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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115화 (완결) (11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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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방청석, 정숙하세요.”

작지 않은 크기의 법정이 제법 소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막판까지도 원고와 피고 둘 사이의 양육권 다툼이 치열했던 케이스였다. 양가 집안의 친인척들과 지인들이 잔뜩, 두 사람의 이혼 판결을 방청하겠다 몰려온 것이었다.

“20** 르 10253, 원고 김신혜와 피고 박준우, 이혼 및 재산분할 청구 사건 판결하겠습니다.”

판사의 말에 원고 김신애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자, 옆에 선 현서가 그녀의 손을 슬며시 맞잡았다.

“주문.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피고는 원고에게 위자료로 금 50,000,000원을 지급하고 재산분할로 금 550,000,000원을 지급한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이어질 판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거였다.

“또한, 사건 본인의 친권자 및 양육자로 원고를 지정한다.”

일순 곳곳에서 탄식과 환호가 터졌다. 현서와 손을 맞잡고 있던 원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얼싸안았다.

방청석 가장 끝자리. 느긋이 기대어 앉아 재판 내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남자의 입매가 길게 말려 올랐다.

의뢰인과 승소의 기쁨을 나누는 말간 얼굴에 동그란 웃음이 방울방울 맺혔다. 하얗게 부서지고 흩어진 빛의 가루가 그녀 주변으로만 떨어져 빛나는 것만 같았다. 눈이 부시게.

***

“날씨가 미쳤네. 4월에 눈이라니.”

법원 입구를 나서며 솔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탄식했다. 어느새 4월. 이제 막 봄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계절이었으나 아침부터 심상치 않던 하늘에선 솜뭉치 같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솔은 아무래도 올겨울에 평생 봐야 할 눈을 다 본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와, 이러다 주말에도 눈 오는 거 아니야?”

드디어 주말, 결혼식을 앞둔 솔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원망하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 오는 날 결혼하면 부자 된대.”

그런 솔이를 쓰윽, 스쳐 지나며 현서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눈빛을 바꾼 솔이 ‘정말요?’ 하고 되물으며 그녀의 뒤를 바쁘게 쫓았다.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솔이의 반응에 피식, 절로 터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눈꼬리를 휘는데 그 순간. 코끝에 스치는 익숙한 향수 냄새에 홀린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혁 씨?”

분명 내일 오후에나 돌아올 거라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현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내일부터 저 휴가인 건 아시죠? 오늘도 이만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솔이는 이때다 싶었는지 통보하듯 말하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현서는 멍하니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고 그를 올려다봤다. 타박타박, 다가오는 얼굴이 꼭 끌로 깎아 빚은 조각처럼 비현실적이어서. 무표정일 땐 서늘하기만 한 남자의 얼굴이 오롯이 저를 향해 허물어지듯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게….

“침 떨어지겠다.”

어느새 바짝 다가선 그가 손가락으로 슬쩍 벌어진 그녀의 아랫입술을 톡, 두드리며 말했다.

“언제 왔어요? 일 늦어져서 내일 온다더니.”

“세 시간쯤 전에? 일이야 뭐, 늘 그렇듯이 완벽하게 끝내고 왔고.”

슬쩍,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그가 능청을 떨었다.

“뭐야. 연락을 하죠. 그랬음 좀 서둘러서 정리하고 나오는 거였는데.”

“어. 너 그럴까 봐.”

“혼자 왔어요? 레오는?”

“당신 만나러 오는데 그 혹을 왜 달고 와. 공항에서 바로 내쫓았지.”

“그나마 양심은 있었네요.”

“누가. 레오가?”

현서의 입꼬리에 픽, 말간 미소가 걸렸다. 붉은 입술 새로 하얀 입김이 몽그르르, 퍼져 나갔다.

“좀 걸을까? 눈 오는데.”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현서는 대답 대신 얼른 그에게 매달리듯 팔짱을 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싼 남자가 보폭을 느릿하게 맞춰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시간이나 어디서 기다렸어요?”

“당신 일하는 거 구경했어.”

“방청석에 있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며 묻는 그녀의 강아지 같은 얼굴이 귀여워 정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더라. 잠깐 잊고 있었던 것도 생각났고.”

“잊고 있던 거? 뭐요?”

“당신 일할 때 섹시해지는 거.”

퍽 그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허, 어떤 포인트에서요?”

“세상 청순한 얼굴로 상대 변호사한테 한마디도 안 질 때. 서류 넘기면서 입술 씹을 때. 개같은 소리 들을 때마다 머리카락 넘기는 거. 하나라도 안 놓치겠다고 가져온 자료 들고 눈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릴 때, 등등?”

결국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순간, 모든 포인트에서 꼴렸단 소리였다.

“역시 내 여자답게 잘났고 예쁘구나. 뭐 이런 감상.”

이 능글맞은 남자를 진짜. 현서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법원을 나서며 이어지는 긴 보행자 도로엔 커다란 벚꽃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제 막 하얀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꽃망울 위로 하얀 눈발이 송골송골 내려 맺히고 있었다.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묘하게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눈 내리는 거 좋긴 한데, 올해 진짜 눈이 많이 오긴 오는 것 같아요.”

현서는 쏟아지는 눈발을 올려다보며 작게 읊조렸다.

“진짜 주말까지 눈 오는 거 아닌가 몰라. 아참, 돌아가는 비행기는 언제예요? 주말에 솔이 결혼식 같이 갈 수 있어요?”

“글쎄. 미셸이 회의 끝나는 대로 연락 주기로 했으니 상황 들어봐야겠지.”

그렇구나.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다시 앞을 보는 그녀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 포개졌다. 그의 손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손을 제 코트 안으로 이끈 거였다. 겹쳐진 손바닥에서부터 손가락 사이사이로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어둑해진 거리에 담벼락을 타고 하나둘,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 속을 지나 한적한 거리의 끄트머리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뀐 눈송이가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예쁘긴 하네요. 꽃이랑 눈이랑 같이 날리니깐.”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정혁이 문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자연스럽게 그를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진지하고도 뜨거운 열기가 서려 있음을 느낀 거였다.

현서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돌연 그가 주머니 속에서 맞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그대로 감싸 쥔 채 손을 빼냈다. 그러곤 반대편 코트 속에서 또 다른 손으로 꺼내든 무언가를 그녀의 약지에 천천히 끼워 넣는 거였다. 반지였다.

“이게, 뭐….”

그의 손끝이 반짝이는 링을 완전히 밀어 넣고는 하얀 손가락을 쓰다듬듯 천천히 스치고 지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이즈의 반지가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틈도 없이 딱 맞아 끼워졌다.

“뭐예요, 이게?”

현서는 여전히 자신의 손을 소중하게 감싸 쥐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새로운 족쇄.”

커다란 자신의 손안에 가지런히 올려진 그녀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느른히 답한 그가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끌어 올렸다.

“예쁘게 잘 맞네.”

“갑자기, 웬… 반지예요?”

“갑자기 아니고. 당신 다시 만났을 때부터 주문해 놨던 거야. 세상에 딱, 두 점밖에 없는.”

또 ‘두’ 점이라는 말에 의아함을 품은 동공이 동그랗게 부푸는 찰나, 그가 제 왼쪽 손등을 슬며시 돌려 보였다. 길고 수려한 남자의 네 번째 손가락에도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반짝였다.

“커플링이에요, 이거?”

“일단은.”

짙은 눈동자를 깊게 깜빡이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했다.

“곧 웨딩 링으로 바꿔 끼워 줄 계획이 있어서.”

웨딩 링이라니. 결혼을 하자는 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그의 이야기에 현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지금…. 혹시 서정혁 씨 나한테 프러포즈해요?”

“아니. 프러포즈는 아직 안 했는데.”

“곧 하겠단 소리잖아요. 그게 그 말이지.”

“날 길바닥에서 프러포즈나 하는 개념 없는 새끼로 만들고 싶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현서의 표정에 느긋하던 그의 얼굴이 돌연 차갑게 굳었다.

“표정은 왜 그런데.”

“결혼, 이라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말에 윤솔 씨 부케 받기로 했다며. 너 나랑 결혼하려고 그 부케 받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건 너무 확대 해석인데요.”

“뭐지, 이 반응은? 프러포즈하겠다고 예고하는 남자한테 대놓고 기가 막히다는 이 반응?”

“기막히단 게 아니라, 서정혁 씨가 너무 훅 치고 들어오니까.”

“그래서. 싫어? 거절하겠다고?”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닌데…. 하…. 지금 대답해야 해요? 지금은 프러포즈한 거 아니라면서요.”

이미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한 번도 꿈꿔 보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너무 가깝게 다가온 꿈 같은 미래에 눈시울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졌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떨리고, 또 너무 떨렸다. 감당할 수 없을 감정이 전신을 뒤흔드는 기분이라.

“허.”

정혁의 잇새에서 다소 기막힌 헛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꼭 잡고 있는 제 손은 조금도 놓아주질 않고 있는 그의 체온에 가슴이 저릿저릿 뜨거웠다.

“왜 울어? 프러포즈 받은 것도 아닌데.”

“왜 화내요? 프러포즈 거절당한 것도 아니면서.”

기어코 맺혀 있던 눈물방울들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이 여자 미치겠네, 진짜.”

결국,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터져 버린 남자가 엉망으로 울먹거리는 현서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익숙하고도 따스한 그의 체향에 푹,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솔직히 말해 봐. 너 나 말려 죽이는 게 최종 미션이지. 누구 지령이야?”

“갑자기 이런 얘기 하는 게 어딨어요. 나 심장 떨린단 말이에요.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반지를 낀 손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리듯 투정했다.

“무슨 준비가 필요한데. 본인 감정을 몰라? 차현서 당신 나 감당 못 하게 사랑하잖아.”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떨린다고요, 서정혁 씨 감당 못 하게 사랑하니까….”

“뭐?”

정혁은 제 품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그녀의 말을 되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가 물기가 잔뜩 어린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사랑해요. 당신 말대로 감당 못 할 만큼 서정혁 씨 사랑해요. 이런 얘기만 들어도 이렇게 심장이 터져 죽겠는데 거절은 무슨, 내가 거절을 어떻게 해요. 당신을.”

기어코 정혁의 입꼬리에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막 이렇게 나타나서 걷다가 반지 막 끼워 주고. 결혼 얘기까지 꺼내서 사람 심장 터지게. 한 번에 하나씩만 하든가. 자기가 심장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지 알면 이렇게 못 한다고, 진짜.”

이게 무슨 새로운 개념의 원망인 건지. 정혁은 그 귀여운 투정을 들으며 젖은 뺨을 손가락으로 훔쳐 닦았다.

“그래. 내가 잘못했네. 내가 당신 심장을 미처 고려 못 하고 예고도 없이 폭격을 했다.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할게.”

결국 제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는 남자를 올려다보는 현서의 잇새에도 웃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발갛게 익은 코끝과 눈꺼풀, 그리고 두 뺨 위로 하얀 눈송이가, 그리고 꽃잎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시선을 온전히 빼앗긴 그가 까만 테두리가 선명한 동공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녀의 떨림 하나, 숨결 하나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제 눈에 다 새겨 넣으려는 듯이.

“근데, 심장에 해로운 걸로 따지면 너도 못지않아요.”

낮은 음성으로 속삭인 그가 그녀의 동그란 이마 위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누가 봐도 내가 널 더 사랑하는데. 아니야?”

더없이 로맨틱한 남자의 고백을 듣는 여자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서로만을 오롯이 담은 눈동자가 맞물렸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뛰기 시작한 심장의 박동은 서로에게 전이되듯 넓은 파동으로 퍼져 나갔다.

지독히 현실감 없는 동화 속 풍경 같았다. 형언할 수 없이 요요하고, 아름답고, 황홀한.

이 소복한 시간이 영원하기를.

겨울과 봄 사이. 눈꽃과 봄꽃이 함께 뒤엉켜 흩날리는 계절의 경계에 선 두 사람이 뜨겁게 입을 맞췄고, 청명하고도 따스한 사랑의 공기가 주변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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