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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은 면봉에 소독약을 묻혀 살살 펴 바르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미간을 있는 대로 좁히고선, 꼭 제가 다친 것처럼 손을 떠는 게 여간 앙증맞아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엉망으로 부풀어 오른 입술과 오랜 시간 자신이 남겨 놓은 하얀 목덜미의 붉은 자국들이 썩 마음에 들었다.
“병원엘 가야 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많이 베였어요. 알아요?”
“바빠.”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에 갔다 오면 되겠는데 뭐가 바빠요.”
“너랑 이러고 있기도 바쁘다고.”
“아…. 아무래도 덧날 것 같아.”
벌어진 상처를 심각하게 바라보던 현서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중에라도 시간 내서 꼭 병원 가요. 네?”
심상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남자의 표정이 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만 같았다.
“알았으니까 이리 와, 이제.”
그는 구급약이 든 상자를 정리하는 현서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날이 다 밝도록, 중천에 해가 뜬 오후가 다 지나도록 그녀를 안고 빨았음에도 아직 부족하다는 듯 구는 그의 집착에 기가 다 질렸다.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이런 남자였다는 걸 오래 잊고 있었던 탓이었다.
다가가기가 무섭게 헐겁게 걸치고 있던 로브 안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은 그가 허리를 감아 맨 살갗을 비볐다.
“하…. 서정혁 씨, 계속 이러고 있어도 돼요?”
“안 될 이유가 있어?”
“핸드폰, 아까부터 전화 오는 것 같던데.”
끝없이 몸을 섞으며 얼핏 들은 진동만 수차례였다. 테이블 위 던져 놓은 그의 핸드폰을 흘긋거리려 고개를 돌리자 벌어진 로브 사이로 더운 입김이 밀려 들어왔다.
“멍청한데 눈치까지 없는 인간들인가 보지.”
“하아, 우리 여기, 흐…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는 알죠?”
“몰라.”
체액으로 오래 젖어 있던 유두가 벌겋게 부어 성을 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시 가슴을 한입에 머금고 빨았다.
“흣, 아니, 이제 그만, 많이 했… 하아!”
찌르르한 감각에 그의 머리칼에 넣은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 다리 사이에 저를 가둔 채 게걸스레 젖꼭지를 문지르고 빨아 재끼는 이 상스러운 남자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예민해진 성감에 그대로 반응하는 자기 자신도 대책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뭘 자꾸 많이 했대, 시작도 안 했는데. 2년 동안 못 한 거 다 하려면 너 진짜 큰일 났어. 알아?”
혀를 미끄러뜨려 내린 그가 배꼽 주변을 둥글게 핥으며 말했다.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노골적인 입맞춤에 그녀가 다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 서정혁 씨, 미안한데 나 저녁엔 사무실 가서 꼭 해야 할 일 있어요. 월요일 날 법원에 제출할 이의 신청서… 흐!”
그러나 이미 가랑이 사이를 벌리고 들어온 그의 손이 젖은 입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가 숱하게 남겨 놓은 사정의 흔적이 아직도 흥건했다.
“너 잡겠다고 열 일 제쳐 두고 온 나도 있어. 일 핑계를 대고 싶어?”
“하아, 아니 적당히 해야…. 흐응, 나 힘들다구요.”
잠도 한숨 못 자고 스무 시간 가까이 그에게 시달린 그녀가 기어이 우는 소리를 하며 애원을 했다.
“엄살 여전하네, 차현서.”
그가 쯧, 혀를 걷어차며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발이 뜬 그녀가 토끼 눈을 뜨고 남자의 목에 매달리듯 안겼다.
발밑 테이블엔 간단히 시켰던 룸서비스의 흔적이 고스란했다. 끓는 본능을 차곡차곡, 충실히도 채웠던 증거들이었다. 불현 꽤 오랜 시간, 이 공간에서 본능만 남은 짐승처럼 뒹굴었단 사실이 선연해져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았다.
“내려 줘요.”
“힘드시다면서요.”
“하지 마요, 진짜.”
“아주 다 하지 말라지.”
“나 이제 진짜 못 해요. 더 하면 나….”
“뭘 기대하는 건데? 진짜로 하지 말란 거야, 더 해 달라고 앙탈하는 거야?”
침실로 향할 줄 알았던 남자의 발걸음이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 괜스레 발버둥을 치며 내려 달라 목소리를 높였던 게 민망해졌다. 발그레한 얼굴로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소원대로 그만하고 씻자고. 싫어?”
안고 있던 여자를 가볍게 샤워 부스 안에 내려놓으며 그가 물었다. 빙글거리는 얄미운 표정이 분명 저를 놀리는 거였다. 놀리니 재밌느냐 한마디 쏘아붙이려는데, 몸을 밀착해 들어온 그가 로브를 벗어 유리 파티션에 툭, 던져 걸쳐 올리더니 수전을 눌러 물을 틀었다. 미지근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왜 따라 들어와요?”
“바쁘다며. 경제적으로 살자고.”
느긋한 목소리로 읊조리면서도 그녀를 벽에 몰아세워 놓은 그가 뻔뻔히도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어요?”
“그래서 죽겠다고 온 거 아냐. 내 말 다 어디로 들었어?”
“흐으, 씻자면서요….”
“씻겨 주잖아.”
커다란 손이 가랑이 사이에 들어와 훑듯이 비벼졌다.
“아니, 거기는 내가, 흐, 씻을 건데…!”
“자위도 안 한다면서 무슨. 보지에 네 손가락 넣을래?”
“하, 손가락을 왜… 읏…!”
부지불식간 가운뎃손가락이 푹, 찔려 들어왔다.
“깨끗이 씻어야지. 정숙한 변호사님이 줄줄 흘리면서 남자 정액 냄새나 풍기고 다니면 되겠어?”
손가락을 세워 안쪽 깊숙이 고인 체액과 정사의 흔적들을 열심히 문지르는 그 의도가 뻔뻔히도 음험했다. 일부러 들려주려는 듯 손가락을 흔들어 구멍 안, 난잡하게 찰박이는 소리의 볼륨을 더 키웠다.
“설마 또 싸는 거 아니지?”
정혁이 새빨개진 현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레 물었다. 참다못한 그녀가 그녀의 가슴을 툭 밀어냈다.
“하지 마요, 진짜.”
자석처럼 다시 달라붙어 허리를 감싼 그가 그녀를 안고 큭큭대며 웃었다. 들썩거리는 커다란 몸의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게 너무 따뜻하고 다정해 현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찌르르한 감각으로 뛰기 시작하는 심박 소리가 너무 커 행여 그에게까지 들릴 것 같아서였다.
“계속 이러고 있고 싶다, 너랑.”
그는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낮게 속삭였다.
“나도 바빠. 새벽에 비행기 타야 해.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있어서.”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아쉬움이 그득한 그의 눈을 마주했다.
“뉴욕?”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옮긴 은행이 골드스톤이랑은 많이 달라서 아직 규모가 좀 작아. 그래서 일일이 신경 쓰고 집중해야 할 일도 많고.”
“들었어요. 서정혁 씨 어디로 자리 옮겼는지.”
“다행히 나한테 관심을 아주 끊진 않았나 보네.”
“그게 제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어서요.”
그녀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시원하게 말아 올린 그가 그녀의 둥근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일본 쪽 투자 건 핑계 대고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오래 있을 수가 없어. 당분간은 이렇게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봐야 할 것 같아.”
“나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는데…. 서정혁 씨가 괜찮겠어요? 왔다 갔다 힘들어서.”
“안 괜찮지. 너 두고 갈 생각 하니 벌써 죽겠는데.”
투정하듯 눈썹을 들썩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말아요. 이제 어디 도망 안 가니까.”
“착각하나 본데 도망도 내가 허락을 해야 갈 수 있는 거거든. 내가 두 번이나 널 기다려 줄 만큼 선한 인간으로 보여?”
“참나. 협박이에요?”
“경고지. 또 어디 숨고 튈 생각 하면 다리 부러뜨려서라도 내 옆에 묶어 두겠다는 경고.”
살벌한 농담을 지껄이면서도 비실거리고 웃는 얼굴이 꼭 아이 같아 그녀도 덩달아 실없이 웃어 버렸다.
“안 가요. 이젠 제발 좀 떨어져 나가래도 안 떨어질 거니까.”
그러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깊숙이 안겨들었다. 서로의 체향이 부드럽게 얽혀들었다. 그저 몸을 맞대고 있을 뿐인데 마음이 더없이 벅차올랐다.
“아기가 따로 없네.”
정혁은 품으로 파고드는 그녀를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피식거렸다.
“이 애를 놔두고 어떻게 가.”
“잘 다녀와요.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벌 받듯이.”
어쩐지 부끄러워 시선을 내리깔았다. 깎은 듯 탄탄한 그의 상박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는데 그의 음험한 목소리가 귓바퀴에 축축이 감겨왔다.
“얌전히만 기다려. 벌은 다녀와서 넘치게 받을 줄 아시고.”
***
차에서 나란히 내려 다가오는 정혁과 현서를 바라보며, 솔은 멍하니 넋 나간 얼굴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현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간을 긁적거렸고, 정혁은 퍽 태연한 얼굴로 그런 여자의 어깨를 제 품에 감싸 안았다.
“제가 지금 뭐, 헛걸 보는 거죠, 변호사님?”
현서가 굳이 말하지 않았으므로 솔은 알지 못했다. 교통사고 합의 건을 의뢰해 왔던 의뢰인이 서정혁이었단 것도, 제 상사가 지난 며칠을 앓았던 이유가 재회한 남자 때문이다는 것도. 그녀 눈에는 분명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였다. 충분히 황당해할 만했다.
“오랜만이네요, 윤솔 사무장님.”
“허, 뭐야…?”
“임신 축하드리고요.”
그의 임신 축하 인사를 들으면서도 솔이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황당함을 표출했다.
“무슨 전개에요, 이게?”
눈썹을 들썩거리는 눈앞의 잘난 남자를 따지듯 올려다보던 그녀는 옆에 선 현서에게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뭘 물어, 상황 다 파악했으면서.”
현서는 괜스레 손을 내저으며 도리어 그녀를 타박했다. 그러곤 제 옆에 선 정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다녀와요. 도착하면 연락하구요.”
그녀의 작별 인사에 아쉬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던 남자는 기어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돌아섰다.
“이게 다… 뭔, 대체….”
붉어진 뺨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현서의 뒤에 빠르게 따라붙으며, 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본부장, 아니, 라이언 씨가 대체 왜 여기 있어요? 언제 한국엘 왔는데? 변호사님은 또 언제 그걸 아셨어요? 저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고? 변호사님 보러 온 거래요? 그래서 다시 만나자 뭐 이런…. 설마 두 분, 다시 만나요?”
“나 지금 되게 민망하거든. 그러니까 좀 조용히, 하나씩 물어봐 주면 안 될까, 솔아?”
“아니, 다시 사귀냐니까?”
“어.”
홱 고개를 돌려 새빨개진 얼굴로 냉큼 대답해 버렸다. 배신감에 젖은 솔이의 얼굴이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렸다.
“와…. 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알고 있었으면 그냥 대충 넘어가 줬으면 합니다, 윤 사무장님.”
“저 위자료 청구할게요. 다음 달 월급에 포함해서 입금해 주세요.”
“무슨 위자료?”
“그동안 없는 살림에 변호사님 사드린 술값. 안줏값. 그리고 술친구 해 드리면서 울고불고했던 감정 소모에 대한 위자료요.”
“뭐라는 거야, 얘가. 야, 윤솔. 너 내가 너 임신하기 전부터 네 남친이랑 연애 상담해 주느라 허구한 날 술 사 줬던 건 일부러 기억 안 해? 한창 둘이 사랑싸움 징그럽게 할 땐 너 내가 휴가도 엄청 줬어?”
현서가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되받아쳤으나 솔은 기막힌 얼굴로 그녀를 휙 지나쳐 가 버릴 뿐이었다. 현서는 잠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가 결국 빠른 걸음으로 다시 솔이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불쑥, 발걸음을 멈춘 솔이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마주한 솔이의 눈자위가 시뻘겠다. 도리어 당황한 건 현서였다.
“야, 너, 왜….”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 솔이 현서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죄책감 느꼈는데…. 내가, 괜히 본부장님 싫어하고 두 분 반대해서 일이 이렇게 됐나 싶어서, 그래서 변호사님이 이렇게 불행한가 싶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었는데.”
울먹거리는 낯선 솔이의 목소리에 당황해 있던 현서도 그제야 그녀의 감정을 인지하고 가만 등을 토닥거렸다.
“이젠 저 좀 그만 괴롭히시구요, 좀!”
솔이의 애정 어린 타박에 현서는 그저 작게 웃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