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법원 입구를 걸어 나오던 현서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천천히 멈췄다. 저와 눈을 맞추며 기다렸단 듯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는 남자. 집요하게 저를 바라보는 그 고집스러운 눈동자는 분명 쉬이 포기를 하지 않겠단 의미였다.
마른침을 삼키고 그 앞에 다가가 마주 섰다.
“…서정혁 씨.”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그를 부르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제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을 빼앗아 갔다.
“타. 무슨 말 하려는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타서 얘기해. 춥다.”
제 가방을 빼앗아 간 그가 성큼성큼 세단 앞머리를 지나쳐 운전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하릴없이 차에 올랐다. 그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건지 저 역시 대충 짐작은 가서.
법원을 빠져나온 차는 금세 복잡한 도로 한복판으로 미끄러져 달렸다. 운전대를 쥔 손을 무심코 바라봤다. 여전히 선명한 상처 자국에 마음이 퍼석거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 의뢰는 왜 안 받아. 사건 골라 가며 받을 처지는 아닌 것 같던데.”
“걱정하시는 만큼의 처지는 아니라서요.”
“알고 싶네, 당신 처지가 어떤지.”
“살 만합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물욕이 없어서요.”
흘긋,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입꼬리가 쓰게 말려 올라갔다. 그 시선에 목이 타 말을 돌렸다.
“어디 가는 거예요?”
복잡한 도심을 벗어난 차는 외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무 대답이 없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선 굵은 이목구비와 우뚝 솟은 콧날, 기품있게 이어지는 날래고 단단한 턱선, 남자답게 솟아 도드라진 목울대까지.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서정혁은 그대로였다.
꿈이라면 깨고 싶고, 또 깨고 싶지 않았다. 제 눈앞에 그토록 그리웠던 남자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간절히 믿고 싶었다. 이기적이고 못난 욕심이 제 주제도 모르고 드글드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스스로가 경멸스러울 만큼.
얼마나 달렸을까. 점점 더 외곽으로 내달리는 차창 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다 불현 낯설지 않은 느낌에 입술을 짓깨물었다. 아무래도 제 아버지, 차선엽의 요양원으로 향하는 게 분명했다.
“설마 지금, 우리 아빠한테 가는 거예요?”
홱, 고개를 돌려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남자의 시선은 태연히 전방만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정혁 씨.”
“맞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이마를 짚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기막힌 헛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요양원 근처에 다다른 도로가 하나의 차선으로 좁아지고 있었다.
“왜 이래요, 진짜?”
“당신 결론을 좀 바꿔 보려고.”
“뭐라고요?”
“생각할 시간을 차고 넘치다 못해 기막힐 정도로 줬는데도 결론이 같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기껏 죽어라 참고 기다린 게 다 헛짓거리였단 소리잖아.”
죽어라 참고 기다렸다. 지난 2년의 부재를 그렇게 설명하는 남자의 말에 가슴이 덜커덕댔다. 목 끝이 까끌거렸다.
“어떻게든 차현서 마음 돌려 보겠다고 하는 발악이기도 해. 지금 눈이 돌아서, 내가.”
“거길 가서…. 가서, 뭘 어쩌려는 거예요? 우리 아빠, 몇 달 만에 겨우 의식 차려 깨어난 이후로 사람도 못 알아봐요. 눈만 뜨고 있지 아무런 사고도, 판단도 못 해요. 낼 수 있는 소리라곤 짐승 소리 같은 말들 뿐이고,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을 안 보이니 제대로 알아듣는지도 의심스럽고요. 기본적인 의사소통은커녕 당신 딸도 못 알아보는 바보가 됐는데, 그런 사람한테 가서 뭘 어쩐다는 거예요?”
“왜. 내가 당신 아버지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무서워?”
“그런 말이 아니라…! 하…. 장난 그만해요!”
“아. 당신 눈엔 이게 장난인가?”
“빈정대지 마요. 겨우 마음 잡고 버티고 있는 사람 들쑤시고 찔러 보는 게 재밌어요?”
“누구 마음대로 마음을 잡아? 왜 버텨.”
운전대를 꽉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굵게 불거져 올랐다. 사납게 추궁하는 남자의 눈꼬리가 서늘히 저를 향해 왔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내가 왜 마음을 잡고 버텨야 했는지, 모르는 거 아니면서 왜…!”
끼이익. 차가 갓길에 멈춰 섰다. 미간을 훅, 일그러뜨린 남자가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저를 응시했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내뱉는 한숨이 퍽 무거웠다. 바라보는 눈동자에 깊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런 사람이었단 걸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속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들쑤셔 기어코 밑바닥까지 내보이게 만드는 남자임을.
“너야말로 몰라?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정말 몰라서 사람 미치게 해?”
침착히 묻는 목소리와 달리 새카만 동공은 알 수 없는 열화로 들끓고 있었다. 알고 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아니, 모를 수가 없는 눈빛이었다. 빌고, 애원하고, 갈망하는 눈빛. 그 새카만 눈에 비쳐 일렁이는 제 눈빛 또한 같은 빛이었다.
“아니까 이러는 거예요. 서정혁 씨랑 나, 이러면 안 되는 사람들인 거 너무 잘 알아서.”
“몰라, 나는. 뭐가, 왜 안 되는데.”
“하, 적어도 우리가 사랑 놀음이나 하고 있을 사이 아니라는 거. 그건 아시지 않아요?”
“알아도 그냥 좀 모르는 척 놀 순 없어?”
쓴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악물었다. 일순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다 알면서 추궁을 일삼는 남자의 악랄함이 원망스러웠다.
“상처 주기 싫어요. 상처받는 건, 더 싫고.”
진심이었다. 그가 받았고 받아야 할 상처를 걱정해서일 뿐이란 변명은 명백한 위선이었다. 기실 상처가 두려워 떨고 있는 쪽은 도리어 저인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그에게 보내는 경고인 셈이었다. 결국, 나도 그 사람의 딸이라고. 비겁하고, 저열하고, 이기적인 그 사람의 핏줄이라고.
“안 되겠어요. 그냥 여기서 내릴게요.”
감정을 짓누른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제 표정이 퍽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감추려 고개를 돌리며 푹 숙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예감에 차 문을 열고 그대로 도망쳐 나왔다. 비겁하고 구질구질한 방법이라 비난한대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 말고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 버겁고 무거운 감정을 어떻게 버텨 내야 하는지, 어떻게 회피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차가 선 방향과 반대의 방향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발끝에 있는 대로 힘을 주어 빠르게 걸었으나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손목을 채어 잡는 힘에 그대로 몸이 휘청대며 돌려세워졌다.
“차현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지며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내가 어떡할까.”
“…….
“어떻게 해, 그럼.”
“…….
“내가 널 붙잡을 방법을 알려 줘.”
어울리지도 않을 서정혁의 애원에 머리가 핑 돌았다.
“더 기다리란 말만 빼고. 알려 줘, 뭐든.”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뭐라고 이 잘나 빠지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남자가 이렇게까지 하나.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어쩌자고 기어코 이렇게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야 마는 건가.
얼얼하던 목구멍에 뜨겁고 축축한 것이 툭, 치밀어 올랐다. 부지불식간 이미 울음이 터져 버린 거였다.
겨우 뿌리쳐 낸 남자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 그를 외면하고, 그 황량하고 차가운 길을 따라 걸었다.
***
새카만 하늘 아래, 반짝반짝 빛을 내는 도시의 밤 풍경이 쓸쓸했다. 영하의 날씨였으나 열 올라 홧홧한 뺨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퍽 반갑기만 했다. 뭐라도 좋으니 이 열화를 좀 식혀 주었으면. 현서는 바람에 흐르는 머리칼을 길게 쓸어 넘겼다.
“당신 결론을 좀 바꿔 보려고.”
“지금 눈이 돌아서, 내가.”
자꾸 귓가에 환청처럼 되풀이되는 목소리에 눈가가 희미하게 어룽댔다. 이럴 줄 알았다. 그가 눈앞에 다시 나타난 순간, 그 깊이 모를 블랙홀 같은 눈동자를 마주했던 그 순간. 간신히 붙잡아 유지하던 제 모든 게 다 속절없이 흔들리고, 맥없이 끊어져 버릴 거란 걸 모르지 않았다. 늘 두려웠고, 겁났고, 또 그리웠다.
그러므로 늘 간절했던 남자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 그녀에겐 또 다른 위협이 되어 버린 거였다.
“누구 마음대로 마음을 잡아? 왜 버텨.”
오랜 예감처럼, 서정혁은 있는 대로 저를 흔들며 힐난했다. 무의미한 짓이라고. 미련한 일이라고. 알면서도 외면하려 했던 진실을 눈앞에 들이밀어 보이는 남자는 여전히도 단호하고 잔인했다.
차갑고 쓸쓸한 자리에 오래도록 얼어 앉아 있었다. 맞잡아 움켜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안간힘을 쓰듯이.
“내가 어떡할까.”
“내가 널 붙잡을 방법을 알려 줘.”
그러나 곧, 속절없이 떠오른 그의 애원에 모든 부질 없는 것들이 다 와르르 쏟아지고 휩쓸려 버린다. 그의 진심은 덧없는 제 노력과 인내를 무자비하게 비웃고 있었다. 무력했다. 방법을 모른다던 남자의 위선에 하릴없이 몸만 떨었을 뿐.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진 그 짧은 시간에, 지난 2년간의 모든 감정들이 물 밀듯 밀려와 전신을 뒤흔들었다. 감정에 휩쓸린 눈앞이 어찔할 만큼.
휩쓸려 그 빈자리를 채운 불안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날이 밝아 어둠이 물러나고 나면, 이 꽉 차오른 감정의 둑을 더는 터뜨릴 기회가 없을지 모른단 조바심이 든 거였다. 터뜨리지 못한 둑은 무너질 것이고, 무너지면 그때야말로 아무 손도 쓰지 못한 채로 물살에 휩쓸려 나갈 테니까.
오래 얼어 있던 몸으로 벤치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아도 그냥 좀 모르는 척 놀 순 없어?”
그의 말대로, 모르는 척 한쪽 눈을 가리고 보니 도리어 그동안 숨기고 외면했던 진심이 치밀어 올랐다. 치민 감정은 금세 이기적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충분히 슬펐고, 충분히 아팠다. 이제 그만 모르는 척 어깨에 덕지덕지 붙은 짐들을 좀 내려놔도 되지 않을까.
결국, 정신없이 혼융된 감정의 귀결은 하나였다. 더 늦기 전에, 그를 다시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