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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잡아타고 무작정 호텔로 향했다. 교통사고 합의 건을 의뢰해 왔던 그의 한국인 비서에게서 그가 H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호수는 따로 묻지 않았다. 그가 늘 묵는 방이 어디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꼭대기 층의 스위트룸 중 가장 끝 방. 그와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곳이기도 했다.
또각또각.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만큼이나 빠른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스위트룸 문 앞에 섰다. 너무 서두른 탓일까.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내지르듯 벨을 꾹 눌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질 않는 것 같았다. 1분, 1초가 억겁처럼 느껴져 마음이 달았다. 못 들은 걸까. 방이 비어 있는 걸까. 아니면, 이 방이 아닐지도 몰랐다. 조급함에 다시 한번 더 벨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달카닥, 소리를 내며 문이 힘없이 열렸다. 불현, 슬쩍 열린 그 틈새로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버티듯 겨우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현서는 본능적으로 다시 닫히려는 문을 얼른 잡아채 열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한 발짝 발을 디뎌선 그녀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깊게 일그러졌다.
“서정혁 씨…!”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핏기 없는 얼굴로 겨우 벽에 기댄 채 선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기울어진 그의 몸을 부축했다. 거대한 몸이 축 늘어진 솜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왜, 이, 왜 이래요? 어디 아파요? 왜…!”
놀라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묻던 그녀의 시선이 붉게 물든 그의 배스로브 라펠에 멈췄다. 라펠을 살짝 젖히자 탄탄한 가슴 근육이 깊게 베여 시뻘건 피를 내뿜고 있었다.
“하…. 무슨….”
다급히 고개를 돌려 엉망이 된 룸 안의 상황을 확인했다. 소파와 테이블에 깨진 와인병과 시뻘겋게 쏟아진 와인이 흥건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갑자기 목격한 상황에 경악한 현서는 입술을 덜덜 떨며 놀란 토끼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 되겠어요. 구급차 부를게요.”
흐릿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핸드백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 드는 찰나였다. 핸드폰을 쥐고 덜덜 떨며 액정을 켜는 가녀린 손가락 위로, 단단한 남자의 손이 완전히 덮어지듯 포개져 내렸다.
“당신이 구급차 타려는 거면 내가 걸어 주고.”
깊게 가라앉아 갈라진 낮은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보다 조금은 혈색이 돌아온 듯한 그가 벽에 뒷머리를 기대어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앞에 서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대는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랐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많이 다쳤으면 119에 전화를 하든가, 비서를 부르든가… 왜 혼자 이러고 있었어요? 와인병이 깨진 거예요? 갑자기 왜 병이….”
“이렇게 내 걱정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어.”
속을 들여다보려는 듯 새카맣게 쏟아지는 그의 시선에 울먹한 눈망울이 어룽어룽 흔들거렸다. 아니라는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대로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지없이 또 들키고 만 거였다.
입술을 앙다물고 숨을 삼켰다. 하얀 미간은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듯 찌푸려져 있었다.
“손 때문에.”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올려 보인 손등에 상처 자국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통증이 와서 약 찾는다고 움직이다가 병을 깨뜨렸어. 깨진 조각에 보다시피, 이렇게 됐고.”
“약… 약은요? 먹었어요?”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는 남자의 이마엔 여전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하….”
그제야 현서의 붉은 잇새에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직도 뭐가 이렇게… 계속 아픈 거예요? 정신 못 차리고 다칠 만큼?”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원망하듯 물었다. 왜 이렇게 계속 아픈 거냐는, 자신이 보지 못한 곳에서 얼마나 또 아팠던 거냐 묻는 거였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다시 붉게 젖은 배스로브 자락을 잡아 쥐고 깊게 긁힌 상처를 살폈다. 하얀 손가락에 핏물이 묻으려는 찰나, 그의 손이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봐요. 다쳤잖아요. 피도 많이 나고 제법 베인 것 같던데, 병원에 가든지 약이라도 발라야….”
“넌 왜 왔어.”
용건을 추궁하는 진득한 눈빛이 달라붙듯 그녀의 머리꼭지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그 집요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현서가 이 룸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금껏, 그는 그녀에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매정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갈 땐 언제고, 여기까지 왜 오셨냐고요.”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느른히 묻는 목소리 끝에 한숨 같은 고통이 섞여 있었다.
“나도…. 더는 못 버티겠어서요.”
달싹이던 붉은 입술이 떨리는 소리를 냈다. 제멋대로, 맹렬히 들끓는 감정을 인정하듯이. 들끓는 제 감정을 모조리 쏟아 내고야 말겠단 선전 포고였다.
“당신이야말로 왜 돌아왔어요?”
오묘한 고요가 내려앉았고, 도리어 감정은 격해졌다. 이미 제 목소리엔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울음이 뒤섞이고 있었다.
“정말로 나, 내 결심, 돌려 보겠다고 왔어요? 그 말도 안 되는 기대로?”
그는 답이 없었다.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 주겠다는 듯, 그저 태연하고도 친절한 침묵으로 들끓는 제 감정을 토닥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정혁 씨는…, 쉽게 용서가 돼요?”
아무렇게나 갈라진 목소리로 미련해 빠진 그를 힐난했다.
“당신 동생 그렇게 만들고, 멀쩡했던 당신 집안 풍비박산 내 놓고, 서정혁 씨 당신 인생 평생 지옥처럼 만들어 놓은 사람인데. 그러고도 잘못했다, 미안했다 용서 한 번 안 구하고 제멋대로 정신 놓고. 저렇게 끝까지 이기적으로 구는 인간을, 용서할 수 있어요? 나는… 나는 안 돼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못 하겠어요. 우리 아빠 용서 못 해요, 나는.”
발개진 두 뺨 위로, 차마 단속하지 못한 뜨거운 물줄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이렇게 용서가 안 되는데, 어떻게 내가 내 감정대로만 해요? 내가… 내가 감히 어떻게 뻔뻔하게 당신 얼굴을 보면서 살아요? 이게 말이 돼요…? 당신은 내 얼굴 보면서 우리 아빠 안 떠올릴 수 있어요? 죽은 당신 가족들 생각 안 할 수 있냐구요. 나 원망 안 할 자신은요? 평생 나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거, 확신해요?”
흥분해 파르르 떨리는 제 목소리와 달리, 입을 굳게 닫아 잠근 서정혁은 그저 짙은 눈동자만 깊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깊고도 진득한 시선이었다.
무겁고 버거운 침묵이 켜켜이 쌓여 갔다.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주변 공기에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사방이 고요해 떨리는 제 숨소리가 꼭 천둥처럼 크게 부풀려져 들렸다.
한참 만에야, 그러쥔 그녀의 손목을 조금 더 꽉 고쳐 잡은 그가 느긋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서웠어?”
침묵이 깨졌다. 푹 가라앉은 목소리에 등줄기에 소름이 일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차분히 직시해 오는 그의 눈빛이 아팠다.
“내가 당신 원망할까 봐.”
“…….
“내가 널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섭고 두려워서 여태 나 밀어내느라 애를 쓴 거였어?”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와 버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저를 바라보는 서정혁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도리어 이상한 용기가 생겨 버렸다.
“왜 자꾸… 왜 자꾸만 사람을 흔들어요? 왜 흔들어요, 왜! 왜 겨우 참고 억누르고 잘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속을 뒤집지 못해서 안달이냐구요, 왜.”
항의하듯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젖은 입술을 짓이겼다.
당신이 어떻게 흔들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거라, 되지도 않을 거짓말을 내뱉고 위악을 떨었으나 서정혁도, 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결연하던 결심과 의지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부질없이 바스러져 버릴 것들인지.
“어떻게 안 흔들려요. 당신이 이러는데, 자꾸 들쑤시고 흔드는데 어떻게 내가 안 흔들리고, 버텨….”
그는 답 대신 서럽게 몸을 떨며 진심을 시인하는 그녀의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 따뜻하고 다정한 체온, 미치도록 그립고 또 간절했던 온기에 흐읍, 기어코 짓눌린 소리가 제멋대로 터져 나왔다. 뒤통수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커다란 손은 설움을 북돋는다.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나쁘게, 뻔뻔하게… 만들어요, 왜… 날…! 날 이렇게 힘들게 해요. 왜….”
원망하듯 그의 로브 자락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묻었다. 꾹 참았던 격렬하고도 분한 감각이 모조리 쏟아져 나와 작은 주먹으로 남자의 너른 어깨를 밀어내듯 찧어 댔다. 팡팡, 있는 힘을 주었으나 여린 몸은 부질없는 솜 방망이질처럼 이리저리 나부대기만 했다. 크고 단단한 남자의 품은 도리어 그 작은 흔들림마저 완벽히 집어삼키듯 그녀를 폭 감싸 버릴 뿐이었다.
새빨간 열기를 뿜는 눈꼬리가 그의 가슴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엉엉, 그대로 안겨 서서 한참을 울었다. 있는 모든 감정을 쥐어짜듯 우느라 힘이 죄 빠져 버린 몸을 그의 품에 완전히 묻어 의지하고 아이처럼 파고들었다.
흘끅대는 볼썽사나운 소리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갔다. 그럼에도 말없이 툭, 툭. 등을 타고 울리는 다정하고 따뜻한 박자는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다.
밤 깊은 유리창 밖, 멈춘 시간의 풍경 사이로 하얀 눈발이 흩날렸다. 솜털 같고 부드러운 눈송이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한 데 겹쳐진 몸 위로 포근히 내려앉았다. 영원이길 바라는 고요가 안식처럼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