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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114화 (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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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품에 안기자 거짓말처럼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부고 소식을 듣고,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고, 화장장에서 그의 유골함을 받을 때까지도. 아니, 그 이후로도 지금껏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건만 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흐르는 건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 사람 죽은 게 슬퍼서 운 거 아니에요. 안타까워서 운 건 더더욱 아니고.”

“알아.”

“안 슬퍼요, 하나도.”

“그래.”

다 안다는 듯, 이해한다는 듯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를 바라보며 다짐하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스레 부끄럽고, 민망하고, 미안해져 발갛게 익은 눈꼬리로 손부채질을 하며 차 문을 열었다.

“더워요. 나 찬 바람 쐴래.”

달카닥, 문을 열고 나서자 차가운 강바람이 그대로 흰 뺨에 닿았다. 후, 더운 숨을 내쉬며 열을 식히는 사이 금세 따라 나온 그가 몸을 낮춰 매끈한 보닛에 허벅지를 기대고 섰다. 쭉 뻗은 다리가 사선으로 길게 땅을 디뎠다.

“차라리 그때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걸.”

현서는 둔치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찬 바람을 맞고 조금 가라앉은 감정에, 그녀는 솔직한 제 속내를 나지막이 털어놓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어디 아무도 모르는 데로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매일 생각했어요. 지난 2년 내내.”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도리어 그렇게 말년에 비참하게 죽은 남자의 인생을 두고 인과응보란 저주도 했다. 더는 제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그의 부재를 자축하면서.

“근데, 그 지긋지긋한 사람이 드디어 이렇게 내 인생에서 사라졌는데, 왜….”

왜 이런 갑갑한 기분인 건가. 마음 같아선 축배라도 들고 싶은 홀가분한 심정이 분명한데, 왜.

“여전히 미워요. 치 떨리게 미워 죽겠는데, 왜 자꾸 생각이 나고 신경 쓰이고…. 하, 뭐가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무슨 마음이 이래요?”

“애증이지.”

그가 답을 말해 왔다.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놓을 수가 없었던 거야, 당신은.”

“…….

“어쨌든, 아버지니까.”

물기 어린 눈동자가 동그랗게 그를 마주했다. 제 속의 복잡한 감정을 투명하게 내비치면서.

“괜찮아.”

“…….

“당신이랑 당신 아버지 사이의 감정이야. 그걸로 당신이 나한테 죄책감 가질 필요도,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그가 제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 가만히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만큼 괴로워했으면 충분해. 나도 버거워서 외면하는 내 가족 기일까지 일일이 챙겨 가면서 혼자 또 얼마나 땅을 파고 들어갔겠어.”

정혁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그녀의 동공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기울어졌던 몸을 완전히 돌려세워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알고 있었어요?”

“뭐. 내 가족 뿌린 호수에 날짜 맞춰서 꽃 놓고 갔던 거?”

서정혁과 헤어져 있던 지난 2년간, 그녀는 제가 아는 날짜에 맞춰 언젠가 그와 함께 갔었던 그 호수를 찾곤 했었다. 철면피를 쓴 아버지를 대신해, 저라도 그들에게 사죄하기 위해. 설움 많고 미련 많게 떠났을 이들을 그렇게나마 위로하고 달래, 홀로 남은 정혁의 삶이 무사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부러 나 보라고 놓고 간 거 아니었어? 내가 갈 때마다 바닥에 꽃이 있던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결코 몰랐다. 뉴욕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단 소식이 들려오는 그가 그간 한국에 때를 맞춰 들어왔는지는.

“덕분에 당장이라도 너 찾아내서 끌어다 내 옆에 묶어 놓고 싶은 거 간신히 참을 수 있었어. 네가 남기고 간 꽃이나 보면서, 레오 말마따나 어울리지도 않게 인내의 시간을 좀 가졌지. 아, 그래도 차현서가 잘 살아 있구나, 하고.”

어울리지도 않을 인내심으로 그 시간을 버텨 왔을 그가 고맙고, 또 고맙지 않았다. 바보. 이런 천하의 바보 같은 남자가 또 있을까.

“꽃이라니. 진짜 너무….”

“진짜 뭐?”

“안 어울리긴 하네요, 서정혁 씨랑.”

꽃을 들고 감상에 잠겼을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피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울고 웃었다.

“모양은 오래전에 빠졌어, 너 때문에.”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팔을 쓰윽 뻗은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다 제 앞으로 끌었다. 그 탄탄한 허벅지 사이로 여자의 몸이 쏙, 맞춘 듯 끼워졌다.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는 모양 좀 빼. 센 척, 아닌 척, 괜찮은 척 안 해도 된다고.”

“…….

“내 앞에서까지 가면 쓰는 거, 가슴 아파서 못 쓰겠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서늘한 얼굴로 다정하기 짝이 없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그의 손길이 뜨거웠다. 가슴이 일렁였다. 아무래도 절 울린 건 서정혁이 분명했다. 제 속의 모든 감정을 죄 흔들어 놓는 기제 또한 그뿐이고.

“알겠어요.”

손등으로 열에 익은 눈가를 쓰윽, 훔쳐 내곤 다짐하듯 말하는 흰 뺨이 요요하게 빛났다.

“이제부터 서정혁 씨한텐 다, 뭐든 솔직하게 말하고 안 숨길게요. 더는 센 척, 아닌 척, 괜찮은 척 같은 거,”

“…….

“안 해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사랑에 미친 남자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이 남자를 있는 힘껏 사랑하는 일뿐임을. 그 어떤 계산도 없이, 온 마음을 다해 그를 끌어안는 것뿐이라고.

“알았으면 뭘 해야겠어.”

차분히 현서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가 기다란 손가락 끝으로 제 아랫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키스.”

어느새 고개를 깊게 숙인 채 낮게 뇌까리는 목소리가 퍽 음험했다.

제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잘생긴 얼굴에, 현서는 홀린 듯 까치발을 들고 입술을 붙였다. 서로 다른 높이의 숨이 따뜻하고 다정하게 섞여 들었다.

“고마워요, 서정혁 씨.”

그녀가 설핏 떨어진 호흡의 틈으로 작게 읊조렸다.

“내 앞에 나타나 줘서. 내 옆에 있어 줘서.”

진심이었다.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기어코 지옥에서 아등대는 저를 구원해 낸 남자. 긴 시간, 질기게도 그녀를 괴롭혔던 불행의 존재가 자석처럼 그녀의 인생 안으로 그를 끌어들였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그를 만나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 건 제 짧은 인생을 돌이켜 더없는 축복이었으므로.

“뿌듯하네. 이젠 닭살 돋는 말도 잘하고.”

젖은 입술을 붙인 채 속삭인 그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날 네 앞에 데려다 놓은 것도, 날 이렇게 만든 것도, 다 당신인데.”

“…….

“차현서 넌 네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르지.”

그가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다 제가 만든 거라고. 충분히 누릴 만한 정당한 행운이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가슴이 뭉글대고 녹아내렸다. 다시 더운 눈물이 차올랐다. 그와 마주한 숨이 파르르 떨렸다.

“또 울어?”

“안 울거든요?”

그가 확인하듯 엄지를 뻗어 열 오른 눈꼬리를 스치고 지났다.

“이 수도꼭지야. 이렇게 잘 울면서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센 척을 하고 살았어, 너.”

“서정혁 씨도 나쁜 놈인 척 잘만 하고 살았으면서.”

“이제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세요.”

“네. 이제 알 만큼은 알죠.”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남자의 입매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어떤 계산도, 의도도 없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늘 경계의 날을 세우고 사는 남자가 제 앞에서만 마음 놓고 원래의 얼굴을 보인다는 사실에 가슴이 뻐근했다.

“알면 계속해야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거.”

소름이 일 만큼 낮게 뇌까리는 음성을 들으며 망설임 없이 다시 입술을 붙였다. 입술이 열리기 무섭게 붉은 살덩이가 벌어진 안으로 깊숙이 밀려들었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섞여 들었다.

입속 여린 점막을 부드럽게 핥고, 빨고, 스치며 키스는 깊어져 갔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움직임에도 열이 밴 육욕이 고스란히 느껴져 더더욱 야릇함이 치솟고 있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곳이라 해도 누구라도, 얼마든지 이 짙은 스킨십을 목격할 수 있는 야외였다. 쯔읍, 쯥. 입술을 빨고 타액을 삼켜 마시는 소리가 요란해질 무렵, 이성을 차린 현서가 먼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만해요, 누가 보면 어떡해.”

“연인끼리 키스 좀 하겠다는데 뭐. 문제 될 거 있어?”

그러나 그녀를 허리를 옭아매고 몸을 허벅지 사이에 가둔 정혁의 얼굴엔 조금도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되레 번들거리는 입술을 훔치며 씨익, 입꼬리를 올릴 따름이었다.

“풍기 문란이거든요?”

“그래서 신고하시게?”

“신고하면 나도 공동 정범인데? 참나. 누구한테 다 뒤집어씌우려고?”

“그럼 철창 안에서 하는 거지 뭐.”

“하. 농담 그만하고, 집에 가서 해요. 나 추워.”

“네 눈엔 내가 집까지 갈 인내심이 남아 있는 걸로 보이나 봐.”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얼굴을 한 그가 짙은 눈썹을 들썩이며 되묻는다. 현서는 픽 가볍게 웃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묵직하게 발기해 있는 그 익숙한 감촉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것도 아무도 모르죠, 서정혁 씨 이렇게까지 변태인 거.”

“차현서 씨만 알았으면 하는데, 그 기밀.”

불쑥, 고개를 더 깊이 숙인 그가 미끈한 혓바닥으로 흰 목덜미를 슬쩍 핥고 이를 세워 귓불을 질근 깨물었다. 꼭 방심하는 새 그르렁대는 제 본성을 드러낸 들짐승 같았다. 자극에 놀란 현서가 화들짝 뒷걸음질을 치며 그를 밀어냈다.

“미쳤어, 진짜!”

“왜. 흥분했어? 아. 스릴 있는 거 좋아했지, 차현서 씨.”

“하, 내가 언제…! 흥분은 자기가 먼저 해 놓고?”

“그래. 흥분했으니까 얼른 가자, 자기야.”

느물대는 목소리로 큭큭, 웃으며 몸을 일으킨 정혁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발개진 뺨을 씰룩거리는 여자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로 조수석 문을 달칵,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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