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드리안은 클라이드 광장의 중심가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귀족들의 사교클럽 ‘아델라이드’로 산샤를 안내했다.
아델라이드는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적당히 상쾌했고 적당하게 은밀해 보였다.
그래서 불편했다.
한 발만 밖으로 나가면 살겠다고 악다구니 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이게 무슨 사치란 말인가.
디아머드 백작령에 이렇게 귀족이 많았던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은 것도 이상했고, 여자들이 아드리안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건 구역질이 났다.
아드리안이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드리안은 산샤를 2층으로 데려갔다.
산샤를 프라이빗룸에 먼저 들여보내고는 따라온 지배인을 막아섰다.
“수고했다, 루카. 나머지는 내가 할게.”
“예? 직접 상처를요? 전ㅎ…, 아니, 아드리안 경께서요?”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손을 내밀었을 뿐.
지배인은 챙겨온 약상자를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상처를 직접 치료하다니요. 귀하신 분께서 어떻게 그런….”
그러고는 바짝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왜 이러세요. 치료사를 불러오면 되잖아요. 벌써 대기 시켜놨….”
그렇지만 루카는 말을 끝까지 하지도 못했다.
아드리안이 약상자를 뺏고 문을 쾅 닫아버렸으니까.
* * *
방에 먼저 들어간 산샤는 주루룩 무너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아….”
길고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마어마한 하루다.
살해당했다가 회귀하였고, 지금껏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은밀한 방에서 긴장을 풀어 버리면 안 되는데….
이곳은 아래층과는 다른 느낌이라서 금세 편안해졌다.
아델라이드가 우아한 척 가식을 떠는 곳이었다면 이 방에서는 소박한 진심이 느껴졌다.
서재인가?
빙 둘러 책장인데 빈칸이 거의 없을 정도로 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고 창으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앉아서 책 읽기 좋은 안락의자 두 개와 작은 탁자가 가구의 전부.
“사교클럽의 프라이빗룸이 서재라니…. 특이한 사람이네.”
그때 아드리안이 문을 닫고 돌아섰다.
남의 방에서 축 늘어져 있었던 게 머쓱해져서 산샤는 얼른 일어섰다.
“앉아요.”
아드리안이 탁자에 약상자를 내려놓고 산샤를 바라봤다.
“앉아야 치료를 하지.”
아드리안이 약상자를 열어 치료 도구와 약을 꺼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치료사는요?”
“내가 치료사예요.”
“…어떻게요?”
“치료 능력이 있으니까?”
“아….”
멍청한 질문이었다.
“안 앉을 거예요? 서서 해도 상관없긴 한데.”
아드리안이 소매를 걷어 올리는 것을 보며 산샤는 얼른 의자 한쪽에 엉덩이를 걸쳤다.
“…치료사같이는 안 보였는데, 몰랐네요.”
“레이디가 모르는 게, …많죠.”
중얼거리더니 아드리안은 무릎을 꿇고 앉아 산샤의 손을 잡았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너무 컸다.
치료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심장이고 머리고 정신을 못 차리겠다.
산샤는 입을 꽉 다물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아드리안이 드레스 소매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으윽….”
산샤는 입술을 더 꽉 깨물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심했다.
흘러나온 피가 굳어 엉겨 붙어 있었는데, 다시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렀다.
지혈하는 아드리안의 턱이 불끈 움직였다.
그리고 치료하는 소리만 방에 가득 찼다.
한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침묵 끝에 아드리안이 불쑥 말했다.
“귀족에게 상처를 입히면 즉결 처형이에요.”
갑자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던 산샤는 곧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옷을 찢으며 울던 남자가 생각나 버렸다.
“설마…. 그래서 그 채찍 남자가…?”
채찍 남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용서를 구했었다.
그가 이미 죽기라도 한 양 안타까워하던 구경꾼들도 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구나.
그것도 모르고 잘못한 만큼 벌을 받으면 된다고 했으니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죽이겠다는 말로 알아들었겠다.
미안했다.
아니, 화가 났다.
“그따위 법을 만든 건 누구예요?”
“법은 없어요. 귀족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도 아무 일 없었으니까, 죽이는 쪽이나 죽는 쪽이나 당연하게 여기게 된 거지.”
산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디아머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디아머드의 정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노예시장은? 그건 어쩌다가 생긴 거예요? 노예 해방령은 어디 갔어?”
아드리안이 멈칫했다.
작게 한숨도 내쉬었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그걸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겨났죠. 당장 노예가 되면 먹는 건 걱정 없으니까.”
“먹을 게 없어요?”
신분이 미천했던 카이는 황제의 목숨을 구한 공으로 백작에 봉해지고 디아머드를 포함한 북부 지역 일부를 영지로 받았다.
카이는 얼음강의 방향을 바꿔 농사가 가능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마정석 광산을 발견해냈다.
그래서 디아머드는 제국의 어느 곳보다 부유해졌는데, 먹을 게 없어?
라인하르드 제국은 한때 정령의 보호를 받는 마력이 충만한 나라였다.
이젠 마력도 정령도 사라지고 없지만, 그래도 예전의 영화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마도구가 있어서였다.
마도구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력의 정수가 뭉친 마정석이라서, 라인하르드 제국에서 마정석 광산은 부유한 권력과 같은 뜻이었다.
디아머드 백작 가문은 흘러넘치는 부를 영지 백성과 나누었다. 그런데 먹고살기 힘들어 노예가 되었다고?
“그럴 리가 없어요. 마정석 광산이 있잖아요.”
“여황의 문이 열려 있어야 마정석을 채굴할 수 있죠.”
“몇 년 채굴 못 했다고 먹고살 게 없을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미 부자인데….”
“아무리 부자라도, 가지고 있는 걸 다 빼앗아 가면 굶어 죽을 수 있어요.”
“감히 누가 빼앗아요?”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아….”
괜히 물었다.
말해 뭐 하겠나. 후견인으로서 가주 노릇을 하고 있던 모리츠겠지.
정의롭고 자유로운 디아머드를 만드는 데 3백 년이 걸렸는데, 망가트리는 건 7년이면 충분했나 보다.
자신이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다물고 있던 동안 사람 몇이 살해당한 걸로 끝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법도 없는 세상에서 자신을 내다 팔며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자신이 할 수나 있을까.
“하아….”
산샤는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산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말했다.
“하나하나 고쳐 나가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 제자리에 돌아가 있겠죠.”
산샤는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레이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의 말이 옳았다.
자신이 못 한다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니, 한숨 쉬고 있을 새가 없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굴까?
위험에 처한 순간에 딱 맞춰 나타나서, 구해주고 치료해주고 잃어버린 7년을 요약해주더니 적절한 조언까지 한다.
산샤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아드리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드리안입니다. 클라이드의 수호자죠.”
수호자가 무엇인지 안다.
디아머드 백작 가문이 북부 지역을 다스리기 전.
변방 무역을 하는 상인들의 거점 클라이드만 있을 때, 수호자가 그들을 이끌고 보호했다고 배웠다.
수호자는 황제의 권위와 법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움직이는 해결사. 제국의 질서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
수호자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다고 했다.
도전하는 자들 중 하나만 남을 때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던가.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그런 수호자라고?
“수호자의 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피가 묻어 있다고 하던데….”
“그런 것도 아는군요.”
“후계자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아드리안이 웃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천재라고 했던가요?”
“그걸 어떻게….”
산샤는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공부가 지겨워서 자주 도망 다녔다.
그러다가 붙잡히면 큰소리치곤 했었다. 자신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천재라고. 이미 다 알아서 배울 게 없다고.
[…너는 네가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걸 모르잖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지 않아. 나는 모르는 게 없다니까!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는지 몰라? 글라키에스의 현신이라고 한단 말이야. 진정한 디아머드 주인이라고!]
[지금은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 나온 불량 학생이지.]
[바보, 글라키에스가 뭔지도 몰랐으면서.]
산샤는 약이 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가 웃었다.
‘바보’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칭찬인 것처럼 기분 좋게 웃어댔다.
그는 누구였지?
아드리안이 말했다.
“클라이드의 수호자는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레이디가 어떻게 교육받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죠.”
“내가 산샤 디아머드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딱 그렇게 생겼잖아요.”
“내가?”
“거울을 좀 봐요.”
“거울 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데….”
아드리안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산샤를 바라봤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는 게 꺼림칙했는데, 나를 따라온 건 모리츠에게서 숨겨줬기 때문이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특별히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던데.”
산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멀쩡하게 비싼 옷을 입고선 귀족이 어떤 짓을 하는지 몰랐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누가 봐도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산샤 디아머드로 보였겠다.
아드리안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으로 성에서 나왔어요?”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해진 대로 여황의 문을 열고 나면 모리츠에게 살해당하게 될 테니 일단 피해 보자는 생각을 했던가?
“…나와서 생각해 보자는 마음이었나?”
“그럼 차분히 생각할 장소와 시간이 필요하겠군요.”
산샤는 새삼스럽게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이 사람 역시 이상해.
은신처도 마련해 줄 생각인가 봐.
“레이디가 쉴 곳을 마련해….”
“아니에요.”
산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뭘 해야 할지 아니까 도움은 필요 없어요.”
아드리안의 미간에 살짝 금이 갔다. 주변 공기가 싸늘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산샤는 자신의 결심을 당당하게 밝혔다.
“충분히 보고 듣고 느꼈어요. 돌아가서 여황의 문을 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