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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갔던 서정혁은 정확히 이틀 만에 돌아왔다. 분명히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통화했을 때까지만 해도 야근 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저가 야근 중이라 답을 하려 걸려 온 전화를 받는 순간, 그는 믿지 못할 소리를 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일 끝나면 천천히 나오라고.
그럴 순 없었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훤칠한 덩치의 남자를 알아보곤 발끝을 재게 움직여 다가갔다. 비스듬히 턱을 기울여 연초에 불을 붙이곤 후, 하고 뽀얀 연기를 내뱉던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왜 벌써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서정혁 씨야말로 왜 벌써 왔어요?”
“벌써 와서 서운해? 기껏 서둘러 일 끝내고 왔더니.”
“아니, 무슨 뉴욕엘, 어디, 제주도 당일치기하는 것처럼 다녀와요?”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길게 쓸어 넘기는 새하얀 얼굴에 연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깜빡거렸다. 그러다 느긋이 저를 응시하는 남자와 눈을 맞추곤 피식,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나 어디 도망 안 간다니까.”
제게로 손을 뻗는 그의 품에 자연스레 안겨들며 타박하듯 올려다봤다.
“잠은 좀 잤어요? 상처는? 치료했구? 정말 딱 할 일만 하고 왔나 봐, 피곤하지도 않아요?”
“너는. 안 피곤해, 이 시간까지?”
“서정혁 씨에 비할까요.”
걱정스럽게 손가락을 올려 다쳤던 그의 가슴께를 가리키자 그의 손이 탁, 여린 손목을 쥐어 챘다.
“왜요. 아파요, 아직도?”
그가 느긋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턱짓을 했다. 익숙한 제스처에 그녀는 한 발짝 뒷걸음질을 치며 경악한 눈동자를 크게 치켜떴다. 코트를 걸쳐 입었음에도 단전 아래로 선연히 솟아오른 거대한 윤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서였다.
“난 네가 내 걱정하는 소리 할 때마다 꼴려.”
흉포한 아랫도리의 사정과 달리 퍽 느긋하게 입매를 올려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진짜, 변태가 따로 없어.”
“분발해. 당신도 이제 변태 페이스에 맞춰야 재밌게 놀지.”
“헛소리 그만하구요. 진짜 치료 제대로 했어요?”
“했어. 그 바쁜 와중에 제임스 불러다 드레싱까지 했어, 네 잔소리 듣기 싫어서.”
“잘했어요.”
다시 그의 코트 깃을 당겨 활짝 웃는 말간 얼굴이 꽃같이 피어났다.
“내가 아주 조련을 제대로 당한다.”
정혁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터뜨리며 웃었다. 잘 뻗은 입매 사이로 하얀 입김이 퍼져 나갔다.
***
“그동안엔 김준한이랑 자주 왔었겠네?”
가만히 마주 앉아 먹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던 그가 불쑥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왔다. 젓가락으로 우동 면발을 집어 올리다 멈칫, 그를 바라봤다. 무감한 표정이었으나 어쩐지 집요하게 깜빡이는 새카만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아뇨.”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 것 같아, 현서는 짧게 답하며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못 왔어요.”
“왜.”
“여기 오면 서정혁 씨 생각날까 봐.”
“다행이네.”
“뭐가요?”
“실컷 유치한 짓 하고 다닌 보람이 있어서.”
남자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무슨 유치한 짓? 뭐 했는데요?”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자 그가 말을 잇는다.
“억울할 뻔했잖아, 나만 숨 쉬듯이 차현서 생각하면서 괴로워했으면. 너도 나 괴로운 거에 반의반이라도 괴로웠어야 공평하지.”
“하…. 서정혁 씨 못된 말 오랜만에 들으니까 눈물 나게 반갑네요.”
“그러게. 네 취향이 이런 쪽이었던 거 내가 깜빡했다. 분발할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빈 물잔에 물을 따라 채워 주는 정혁의 손이 퍽 다정했다. 남자다운 선의 손목 아래로 고급 시계가 번쩍거렸다. 시곗바늘을 미처 한국시간으로 돌려놓을 새도 없이 저를 보러 왔을 그의 마음이 괜스레 아릿해졌다.
“잘난 애인한테서 눈 못 떼는 심정은 이해한다만, 얼른 먹자. 시간 아껴 써야 해. 비행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비행기란 소리에 현서의 눈이 다시 크게 부풀어 올랐다.
“비행기? 허…. 또, 다시 가 봐야 해요? 언제? 비행기 시간이 언젠데요?”
“모레, 오후 1시.”
고개를 힐끗 돌려 시계를 확인한 그녀의 입술이 헤 벌어졌다.
“미쳤어요, 진짜?”
“미쳤지. 너한테.”
“비행기를 무슨 고속버스 타듯이…. 하, 서정혁 씨, 나 어디 안 도망가니까 이렇게 무리하지 마요. 나 그냥 얌전히 기다린다니까….”
“내가 못 기다려서 그래.”
“왜 못 기다려요? 지금껏 못 보고도 살았는데.”
“이야, 차현서 말 못 되게 하는 거 장난 아니네. 뭐? 못 보고도 살아?”
그가 짙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미간을 조였다.
“그런 뜻이 아니라요.”
당황하고 어이가 없어 물컵을 벌컥벌컥 들이켜 마셨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왔다 갔다 하겠단 거예요?”
“당신한테 허락받아야 할 일인가?”
“아니…. 서정혁 씨 지금 얼굴 되게 안 좋아요.”
“알아. 근데도 잘생겼잖아.”
“그래요, 잘생겼긴 한데, 피곤하잖아요. 계속 이러면 언제 쉬고….”
“쉬잖아, 지금. 너랑.”
말할 수 없이 속이 상했다. 뭐가 이 남자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든 걸까 싶어서. 답은 뻔했다. 제 못된 이기심과 방어 본능이 이 잘나고 오만한 남자를 이렇게 망가뜨린 것 같아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아무래도 서정혁은, 생각한 것보다, 예상한 것보다도 더 힘든 시간을 버텨 온 것 같았다. 칠흑 같은 동공엔 여상해 보여도 어딘가 불안한 상처가 한가득 흔들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진짜.”
입술을 꾹 눌러 깨물었다. 가슴 한구석이 알알해져서 그를 마주 볼 수도 없이 목 끝이 따끔댔다.
“진짜, 나 때문에 서정혁 씨 다 망가졌네.”
하, 하고 길게 내뱉은 긴 숨이 파르르 떨렸다. 또 주책없이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아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손이 달래듯 제 이마 위로 쏟아지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준다.
“너한테 망칠 기회 준 거 나야. 시킨 거 착실하게 잘해 놓고 뭔 자책을 해?”
“속상하니까 그러죠. 그 더럽던 성격 나 때문에 다 죽은 것 같아서.”
“레오가 들으면 아주 기겁할 소릴 자신 있게 하네.”
입술을 삐죽거리는 여자가 귀여웠는지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먹어, 얼른. 할 거 많잖아, 우리. 그 전에 가 봐야 할 데도 있고.”
가 봐야 할 곳이 있단 소리에 의문을 품은 동그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차분하고 다정한 손이 그녀의 말랑한 뺨을 톡, 가볍게 치고 지난다.
***
늦은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각의 요양원엔 괴괴한 적막이 흘렀다. 길고 어두운 복도의 끝, 주홍색의 스탠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병실 앞에 선 현서는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서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간병인도 떠난 시각, 휠체어에 홀로 앉아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차선엽의 뒷모습에 억누른 감정이 버거웠다.
“진짜…. 진절머리 나.”
습관처럼 입술을 눌러 깨물던 그녀가 시선을 떨궜다. 허공을 향해 있음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신은 티끌 하나 묻지 않았다는 듯 결백하게 깜빡거리는 탁한 눈동자가 끔찍했다.
“나도 이런데, 서정혁 씨는….”
현서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왜 여길 오자고 한 건지, 왜 굳이 아픈 상처를 들쑤시고 괴로운 마음을 자처하려 한 건지, 죄책감과 불안함, 그리고 안타까움의 감정이 혼융된 시선이었다.
2년 전, 외상이 너무 커 생사조차 불명하다던 차선엽의 수술은 아주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하늘이 무심하게도 그는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건강을 회복했다. 다만, 충돌 시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뇌 손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던 의사의 말처럼 의식을 회복한 그는 완벽히 무지의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끔찍한데, 견딜 만은 해.”
“…….
“예상보다는.”
한 발짝 뒤에서 가만히 차선엽을 지켜보던 정혁이 천천히 구둣발을 내디뎠다. 굳게 닫혀 있던 문고리를 잡아 돌린 그는 타박타박, 차선엽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코트에 양손을 푹 찔러 넣은 채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휠체어에 앉은 차선엽을 내려다보는 눈매가 시리도록 서늘했다.
인기척을 느낀 차선엽이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공허히, 텅 빈 노인의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질 않았다. 제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왜 숨죽인 분노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듯 회색빛 노안은 그저 무구하기만 했다.
괴로운 기억을 완벽히 지워 낸 차선엽의 표정엔 외려 행복의 기색까지 비치고 있었다. 자신이 쌓은 업보와 죄로 평생을 고통에 신음하는 두 사람을 앞에 세워 놓은 채로. 뻔뻔하고 기막힌 얼굴이었다.
정혁은 그런 차선엽을 내려다보며 오래 침묵을 지켰다.
그 뒤틀린 속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참담한 광경에, 현서 또한 숨을 죽인 채 그 너른 등만 응시했다. 불쌍하고 가여웠다. 망가지고 무너져 내린 남자의 무력함이.
아무래도 더 지켜볼 수 없어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주머니 속에 있던 그의 손이 불쑥 제 손을 부드럽게 감싸 끌어당겼다. 보란 듯 꽉 움켜쥔 손바닥의 체온이 저릿저릿 온몸을 뒤흔들었다.
“지금 누가 더 괴로울까.”
낮은 음성이 침묵을 깼다. 텅 빈 차선엽의 시선과 서늘한 서정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히고 있었다.
“누구 같아. 당신 손 잡고 기꺼이 진창에 뛰어든 날까, 혼자 지옥 같은 시간에 박제된 당신 아버지일까.”
천천히, 남자의 시선이 옆에 선 그녀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자명한 답을 보채듯, 남자가 잡고 있던 손을 더 바짝 고쳐 쥐었다.
“나는, 차현서. 당신 아버지한테 벌 줄 거야. 타인 인생 송두리째 망가뜨려 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이 사람한테 자기가 지은 죗값, 고스란히 받게 할 생각이야.”
“…….
“이런 방법으로.”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구태여 자신을 끌고 아버지 앞에 서려 했던 건지. 애정이 증오를 상쇄했다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거였다. 과거에 얽매여 더 이상 너를 미워하고 원망할 일도 없다고. 충분히 슬펐고, 충분히 괴로워했으니 이젠 됐다고. 이제 그만, 이 지옥에서 함께 벗어나자고.
그다웠다. 이기적이고, 못돼 먹은 서정혁의 방식.
“그러니까 당신도 내 복수에 협조해.”
뻔뻔하고도 아픈 남자의 눈빛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