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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107화 (107/115)

♬  107

얼마나 그렇게 안겨 있었는지 몰랐다. 노도처럼 들끓던 서러운 감정이 가라앉고, 요란한 울음소리가 멈출 때까지 서정혁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토닥였다. 잘게 떨리는 몸을 꼭 끌어안은 채로.

“다 울었어?”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전신을 울렸다. 눈물로 축축이 젖어 버린 배스로브가 민망해 한참을 더 웅크리고 있자, 커다란 손이 제 턱을 잡아 치켜들었다.

“봐. 얼마나 예쁘게 울었나 보게.”

엉망진창으로 퉁퉁 부었을 제 얼굴이 얼마나 가관일지 보지 않아도 뻔하건만, 남자는 뻔뻔한 능청을 떨며 시선을 깔았다. 눈꼬리와 코끝, 두 뺨과 귀 끝까지 열이 올라 발개진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내리며 흥건한 물기를 걷어 냈다.

“네 말 맞아.”

크고 따뜻한 손길에 온몸이 몽글몽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남자의 오만한 동공에 담긴 피사체가 오롯이 저 하나뿐이라.

“나 아직 당신 아버지 용서 못 했어. 아니. 계속 못 할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어서 용서가 안 돼. 당신 말대로 제대로 한 번 사과 받은 적도 없고.”

“…….

“내 가족, 내 인생 박살 내 놓은 사람을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어. 내가 성인군자도 아닌데.”

“…….

“그런데 나는.”

“…….

“말했지만, 차현서.”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전하려 애쓰는 그 호소가 너무나도 또렷해 숨이 막혔다.

“내 애정은 증오를 상쇄해.”

균열이 일어난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또렷한 목소리로 전해 오는 마음 한 조각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고 뜨거웠다.

“당신 없이 2년을 버티면서 확신했어. 차현서가 내 옆에 있어야 이 지긋지긋한 불행이 지워지겠단 확신.”

“…….

“너 원망한 적 없어. 미워한 적도 없고. 그러니 앞으로 그럴 일은 더더욱 없겠지. 지금도 이렇게 또 놓칠까 안달이 나고 초조하기만 한데 무슨….”

겨우 진정시켰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여지없이 또 일렁거렸다.

“부탁할게. 제발 옆에만 있어. 도망가지 말고, 밀어내지만 말고. 아니면 나 이제 죽어. 더 못 버텨, 정말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애원처럼 이어졌다.

“좀 살려 주라.”

남자의 바보 같은 고백에 벌겋게 익은 눈가가 다시 시큰시큰, 달아오르고 있었다.

“…후회할지도 몰라요.”

물기를 머금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지금은 괜찮더라도, 서정혁 씨가 열심히 애를 쓴대도 내가 우리 아빠 딸이라는 거, 시시때때로 생각나면 괴롭고 고통스러울지도 몰라요. 지금 감정만으로 판단하면 당신 상처, 속에선 곪아 터질지도 모르는데….”

“현서야.”

그가 말을 끊고, 환청처럼 느릿하게 제 이름을 불렀다.

“내가 지금보다 어떻게 더 망가져.”

이마 위로, 낮은 목소리가 한숨처럼 흩어져 내렸다. 쓸쓸하고도 다정한 그 한마디에 눈앞이 핑, 돌았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제 앞의 서정혁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성 같던 그가 어떻게 깨지고 부서졌는지. 이 만신창이의 남자에게 지금 자신이 무슨 비수를 휘두르고 있었던 건지까지도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저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이기적인 방어 본능 때문에, 제 마음 하나 편하자고 부채감을 회피했었다. 신음하는 그 앞에서 알량한 양심을 운운하며 진심을 외면하고 짓밟기를 서슴지 않았다. 긴 울타리를 치고 제 몫의 불행과 슬픔에만 급급했었다.

정작 서정혁은, 가장 밑바닥까지 내보이며 이토록 간절히 애원을 하고 있었는데도….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요? 그냥 지금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못된 놈으로 살면 편하잖아요. 나 같은 여자 때문에 왜 이렇게까지 망가지는 건데요, 서정혁 씨가 왜.”

눈을 질끈 감았다. 자각이 뼈저렸다. 증오를 상쇄한다는 지독한 그의 애정이 제 못난 열등감과 죄의식마저도 녹여내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짓깨물지 못하도록 막은 그의 엄지가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쓸고 지났다. 가물대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떠올리자 시선을 맞춘 그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미치는 데 이유가 어딨어, 좋아 죽겠는데. 지금 당장 당신이 날 찔러 죽인대도 즐겁게 모가지 내밀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

“왜.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어?”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매끈한 얼굴로 내뱉는 자조가 퍽 아릿했다. 사랑한 이유로 감수해야 할 불행을 기꺼이 자처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쳤어요, 당신…. 하….”

맞다. 그는 미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지극히 감정적인 말을 지껄일 리 없다.

“대단한 차현서 씨.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못된 놈을 이렇게 망가뜨려 놨어.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

시큰거리는 눈과 콧등 위로 따뜻한 손길이 몽글몽글 내려앉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이 남자는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또다시 도망치고, 뒷걸음질 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끝내 제가 외면하고 비겁하게 굴면, 그땐 또 어쩌려고 했던 걸까. 어디까지 망가지려 했던 건가. 무엇 하나, 계산 없이 움직이지 않는 남자임을 알기에 돌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그렇게 봐. 이젠 좀 내가 가엾어?”

엉망으로 흔들리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하나도.”

바람 빠지는 소리로 낮게 웃은 그가 이마 위에 느른히 입술을 붙였다. 뜨거운 숨이 맞닿기 무섭게 온몸에 꽃이 피듯 열이 일었다. 온기 어린 심장이 그와 같은 박으로 맥동했다.

“망가진 나를 불쌍히 여겨.”

뜨거운 숨이 맞닿기 무섭게 온몸에 꽃이 피듯 열이 일었다.

“불쌍한 내 옆에 있어 주고.”

“…….

“그거면 돼.”

함께 망가지고 싶었다. 기꺼이.

커다란 손이 제 허리를 들어 올리듯 받쳐 안았다. 발끝을 세우고, 고개를 힘껏 꺾어 그의 목을 꽉 끌어당겨 안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이성이 돌아오고 저도 모르게 떠오른 기억에 얼른 몸을 떼어 냈다. 가물대는 눈을 손등으로 비벼 가며 다친 그의 가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피범벅이 되어 엉망으로 뭉그러진 상처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남자의 손이 다시 자석처럼 그녀의 허리를 제 앞으로 끌어당겨 옭았다.

“하, 이거…, 서정혁 씨 계속 피나요. 알아요?”

“그러게. 피 흘리는 사람 주먹으로 패 놓곤.”

그제야 격해진 감정에 정신이 나가 그의 가슴과 어깨에 제멋대로 주먹을 휘둘렀던 일이 떠올랐다. 핏줄이 터질 만큼 울어대 발개진 눈동자가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그러곤 다시 몸을 내빼듯 바르작거리자 그가 단호히 뇌까렸다.

“있어, 가만히.”

현서는 하릴없이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속삭였다.

“병원 가기 싫으면 약이라도 발라요, 그럼. 이런 거 치료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고생한다면서요.”

“별말을 다 기억하시네.”

그녀의 몸을 폭 끌어안은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해 줘, 그럼.”

그는 그대로 여자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려 들었다. 이 방의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통증에 창백한 얼굴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자연스레, 그녀의 하얗고 늘씬한 다리가 그의 허리와 골반에 감겼다. 동시에 솜털이 보드라운 목덜미를 쓰다듬어 내린 그가 그녀의 부은 눈두덩이 위에 지그시 입술을 붙였다.

현서는 떨리는 눈꺼풀을 내려 감았다. 그는 한참을 울어 벌겋게 열을 내는 양쪽 눈두덩이에 공평하게 쪽, 쪽, 입술을 부딪히며 그녀를 달랬다. 이윽고, 남자의 뜨거운 숨이 콧잔등 타고 흘러내려 와 붉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달래듯 천천히 입술을 열고 들어온 두툼한 살덩이가 습습한 열기를 내뿜으며 입 안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에 매달리듯 안겼고, 목마른 아이처럼 그의 타액을 빨아 마셨다. 상냥하고도 진득한 키스에 정신이 팔려 가쁜 숨을 헐떡거리는 사이, 푹신한 침대 위로 등이 뉘어졌다.

시선이 빼곡히 마주쳤다.

“불쌍한 서정혁 씨.”

홀린 듯 손을 뻗어 저만을 오롯이 담고 있는 눈동자를 직시하며 남자의 얼굴을 매만졌다. 매끈한 이마에서부터 짙고 깊은 눈매, 높게 솟아 뻗은 콧날, 다소 야위어 살짝 팬 뺨, 두툼한 입술과 날렵하면서도 남자다운 선을 지닌 턱 끝까지.

하나하나, 오감으로 새겨 넣으려는 듯 그 잘나고 그리웠던 얼굴선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는 거였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 모르게, 오래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진심을 토로하는 순간, 온몸이 찌르르 울리고 가슴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다시 입술이 맞부딪혔다.

우주에 오롯이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 저를 안은 남자의 손길이 너무 따뜻하고 다정해서 눈물이 날 만큼 이 황량하고 외로운 우주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별빛이 밝지 않아도 좋았다. 그의 어둠이 제 빛을 잠식하고, 지독한 제 불행이 그의 발목을 잡아챈대도 상관없었다.

깊고 새카만 우주 전체가 온전히 그들의 침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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