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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엽이 진단 받았던 병명은 외상성 뇌손상에 의한 기억상실 및 알츠하이머였다. 기억상실과 알츠하이머 증세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기억하는 건지, 혹은 무의식 속 기억은 있으나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그 기억이 온전히 재생되지 못하는 건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관심 없었다. 그의 상태가 어떤지, 회복의 여지가 있는지 따위, 전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사인(死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더 기가 막혔는지도 몰랐다.
“한 번씩 깜짝깜짝 놀라긴 했었어요. 주기는 정확지 않은데, 정말 가끔, 아주 가끔, 굳이 말하자면 두어 달에 한두 번 정도? 완전히 눈빛이 달라져 있으실 때가 있긴 했거든요. 꼭 다 기억 난 사람처럼 엉엉 울기도 하시고…. 그 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요.”
간병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간의 상황을 전언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가 아버지가 죽기 전까진 제게 절대로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탓이었다.
“아마 잠깐 정신이 돌아왔던 순간에 이런 일을 벌이신 것 같습니다.”
경찰이 내민 꼬깃꼬깃하고 더러운 메모지 한 장이 유서의 전부였다.
[ 미 안 합 니 다]
주어도, 대상도 없는 그 삐뚤빼뚤한 글씨의 다섯 자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라니. 뭐 이런 인간이, 뭐 이런 악마가 다 있는 건가. 끝의 끝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어떻게 이다지도 악랄하고 책임감이 없을 수가.
눈물은커녕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났다.
“저 정말 그냥 가도 괜찮겠어요?”
장지 안으로 운구되는 관을 바라보며 멍하니 선 현서에게로 솔이 타박타박 다가와 물었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현서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라니까. 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알면 나 네 남편한테 두고두고 욕먹어. 임산부가 화장장에서 이게 뭐 하는 거야? 가, 얼른.”
“저 없으면 변호사님 혼자 계셔야 하니까.”
차선엽의 마지막 길은 초라했다. 달리 빈소도 차려지지 않은 채 곧장 근처의 작은 화장장으로 보내졌다.
사정을 모르는 요양원 직원들은 없느니만 못한, 매정한 딸이라며 수군덕거렸으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미 20여 년을 죽은 사람으로 살았기에 그의 진짜 부고를 알려야 할 사람도, 이유도 없다 여긴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차선엽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솔과 정혁뿐이었다.
그저 이렇게, 어떤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은 사람으로 생존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는 게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 같았다.
“맞아.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그래도 서정혁 씨라도 부르시지….”
안타까운 듯 말끝을 흐리는 솔이를 보며 현서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일부러 그에게 제발, 모든 장례 절차가 다 끝날 때까지 오지도, 저를 찾지도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평생을 고통받게 만든 것도 모자라 악마 같은 이의 마지막까지 보게 만들 순 없어서. 다행히도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조용히 안아 줬을 따름이었다. 잘 다녀오라고.
이상한 남자. 어떻게 잘 다녀오란 말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멀쩡히 저를 보며 웃어 줄 수 있는 건지….
솔의 고집을 꺾고 먼저 떠나보낸 뒤 홀로 남아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났다.
어린 시절, 늘 저를 안고 놀아 줬던 아버지. 초등학생 딸의 성적표를 들고 동네방네 자랑을 일삼던 팔불출 아버지. 엄마 없이 크게 해 늘 미안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아버지. 그랬으면서, 정작 제 손으로 하나뿐인 딸을 고아로 만들어 버렸던 아버지.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유산으로 남기고 딸의 인생을 진창에 빠뜨린 아버지. 그래도 그 모든 게 부정(父情)이었다 합리화했던 딸에게 믿을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 줬던 아버지.
끝끝내,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했던 아버지,
차선엽.
당신도 그랬을까. 차가운 호수로 걸어 들어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당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잠시나마 곱씹고 반성이란 걸 하긴 했을까.
현서는 믿고 싶었다. 부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만큼은 제 모든 선택과 오판을 후회하고 뉘우쳤기를.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랬노라고, 그저 막연히 믿고만 싶었다.
죽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자신이 그 더러운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라는 걸 더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야만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제 곁의 남자를 있는 힘껏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간절히 빌었다. 영면한 그곳이 지옥이길. 그곳에서 부디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안식할 수 있기를.
화장이 끝났단 안내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해가 거의 다 넘어간 후였다.
손안에, 작은 유리함 하나의 크기로 담긴 차선엽의 마지막이 기막히게 허무했다. 고작 이렇게 끝을 보려고 그 많은 사람의 인생을 지옥에 살게 했다는 게.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네?”
현서는 받아 들었던 유골함을 다시 납골당 직원에게 내밀며 말했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직원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럼 저희 화장장과 연계된 납골당에 분골을….”
“네. 적당히 부탁드립니다.”
“아아…. 네.”
직원은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유골함을 가져갔고, 현서는 그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지를 걸어 나왔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 그 악마 같던 인간의 죽음 따위,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도리어 후련하고 홀가분하다고. 그렇게 되뇌고 곱씹으며 애써 아버지의 마지막을 외면했다.
***
늦은 밤, 두 사람을 태운 세단이 빨간색 신호등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운전대를 쥔 정혁은 옆 좌석에 앉아 작은 입술을 오물대며 열심히 떠드는 여자를 흘긋 바라봤다.
차선엽의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온 그녀는 어딘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졌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었다. 뭐든 다 열심히, 과장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딴에는 그게 눈에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태연을 가장하는 것 같았으나 그녀의 사소한 감정 변화, 숨소리 하나조차 기억하고 구분하는 그가 그 짓무른 속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안쓰러웠다. 아버지를 대신해 여전히 제게 죄책감을 품고, 과거의 악몽에 사로잡혀 있는 여자가 안쓰러워 가슴이 아렸다. 전혀 그렇지 않은 주제에 괜찮은 척, 씩씩한 척, 센 척을 하는 게 마음 아팠다.
“웃기죠. 애초에 살해 의도가 있었던 사람이 수면제를 일부러 마셨을 리가 없는데. 오히려 사건 당일에도 죽은 남자한테 폭행을 당했어요, 이유진 씨는. 실제로 현장에서 확보한 혈흔 중 대부분이 실제로 이유진 씨 거였고요.”
“그래서 무죄 판결 받아 냈으니 다음은?”
“검찰에서 분명히 항소하겠죠. 이제 그거 방어할 준비 하려고요. 새로운 증거 나오기 전까지 뒤집힐 확률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좀 걸리는 게 있긴 해서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는 남자의 짙은 속눈썹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뭔데.”
“죽은 남자 신상이 좀 걸려요. 조사해도 영 나오는 게 없어서요. 소문엔 금감원장 사생아라는 말도 있고 하던데….”
“알아봐 줘?”
“네? 서정혁 씨가 왜요?”
동그랗게 부푼 눈동자가 정혁을 돌아보며 물음표를 던졌다.
“공교롭게도 나도 지금 새로 바뀐 금감원장 정보 좀 터는 중이라. 2년 만에 왔더니 뭐가 다 바뀌었어, 귀찮게.”
“서정혁 씨가 금감원장은 왜요?”
“일본 말고 한국부터 발을 디뎌 볼까 해서. 때마침 좋은 물건이 나왔더라고.”
“…….
“주영은행.”
현서의 눈동자가 더 동그랗게 커졌다. 동시에 눈앞에 파란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정혁이 액셀 페달을 밟았다.
“주영은행에 생각 있는 거예요?”
최근 잇따른 사모펀드들의 환매 중단 선언으로 직격타를 맞은 주영은행은 최근 행장까지 횡령, 비리 혐의로 구속 수감되는 등 전례 없는 경영 위기를 겪고 있는 메이저 은행 중 하나였다.
“썩 나쁜 물건은 아니니까. 하자야 좀 도려내면 되는 거고.”
“서정혁 씨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요.”
그녀가 피식 웃으며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전 정혁이 한국에 있을 때 주영은행은 골드스톤에 크게 물을 먹인 전적이 있었다. 물론 2년 후 본인들의 처지가 이렇게 될 줄 모르고 한 짓이었겠지만.
“나는 차현서가 제일 무서워.”
농담 아닌 농담에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한강 다리 위를 달리던 세단이 공원 쪽으로 슬쩍 빠져 미끄러졌다. 가려던 방향과 반대의 방향이었다.
“여기는 왜요?”
정혁은 한적한 공간에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윈드실드 너머엔 어두운색으로 푹 잠긴 한강의 풍경이 고스란했다.
“너 심란할 때 멍 때리고 한강 물 보는 거 좋아하잖아.”
“심란…? 저 오늘 안 심란한데요?”
전혀 아니라는 표정으로 눈을 둥글게 뜨며 되물었다.
곧 시동을 끄고 고개를 돌린 남자의 새카만 시선이 쏟아졌다. 잠시, 차 안엔 짧고 담담한 침묵이 맴돌았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그녀는 어쩐지 어색한 웃음만 지었을 뿐이었다.
“저녁 먹었어?”
“그냥, 일 빨리 끝내고 퇴근하고 싶어서 안 먹었어요. 빨리 끝내야 서정혁 씨 보니까….”
“잠은.”
“…네?”
“어제 잠은 얼마나 잤어.”
“어제… 야근하고 집에 가니까 자정쯤 됐길래 바로 자기 뭐해서 일 좀 하다 자느라구….”
“못 잤단 소리네.”
“…….
“그제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질문에 현서의 미간이 슬쩍 움찔거렸다.
“그제는 꽤 잤어요, 사무실 소파에…. 근데…. 갑자기 이런 걸 왜 물어요?”
천천히 깜빡거리는 그의 깊은 눈이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우리 변호사님, 또 왜 이렇게 센 척을 하실까.”
“내가, 무슨 센 척을 했는데요?”
“심란한데 안 심란한 척. 슬픈데 안 슬픈 척. 울고 싶은데 웃는 척.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멀쩡히 괜찮은 척, 센 척했잖아. 내 앞에서 더.”
“…….
“당신 아버지 보내고 와서부터 한 일주일쯤 쭉 이랬어. 아니야?”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추궁하는 정혁의 말에 현서의 말갛던 얼굴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애써 연기를 한다고 했는데, 그의 눈에 다 들켜 보였던 모양이었다. 억눌렀던 감정이 목구멍을 뜨겁게 달궜다. 시큰거리는 눈가를 애써 깜빡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면 그냥, 좀…. 모르는 척해 주지, 진짜.”
작은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알았어.”
부지불식간 커다란 손이 아기를 감싸 안듯 목덜미를 끌어와 그녀를 제 품으로 폭 당겨 안았다.
“모르는 척해 줄게.”
“…….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다 못 본 걸로 해 줄 테니까 울어. 참지 말고.”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기고 등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기어코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