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헛간 하나 안 보이는 밀밭이다.
마차가 또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이 마차를 놓치면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마차를 타야만 했다.
산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감히 어디라고, 채찍 따위로 나를 밀어내? 네가 그러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아?”
덜컥, 마부가 굳어 버렸다.
한 바퀴 굴려 산샤를 보는 눈동자는 겁에 질렸다.
역시 신분을 앞세운 협박이 통하는군. 산샤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자, 나는 뒤에 앉아 있을 테니까…. 어서 출발하게. 클라이드에 빨리 가고 싶군.”
“아니, 있을 거면 여기….”
마부가 말렸지만, 산샤가 포장을 들춘 게 먼저였다.
사방에서 훤히 보이는 마부석에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헙!
포장을 들춘 산샤는 바짝 긴장했다.
수레 안에는 열서너 살 남짓한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공기가 음울하여 질식할 것 같았다.
뭐 하는 마차인데, 이런 아이들이 타고 있나?
산샤는 한쪽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생존이 달린 탈출을 감행한 처지에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지만, 남매의 분위기는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자꾸 아이들을 힐끔힐끔 훔쳐보게 되었고, 그러다가 누나인 아이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산샤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안녕?”
“어딜 쳐다봐? 눈 깔아라.”
얼른 깔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는데…. 이 아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급스러운 옷차림도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아이인가.
산샤는 숨 쉬는 것도 조심했다.
괜히 한 대 맞으면 뼈도 못 추릴라.
클라이드에 얼른 도착해야지.
이러다가는 모리츠에게 잡히기 전에 숨 막혀 죽겠네.
* * *
드디어 마차는 클라이드 중앙광장에 들어섰다.
마부가 적당한 곳에 마차를 세우고, 포장을 걷었다.
“다 왔습니다. 클라이드 중앙광장….”
마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샤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정말로 숨 막혀 죽을 뻔했다.
계집애 눈초리가 어찌나 매서운지.
입을 크게 벌리고 급하게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뱉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더니 겨우 숨쉬기가 편해졌다.
그러나 다음에 닥쳐온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산샤는 자신이 보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상 앞에 저것들은 뭐지?
클라이드 중앙광장에는 초대 디아머드 백작인 카이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보검 글라키우리를 짚고 근엄하게 영지를 굽어살피는 카이의 동상 앞에 못 보던 단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옷을 거의 입지 않았고 쇠사슬에 줄줄이 엮여 있었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자, 그들은 똑같이 오른쪽으로 돌았고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고 어른도 있고 아이도 있었다.
한 무리가 내려가면 다른 무리가 올라와서 똑같은 행동을 했고, 단상 뒤쪽에는 더 많은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저게 뭐냐?”
산샤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마차에서 내리던 동생이 물었다.
“노예시장, 처음 봐요?”
“노예시장? 디아머드에?”
그럴 리가 없다.
디아머드 백작령에 노예는 없다.
초대 백작 카이가 북부에 들어와서 처음 선포한 것이 ‘노예 해방령’이었는데….
“디아머드에 노예시장이 어떻게 있어?”
“있으니까, 있죠.”
“무슨 대답이 그 모양이냐?”
“질문이 이상하니까요. 있는 걸 왜 있냐고 하면 뭐라고 해요?”
누나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콧방귀를 꼈다.
“흥. 좋은 세상 사는 아가씨가 이런 진짜 세상을 알겠냐?”
동생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네. 좋은 거만 보고 사셨나 보네.”
기가 막혔다.
좋은 세상이라니!
사악한 숙부가 두려워 스스로 고립시키고 황폐하게 살다가 살해까지 당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겠니?
그렇지만 산샤는 그런 걸 따질 정신이 없었다.
철그럭 철그럭.
남매도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은가.
“너희들, …너희들도 노예야?”
산샤의 말에 누나가 또 눈을 부라렸다.
“노예면, 뭐? …눈 깔라고 했지?”
누나가 무지막지하게 위협하는데, 동생이 친절하게 덧붙였다.
“그렇게 놀랄 건 없어요. 하도 여러 번 해봐서 아주 익숙하니까요.”
뭐가 익숙하다는 거야?
쇠사슬이?
노예 생활이?
“디아머드 백성은 다 자유인이잖아. 노예는 금지라니까.”
산샤의 말에 누나가 콧방귀를 뀌며 눈을 부라렸다.
“뭐래니? 눈 깔라니까!”
누나의 말에 산샤는 큰소리로 외쳤다.
“왜 자꾸 눈을 깔라는 거야? 내 눈 내가 뜨는데!”
자유의 땅 디아머드에서 버젓이 노예시장이 열렸는데, 아무리 몇 대 처맞게 되더라도 얌전히 눈을 깔 수는 없잖아!
그러자 누나가 소리쳤다.
“네 눈이든 내 눈이든 나를 보지 말라고오!”
그 순간, 철커덩 소리를 내며 쇠사슬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아이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종이 밧줄만도 못 하게 뒹굴었다.
누나가 사슬에 묶여 있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눈짓을 했고, 동생이 고개를 ‘끄덕’하는가 싶더니!
둘은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산샤는 입을 벌리고 남매가 달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보는 거 말고는 달리할 게 없기도 했지만, 참 신기하고 경이로운 장면이기도 했다.
쇠사슬을 종이 밧줄만도 못 하게 만들다니.
내내 눈 깔라면서 못 보게 했던 게, 쇠사슬을 풀고 있었기 때문인가?
“어어, 이. 이놈, …이놈들!”
쇠사슬을 믿거니 하고, 단상에 정신을 팔려있던 마부가 소리쳤다.
“서라, 거기서! …저것들 좀 잡아 줘! 금화 한 개! 아니, 아니 두 개!”
그때 금화 소리를 들었는지 구경하던 남자가 채찍을 날렸다.
매서운 채찍이 남매에게 향하는데,
“안 돼.”
산샤는 저도 모르게 채찍을 막아 버렸다.
휘리릭, 착!
채찍은 산샤의 팔에 뱀처럼 감겨들었고,
“으악, 레이디가 채찍에 맞았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채찍을 날린 남자가 기겁하며 급하게 채찍을 잡아당기자,
찌이익.
옷이 찢기고 뜨거운 통증이 덮쳐왔다.
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때, 쿵!
채찍 남자가 무릎을 깨버릴 듯 내던졌다.
이게 다 뭐야?
산샤가 멍하니 보고 있는데, 남자가 연거푸 이마를 땅에 박으며 소리쳤다.
“용서를…, 제발 용서를….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닙니다. 상처를 내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채찍을 빨리 치워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남자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산샤는 남자의 피를 보고 더 멍해졌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건 알고 있다.
남매를 잡으려고 했던 거고, 산샤가 끼어들 줄은 당연히 몰랐겠지.
그렇지만 저렇게 피를 흘리면서까지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가.
어쩌라고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엉엉엉.”
갑자기 남자가 소리 내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제발, 레이디! 저에게 자비를! 자비를 내려주십시오.”
자비를 내리라고?
어떻게?
“제가 죽을죄를 짓기는 했지만, 제가 죽으면 제 가족이 모두…. 으흐흑. …철없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줄줄이 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자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그때 구경꾼 중 누군가 탄식했다.
“아이구우, 끝내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을 모양이네.”
“그게 되겠어요? 저렇게 상처를 내놨는데….”
“그러게. 귀한 집 아가씨를….”
“채찍을 휘두르고 다닐 때부터 꺼림칙하더라니….”
에잉. 쯔쯔. 구경꾼들이 혀를 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구경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데 남자는 더 크게 울어대며 이마를 찧어대는 통에 산샤의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으음…. 저어기….”
남자가 모든 행동을 딱 멈췄다.
잔뜩 기대하는 그의 눈빛에 압박을 느끼며 산샤는 말했다.
“…네가 잘못한 만큼만 벌을 받으면 될 텐데, 왜 지레 수선을 떨지? 이렇게 요란 떨 일인가?”
“으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산샤는 반사적으로 두어 발 물러났다.
뭐라고 했다고, 비명을 질러?
그렇지만 비명이 다가 아니었다.
남자가 제 옷을 발기발기 찢으며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냐, 그만두지 못해!”
산샤가 소리치자 희번덕 눈이 돌아간 남자가 외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어차피 죽을 목숨. 너를 먼저 죽여 없애 버리겠다.”
“뭐?”
무슨 말인지 미처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남자는 벌떡 일어서 벌써 달려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서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이럴 게 아니라, 치료사를 먼저 불러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보다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큰 키였는데, 등을 곧게 편 바른 자세는 당당하고 위엄 있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듯한 백색의 금발은 눈이 부셔 태양을 마주 보는 듯했고, 짙은 남색의 눈동자는 달빛을 머금은 밤하늘처럼 빛났다.
낮과 밤을 모두 가진 남자라니.
“클라이드의 수호자!”
“수호자께서 아는 아가씨였어요? 그럼 그렇다고 진작에 말씀하시지.”
“아이구우, 꼭 보도 듣도 못한 아가씨들만 모셔와.”
구경꾼들이 그를 반기며 앞다퉈 말을 걸었다.
그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들 길 좀 비켜 주겠어? 저 아가씨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경꾼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고, 그가 산샤를 향해 걸어왔다.
산샤의 심장이 격하게 두근거렸다.
멀쩡한 심장이 왜?
마치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그리움이 뭉클뭉클 솟아나도 되는 거야?
남자가 앞에 섰다.
산샤는 멍하니 물었다.
“누구…세요?”
모양 좋은 입술이 살짝 휘더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드리안입니다.”
이름이 아드리안이군요. 그리고요?
그러나 아드리안은 이름을 말한 것으로 자신을 다 소개했다는 듯이, 그대로 산샤의 손목을 잡았다.
“으윽!”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무엄하다고 호통을 쳐야 했지만, 너무 아파서 그럴 수가 없었다.
팔이 엉망이었다.
채찍을 한 번 맞았을 뿐인데 퉁퉁 부어오른 건 물론이고. 터져서 피가 흐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도 있었다.
“…이 지경인데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턱이 불끈 움직인 건 어금니를 사리물어서인가?
자신의 팔이 분명한데도 그가 더 아파하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어 산샤의 눈을 들여다봤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요?”
“에, …에?”
“여기에선 상처를 치료할 수 없어. 같이 가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따라나설 수는 없어요.”
그때 갑자기 아드리안이 산샤를 끌어안아 품 안에 가뒀다.
“쉬잇, 이대로 가만히. 잠깐만 이대로 있어요.”
그러면서 슬쩍 몸을 틀어 보이는데, 모리츠였다.
모리츠에게서 숨겨준 거야?
산샤는 아드리안의 품에 얼굴을 숨기며 생각했다.
삼나무 향이 나.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