도 더 참을 수 없는 마음일 테고. …이왕 하기로 한 거, 정해진 날에 해야죠.”
“역시 죽게 되어도 괜찮다?”
“안 죽어요!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예요.”
산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드리안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기어이 가요?”
산샤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아드리안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죽어버리지 말고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요. 최선을 다해 살아남을 작정이니까.”
산샤는 자신의 의지와 각오를 담아 활짝 웃어 보였다.
* * *
우아한 가식이 넘쳐나는 아델라이드.
산샤가 2층에서 내려오자마자 후다닥 달려온 지배인 루카가 산샤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십니까, 레이디?”
“집에 가.”
“집이요?”
루카가 산샤의 어깨너머로 2층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디아머드 성에 가신다는 말은 아니죠?”
“당연히 디아머드 성에 간다는 말이지. 내 집은 거기 말고 다른 데였던 적이 없어.”
“에엑?”
루카가 꽤액 괴성을 질렀고, 순간 아델라이드가 조용해졌다.
아델라이드 모든 손님의 시선이 루카와 산샤에게 집중된 건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카는 얼른 몸을 숙이며 산샤의 팔을 잡더니 속삭였다.
“레이디, 저하고 이야기 좀 나누시죠.”
“난 할 이야기 없는데? 오늘 처음 본 아델라이드 지배인에게 들을 말도 없고, …길 좀 비키지?”
“레이디! 정말 죄송합니다만. 정말 정말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단 말입니다. 금방 끝납니다. 오래 안 잡아요. 저쪽으로…. 예, 예?”
루카가 팔을 들어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어, 어…. 어….”
주춤주춤 루카의 팔을 피하려다 보니 계단 뒤.
산샤는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밀려온 게 억울해서 호통을 쳤다.
“지배인! 감히 이게 무슨 짓이야. 무례하구나.”
호통만으로 부족한 것 같아서 팔짱을 끼고 최대한 무섭게 노려봤다.
그러나 루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제 이름은 루카입니다. 앞으로는 지배인이라고 부르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쓰윽 허리에 손을 짚더니 입을 삐쭉거렸다.
“가긴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아드리안 경이 싫어하실 텐데요.”
“내가 내 집에 가는데 어째서 아드리안이 싫어해? 게다가 싫어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레이디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주셨잖아요. 그 정도는 상관할 수 있죠.”
그런가?
좋아
그건 바로 인정!
“그렇지만 아드리안은 내가 성에 돌아가는 데 동의했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쉽게 보내실 리가 없다고요. 다시 제대로 말씀해보세요. 우리 전ㅎ…가 정확하게 성.으.로.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 너의 전ㅎ…가 잘 가라고 했다.”
“예?”
루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껌뻑껌뻑 눈을 떴다 감았다 하더니, 슬쩍 허리에서 손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전ㅎ…라고 했나요?”
“응, 전ㅎ…가 뭐야? 수호자가 제국의 지배 밖에 존재한다고, 너희들끼리 왕 노릇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절대 오해이십니다. 말실수한 거를 갖고 괜히…. 아니, 그게 아니라….”
루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 말은 아드리안 경이 잘 가라고 작별 인사를 했냐는 게 아니라, 성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허락하셨냐고 묻는 거잖습니까.”
“허락, 필요 없다니까. 내가 내 발로 내 집에 가는데 누가 허락을 하고 말고 해.”
“못 가십니다. 가지 마시라고요. 안 죽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게 그야말로 기적인데, 거길 다시 들어가다니요?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씩씩대는 루카를 보며 산샤는 헛웃음을 웃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뭐가요? 왜요? 기적 맞잖아요. 오죽하면 우리가 들어가서 탈출시킬 작정까지 했겠어요?”
저건 또 무슨 소리지?
대체 뭘 숨기고 있는지 밝혀내고야 말겠어.
아드리안은 바늘도 안 들어갈 것 같았지만, 루카는 추궁하다 보면 다 나올 것 같아.
아니나 다를까 루카가 금세 비굴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왜요, 레이디?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보기만 하세요? 아무 말이나 하세요.”
“말을 하면?”
“돈독한 대화가 오가겠죠.”
“돈독한 대화가 오가면 궁금한 것도 바로바로 대답해주나?”
“당연하죠. 뭐든 말씀만 하세요. 바로 대답해 드립니다.”
“나를 탈출시킬 작정까지 했다는 건 무슨 의미야?”
루카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 그렇게 말했나요?”
“응. 그렇게 말했어. ‘오죽하면 우리가 들어가서 탈출시킬 작정까지 했겠어요?’라고…. 우리는 아드리안과 너야?”
“그건 꼭 그렇지만은 않고요.”
“그럼, 누구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루카가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것도 아닌데…. 제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왜 그랬는지는 상관없어. 무슨 의미인지나 밝혀.”
“글쎄요. 그게 의미가….”
루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만 더 압박하면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머, 루카! 여기 있었네요?”
콧소리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레이디 콘스탄틴!”
루카는 구세주라도 만난 양 호들갑스럽게 반가워했다.
“계시죠?”
“예에, 그대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그럼.”
콘스탄틴이 끈적끈적한 눈웃음을 남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계단을 올라가고 복도를 걸어가더니 아드리안이 있는 방에 노크했다.
그러고는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산샤는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레이디 콘스탄틴은 자주 오시는 분이니까요.”
“저기가 그러니까…. 저렇게 이런저런 레이디 불러다 만나는 데야?”
“에예?”
루카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어이없어했지만,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숨겨진 비밀이고 뭐고 흥미가 뚝 떨어져 버렸다.
산샤는 ‘흥’ 콧방귀를 뀌고 돌아섰다.
“콧방귀는 왜, …뭐 어쨌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필요가 왜 없어요? 레이디는 길을….”
루카가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산샤는 나와 버렸다.
아델라이드에는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 * *
밖으로 나와서야 루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았다.
‘레이디는 길을 모른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겠지.
말 그대로 산샤는 길을 모른다.
클라이드 자체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시시때때로 나왔기 때문에 아주 익숙했다.
축제 시즌이 되면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렇지만 백작 가의 레이디는 마차나 수행원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길을 익힐 필요가 없었단 말이지.
그렇다고 아델라이드에서 내주는 마차를 탈쏘냐.
“어쩔 수 없네. 이렇게 된 거 나를 태워 온 마부를 찾아봐야겠네.”
마부와 채찍 남자를 찾아야겠다.
채찍 남자에게는 해 줄 말도 있었다.
귀족 여인을 상처 입혔다고 죽는 일이 없다.
디아머드에 그런 법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