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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천벌을 좋아해-1화 (1/97)

1화

얼음강 절벽에 광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얼음강.

영지를 관통하여 흐르며 농사지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강이지만, 빠지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했다.

북부를 다스리는 신,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의 궁전으로 끌려간다든가.

저 강에 빠트리려고?

기어이 죽이겠다는 거야?

산샤 디아머드는 여기까지 끌고 온 사람을 노려봤다.

숙부인 모리츠 자작,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 후견인으로 디아머드 백작 가를 운영해오던 사람이었다.

처음 본 순간에 이렇게 될 걸 알았는지도 모른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오는 무시무시한 검은 오러가 얼마나 끔찍했던지…. 그의 오러는 기괴하게 뒤틀렸고 한없이 어두웠으며 적의로 똘똘 뭉쳐 있었다.

산샤는 너무나 무서워서 보이지 않는 척했다. 모리츠와 대화하기 싫어서 들리지 않은 척도 했다가, 끝내 입을 닫아 버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모리츠는 훌륭한 숙부로 보이기 위해서인지 산샤의 상태를 소문내기 위해서인지, 제국의 치료사라는 치료사는 다 불러들였다.

그러나 치료는 고사하고 원인도 밝혀내지 못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원인이 있을 게 뭔가.

그러면서 치료사들은 입을 모아 산샤가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성대가 굳어버려서 억지로 소리를 내면 피를 토하다가 죽을 거라나. 이대로는 사람 구실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고도 했다.

디아머드 상속녀가 백치가 되었다는 소문은 널리 퍼졌고, 디아머드 백작 가는 모리츠 것이 되었다고 했다.

그때 산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견디는 것밖에는.

스무 살이 되면 후견인은 필요 없어지니까 그때 모리츠를 몰아내면 된다고. 그때가 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믿으며 버텼다.

그렇게 7년.

마침내.

드디어!

스무 살이 되었다.

자신의 것을 되찾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산샤는 정해진 대로 얼음여황 글라키에스 신전에서 ‘여황의 문’을 열었다.

[글라키에스가 인정하는 자는 문을 열 것이오, 자격 없는 자는 얼음덩어리가 되어 죽으리라.]

디아머드 백작 가문을 계승할 자격을 증명한 것이다.

이제 대연회를 열어 만방에 가문을 계승했음을 선언하고 평생 반려를 발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산샤는 완벽한 디아머드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리츠가 여황의 문을 연 밤에 침실에 난입하였고, 막무가내로 끌려와 선 곳이 바로 여기, 얼음강 절벽이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하다니….

그동안 버텨온 게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

“히야아!”

모리츠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드디어 네 얼굴에서 표정을 보는구나. 그동안 도자기 인형 같은 게 참 거슬렸는데 말이야. 볼 때마다 와장창 깨트리고 싶었지.”

“…….”

“평소에도 그래 보지 그랬니. 애교라도 살살 부렸으면 흐물흐물 녹아서 백작 가 재산 따위 아무려면 어떠냐 했을지도 모르잖아.”

가증스러운 인간.

행여나 그랬겠다.

일관되게 죽이고 뺏을 생각만 했으면서!

“그래그래 안다. 애교부리는 게 쉬운 게 아니지. …그러면 나를 쫓아내지 그랬니. 너한테는 그럴 힘이 충분했는데 말이다.”

대답 못 할 거라고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하는구나.

무슨 힘이 있었다는 거야?

상속도 할 수 없는 열세 살짜리한테.

“그때는 집사, 하녀장, 하다못해 정원사까지. 네가 싫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내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쳤을걸. 너는 후견인을 거부할 수 있었단 말이지.”

후견인을 거부할 수 있었다고?

누구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는데?

“네가 입을 다물고 누구와도 소통하려고 하지 않으니, …그것들도 난감했겠지.”

모리츠가 샐쭉 입을 비틀며 웃었다.

“덕분에 그것들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모리츠가 강물을 슬쩍 내려다봤다.

“그것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네 걱정만 하더구나. 제 영혼이 얼어붙은 건 안중에도 없었어. 아! 과연 충신이구나 싶더라만. …충신일수록 죽어줘야지 않겠니?”

산샤는 더 키울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눈을 뜨고 강을 내려다봤다.

집사와 하녀장을 저 강에 밀어 죽였어?

“네가 지금처럼만 눈 똑바로 뜨고 있었으면 그것들은 살아 있을 수 있었을 텐데…. 너는 이것들에 질려서 눈을 감아버렸지? 이 오러 말이야.”

오러를 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그래, 그래. 나는 다 알고 있었지. 누구보다 너부터 죽이고 싶었는데, 여황의 문을 열어야 하니까 그럴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러니 어째야겠니. 미치게 만들어야지.”

모리츠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이 좋았지? …그러니까 너도 뭘 좀, 주는 대로 받아먹고 그러지 말았어야지.”

못 본 척, 못 듣는 척,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겨우 숨만 쉬고 살았던 게 스스로 한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 모리츠 계략에 빠졌기 때문이라니.

어리석게도 모리츠가 디아머드 백작 가를 차지하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어.

충신들이 다 죽어 나가는 것도 모르고….

“너도 이제 그것들하고 같이 저 밑에 얼어붙겠구나. 너도 알지? 얼음강에 빠져 죽은 영혼은 천국에도 못 가는 거. …으으으, 끔찍해라. 그러게, 너도 그때 같이 죽었으면 좀 좋아?”

모리츠가 바짝 다가와서 물었다.

“그 마차에는 왜 안 탔어? 그때 너희 전부 타기로 한 거 아니었어? 가족여행이었잖아.”

덜컥.

심장이 멎어버린 것 같았다.

부모님까지 네가 죽였어?

“그래. 내가 죽였다. 내가 마차를 확 뒤집어 버렸지. 글라키에스가 선택해주는 계승자가 못 될 바엔 뺏어오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으으으….”

산샤의 입술 사이로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모리츠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휘파람을 불었다.

“야! 너 드디어 소리를 내는구나. 그래, 그래야지. 가지려면 움직여야 한단 말이야. 너를 봐.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으아아악…!”

산샤는 소리를 질렀다.

굳었던 성대가 찢어지고 울컥, 피가 솟구쳤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쿨럭쿨럭 솟아나는 피가 온몸을 적셔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충신들이 살해당하는 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가.

살아도 산 게 아니게, 의미 없는 목숨이나 부지하고 있었다.

산샤는 외쳤다.

“천벌을 받을 거야. 모리츠 디아머드.”

“어허! 조카님. 겨우 입을 열어서 한다는 소리가….”

모리츠가 크크크 소리 죽여 웃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벌이 그렇게 쉽겠니? …피를 토하는 심정은 알겠는데….”

손목 묶은 것을 더 바짝 조이며,

“하늘은 나한테 관심 없어. 물론 너한테도 관심 없고….”

모리츠의 등 뒤에 너울너울 춤을 추던 암흑의 오러가 폭발하여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이제 모두 끝이야.”

풍덩!

산샤의 마지막 비명은 강물에 삼켜져 버렸다.

죽고 싶지 않아.

이렇게 끝낼 게 아니었어.

이러려고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다물었던 게 아니야.

산샤는 몸부림쳤다.

그러나 손목을 묶은 줄은 더욱 옥죄였고, 얼어붙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이렇게 끝내지는 않으리라.

산샤는 마지막 숨이 얼어붙기 전 간절하게 기원했다.

[북부를 다스리는 신, 얼음여황 글라키에스여!

능력을 보여라.

악행을 저지른 자가 마땅한 벌을 받도록.]

* * *

“헉!”

자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자신을 보고 있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보는데…, 탁!

막혔다.

거울?

“아가씨?”

누군가 자신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악!”

저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꺄악!”

상대도 비명을 질렀다.

하녀 아니타였다.

거울 속의 자신은 계승식을 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창밖에는 아침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계승식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구나.

안 죽었어.

꿈을 꾸고 있었나 봐.

그때 아니타가 거울과 자신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아가씨! …방금 소리 내신 거 맞죠? 방금 ‘아악’ 하셨죠? 그렇죠?”

그랬나?

“그, 뭐드라. 그게 굳어서 소리를 내면 피를 토할 거라더니……. 피 났어요? 났어?”

아니타가 손가락을 집어넣을 기세로 덤벼들었다.

산샤는 급하게 손바닥을 쫙 펴서 얼굴을 밀어냈다.

찹! 차진 소리에 눈과 코와 입이 하나로 뭉개지자 아니타가 볼멘소리를 질렀다.

“아니이, 드럽게……. 에퉤퉤.”

감히 주인 앞에서 침을 뱉다니!

그렇지만 아니타니까.

아니타는 언제나 이랬다.

‘아가씨’라고 부르기만 할 뿐 무례했다.

아니타에게는 모리츠가 디아머드 백작 가문의 주인이고, 산샤는 불쌍한 고아 조카일 뿐이니 당연한 반응인지도 몰랐다.

유모가 필요 없는 나이가 되었다면서 자작이 직접 데려온 하녀니까.

유모도 얼음강에 밀어 버렸을까?

아니!

아니다.

산샤는 머리를 흔들었다.

유모는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얼음강에서 일은 그저 나쁜 꿈이었어.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산샤를 보며 아니타가 구시렁거렸다.

“그럼 그렇지. 소리를 내긴 무슨 소리를 냈겠어. 아악이 뭐야 아악이. 내가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네. …아이구 참! 내 정신 보게. 차 마실 시간이네. …잠깐만 기다려 봐요. 내가 휭하니 달려가서 가져올게.”

아니타는 혼자 떠들다가 갑자기 수선을 떨더니 달려가 버렸다.

머리는 절반을 땋다 말아서 우스꽝스러운데 굳이 지금 차를 가지러 가?

그러고 보니 오전 차를 마실 시간이기는 했다.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 차를 마시는 건 모리츠가 만든 규칙이었다.

어찌나 강박적으로 차 마시는 걸 챙기는지….

[그러니까 너도 뭘 좀, 주는 대로 받아먹고 그러지 말았어야지.]

차에 약을 탔던 건가?

그래서 헛것이 보였고 그것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그러면….

얼음강 절벽에서 일은 꿈이 아닌가?

아니타는 아름다운 티세트 은쟁반을 들고 금방 돌아왔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아가씨, 자리에 앉아요. 어서.”

산샤는 슬쩍 물러섰다.

“뭐 해요? 이리 오라니까….”

안 먹어.

고개를 저었지만, 아니타는 본 척도 않고 그대로 끌어당겨 앉히더니 찻잔을 코앞에 들이밀었다.

“마셔요.”

안 먹을 거라고.

안 먹는다니까.

산샤는 입술을 꽉 다물고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이 아가씨가 왜 이런대?”

아니타가 이번에는 찻잔을 내려놓고 포크로 티케이크를 떴다.

“…그럼 이거라도 먹어요.”

말하는 동시에 쑥, 입에 밀어 넣었다.

사르르 녹는 티케이크에서 달짝지근한 쓴맛이 났다.

먹을 때마다 낯선 맛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거였구나.

이것 때문이었나 봐.

산샤는 망설이지 않고 뱉어 버렸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안 먹는다고! 저리 치워!”

순간 아니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떠억 벌렸다.

“아가씨, 말했죠? 방금 말한 거 맞죠? 이번에는 내가 확실히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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