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방에 갇혀 버렸다.
아가씨가 말을 한다고 소리 소리를 지르더니, 아니타가 문을 잠그고 가 버렸다.
정신없이 수선을 떤 건 이해가 된다.
얼마나 놀랐을까. 산샤 디아머드가 말을 했으니….
갖은 치료를 받으면서 어떠한 효과도 없었는데 아주 쉽게 해 버렸잖아. 어제 말하고 오늘 말하는 것처럼.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꼼짝 말고 있어요. 자작님을 모셔올 테니까. 이건 악마의 장난이 분명하다고요!]
악마의 장난이라고 할 만했다.
누구보다 산샤 자신이 제일 놀랐으니까.
말을 안 한 건 자신의 의지였지만, 성대가 굳어 버린 다음에는 하고 싶어도 못 했었다.
그런데 해 버렸어. 굳었던 성대가 찢어져 피를 토하다 죽을 거랬는데….
역시 꿈이 아니었어.
얼음강 절벽에서 온몸을 적실만큼 피를 토했기 때문에, 이번엔 피 한 방울 안 보이고 말하게 되었으리라.
한밤에 끌려 나가 얼음강 절벽에서 살해당한 건 실제 있었던 일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여황의 문을 열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제국 각지에서 온 귀족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문을 열어 계승자로서 자격을 증명했다.
귀족들은 열광했고 모리츠는 비릿하게 웃었다.
소름이 끼치는 그의 얼굴을 외면하면서 산샤는 스무 살이 된 것과 여황의 문을 연 것을 기뻐했다.
대연회만 치러내면 모리츠를 쫓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연회는 열어보지도 못하고 살해당했었다.
돌아왔구나!
자신이 죽기 전으로 돌아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악행을 저지른 자가 마땅한 벌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에 답을 받았다.
모리츠의 악행에 합당한 벌을 내리러 온 것이다.
“용서할 수 없어.”
누구보다 용서할 수 없는 건 산샤 디아머드 바로 자신이었다.
모리츠의 오러, 그깟 것 좀 보이는 게 뭐 어떻다고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했을까.
스무 살까지만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스무 살이 되었기 때문에 죽었다.
창피할 정도로 구차한 삶이었다.
[천벌이 그렇게 쉽겠니? 하늘은 나한테 관심 없어. 물론 너한테도 관심 없고.]
모리츠는 그렇게 이죽거렸지만.
“당신이 틀렸어. 하늘은 당신에게 아주 관심이 많아. 그 증거가 바로 나야.”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다.
진실을 알았고 살아 있다.
“각오해, 모리츠 디아머드! 천벌을 받게 해줄게.”
* * *
“어서요, 어서. 빨리 좀 오시라고요. 자작님!”
아니타가 소리를 지르는 통에 느긋하게 따라가던 모리츠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례하고 예의를 모르는 계집이라 산샤의 하녀로 안성맞춤이라 생각했었다.
산샤가 하녀에게 구박당하는 걸 보는 재미가 은근히 괜찮았다.
그랬는데 이 계집은 산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예의가 없다.
“아가씨가 말을 한다니까요. ‘저리 치워’ 했다고요. 어서 가서 보셔야죠.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저거 말하는 거 봐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주둥이를 날려 버리고 싶지만, 산샤를 죽여 없애기 전까지는 자애로운 숙부의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니까, 일단 참자.
산샤만 처리하고 나면 저 계집부터 없애 버려야지.
모리츠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알았다고 하지 않니. 어련히 따라가지 않을까. 그렇게 수선을 떨어야겠니?”
“수선이라니요. 아가씨가 말을 하는데요. 자작님이 이렇게 느려터진 분인 줄 정말 예전에 몰랐습니다.”
모리츠는 끄응 신음했다.
참자. 참아. 얼마 안 남았다.
“알았으니까. 어서 문이나 열어.”
“옙, 자작님!”
아니타가 복도를 달려오는 내내 흔들고 있던 열쇠를 확 꽂았다.
왈칵!
문이 열리자 아니타가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이것 봐요, 아가씨. 말해 봐요. 여기 자작님을 모셔…. 어?”
아니타가 입을 떡 벌린 채로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대로 모리츠를 돌아봤다.
“아가씨가 어디 갔죠? …아가씨가 안 보여요.”
“문을 잠갔다면서?”
“잠갔죠. 열쇠로 열고 들어오는 거 자작님도 보셨잖아요. …머리를 절반만 땋다 말았는데…. 그 꼴을 하고 어딜 간 거야?”
“그런데 없다고?”
아니타를 밀어서 치워버리고 방으로 들어선 모리츠는 활짝 열린 창문부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창문은 왜 열어놨어?”
“…몰라요. 제가 안 열었어요.”
모리츠는 호다닥 창문에 붙어 밖을 살폈다.
아니타도 그 옆에 서서 혼잣말인지 무엇인지 모호하게 중얼거렸다.
“나무 봐라. 완전, 이건 뭐…. 가지를 이래, 이래, 밟으면 내려갈 수도 있겠네요.”
끄응 모리츠가 앓는 소리를 내며 노려보자, 아니타는 손사래를 치고 나섰다.
“설마 저기로 뛰어내렸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에이, 여기가 2층이어도 웬만한 4층 높이는 되는데….”
“닥쳐라.”
모리츠가 으르렁거렸지만 아니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생각 좀 해보세요, 자작님. 아가씨 집이 여긴데, 뭐 한다고 창문으로 뛰어내리겠어요?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할 이유가….”
“ 입 닥치라고 했다!”
모리츠는 후두둑 커튼을 뜯어버렸다.
“산샤, 그 계집애 하나 제대로 감시를 못 하고, 그걸 놓쳐?”
자애롭고 너그러운 가면을 쓰고 있을 여유가 더는 없었다.
솟구치는 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꽃병이며 찻잔이며 잡히는 대로 내던지고 소리를 질러댔다.
“당장 여황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 계집애가 없으면 어떻게 해? …네가 하는 일이 달랑 하나, 그 계집애 감시인데…!”
아니타는 눈만 떴다 감았다 할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꼴에 속이 터져서 모리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대답을 안 해?”
“…입을 다물라고 하셔서….”
“이런 천하에 써먹을 데 없는 쓰레기! 하찮은 것! 으아아악!”
모리츠는 걸리는 대로 걷어차다가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지르고, 그대로 뛰어 나가 버렸다.
거친 발소리가 디아머드 성을 집어삼킬 듯 울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타는 긴 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훔쳐냈다.
“거, 참. 요란스럽게도….”
방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발라당 뒤집힌 탁자를 바로 세워보려는데, 다리 하나가 어긋나서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다.
에잇! 아니타도 탁자를 팽개쳐버렸다.
“어지르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년 따로 있는 거야 뭐야.”
한쪽 끝만 붙어서 너덜너덜한 커튼을 홱 잡아 뜯으면서 헛웃음을 쳤고, 창문 밖을 내다보고는 콧방귀를 꼈다.
“아가씨가 저 나무를 밟고 내려갔을 거라고?”
흥,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정신이야? 자기 조카를 몰라도 그렇게 몰라? 아가씨가 겁이 얼마나 많은데, …그나저나 이 아가씨가 어디 갔어, 진짜. 에이. 씨. 바빠 죽겠는데….”
그렇게 아니타도 나가고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삐이걱.
옷장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빼꼼히 밖을 내다보는 것은 산샤였다.
아니타 말이 백번 옳았다.
이 집은 자신의 집인데, 왜 창문으로 뛰어내리겠나, 위험하게.
게다가 얼음강으로 던져졌던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높은 곳은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모리츠에게 떠밀려 여황의 문을 열러 갈 수는 없었다.
여황의 문을 열고 나면 이용 가치가 없어져서 당장 죽이려 들 테니까.
어딘가로 도망가 있어야 했는데 당장 성에서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모리츠에게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는 급하고 경솔한 사람이니까 창문이 활짝 열린 걸 보면, 다른 곳은 찾아볼 생각도 못 할 것 같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렇지만 방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을 줄은 몰랐네.
탁자는 뒤집히고 이불과 시트는 바닥에 나뒹굴고 커튼은 찢어졌다.
창문도 약간 어긋난 것 같은데?
산샤는 창문부터 조심스럽게 닫았다.
되도록 밑은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 * *
산샤는 디아머드 성이라면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나 자랐고 자신의 놀이터였으니까.
그렇지만 성을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길을 전혀 몰랐다. 백작 가문 영애가 마차와 수행원 없이 밖에 나다닐 일이 얼마나 있겠나.
산샤는 백작 성의 은밀한 비상구 앞에 서서 양쪽으로 쭉 뻗은 길을 바라보았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확실했다.
북부의 번화가 클라이드.
디아머드 백작 가가 북부를 다스리기 전부터 변방 무역의 중심지였으니 외지인도 많고, 그래서 숨어있을 곳도 많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오른쪽?
왼쪽?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저 쭉 뻗어있는 길인데….
산샤는 동전을 던지는 심정으로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게 낫겠지.
* * *
열심히 걸었다.
풍경은 점점 한산해졌다.
띄엄띄엄 있던 농가마저 보이지 않고 누렇게 익은 밀밭만 이어졌다.
아무래도 클라이드 가는 길은 아닌 것 같고.
더웠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발도 아팠다.
이렇게 많이 걸어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칭얼거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칭얼거린다고 들어줄 사람도 없고, 이런 계절에도 뼛속까지 얼어붙게 하는 얼음강을 생각해야지.
아, 그렇지만!
정말 너무너무 힘들다!
더는 못 가겠다.
산샤는 멈춰 버렸다.
꾹 다문 입술을 비집고 흐느낌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포장이 처진 수레에 산샤가 앉을 자리쯤은 충분할 것 같았다.
산샤는 냅다 길 중간으로 달려 나갔다.
“멈춰라!”
히이잉!
말과 마부가 동시에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야! 어떤 놈의 시끼….”
소리를 지르던 마부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귀한 집 딸, 말을 함부로 했다가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 같았겠지.
“어디 가는 마차인가?”
“…클라이드에 갑니다마는.”
“아, 잘됐네. 마부, 나를 태워주게.”
허락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타겠다고 했으니 타면 그만.
산샤는 벌써 마차에 발을 하나 걸쳐 올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뭐 하긴, 타려는 거지.”
“타다니요, 이걸, 여길, 타겠다는 거…, 겁니까?”
“응. …산책하던 중에 너무 멀리 나왔어. 오랜만에 걸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이 마차를 좀 타야겠네.”
“안 됩니다!”
이렇게 단호한 대답이라니.
여전히 한 발과 한 손이 어정쩡하게 걸쳐져 있는 상태로 산샤는 물었다.
“왜 안 돼?”
“이 마차는 산책하던 귀한 집 레이디가 타고…, 그런 마차가 아닙니다. 댁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직접 모시러 오라고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 손 놓으시고….”
댁을 어떻게 말씀해줘.
그 댁에서 도망쳐 나오는 중인데.
꼼짝도 하지 않는 산샤와 눈이 마주치자, 마부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채찍 끝으로 조심스럽게 산샤의 발을 밀었다.
발이 툭, 밑으로 떨어졌다.
그 발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살살살 손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떨어트려 놓고 가버리겠다는 건가?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산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