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104화 (10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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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난 시간, 수없이 가정하고 상상했던 상황이었다. 행여나 다시 서정혁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또 어떻게 그를 밀어내고 돌아서야 할지.

그러나 정작 예고 없는 상황이 닥치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졌다. 수십, 수백 번씩 돌려 보고 되뇌던 시뮬레이션들은 이 갑작스러운 재회에 하등 무의미하기만 했다.

한참을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눈앞이 일렁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흐려져서,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분간이 잘 안 됐다. 꿈이라면 깨고 싶었다. 어차피 정해진 엔딩은 분명 악몽일 테니.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겁니까?”

남자가 제 앞의 의자를 향해 턱짓하며 낮게 물었다. 앉으란 소리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그와 마주 앉았다. 무릎 위, 자꾸만 떨리는 손을 어쩌지 못하고 바짝 움켜쥐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를 훑어 내리는 촘촘한 그 시선에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잘 지냈나 봅니다. 좋아 보이네요.”

조롱인 건지, 진심인 건지. 고저 없는 어조로 안부를 묻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입 안의 여린 살을 꾹 눌러 깨물었다. 얼른 이성을 차리고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교통사고 합의 대리를 의뢰하신다고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억누르며 말문을 열었다. 긴 다리를 꼬고 느긋이 고개를 까딱이며 암 레스트에 팔을 얹은 남자는 자못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괘씸했다. 누가 누구에게 잘 지냈냐며 좋아 보인다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건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 사건의 법률 대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죠.”

“의뢰인이 서정혁 씨인 줄 알았으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라서요.”

“네. 그럴 것 같아서 말 안 했어요.”

그는 여전히 뻔뻔하고, 여전히 유들거리는 말투로 말문을 막았다.

“저녁 시간 다 됐는데, 밥은 먹었습니까?”

소매 깃을 슬쩍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한 그가 연이어 천연덕스러운 질문을 던져 왔다.

“아직이면 식사를 하면서 얘기하죠.”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손을 든 그의 호출을 받고 온 서버가 메뉴가 적힌 패드를 내밀어 보였다. 그가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2년 만에 제멋대로 나타나 막무가내로 구는 그를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른 법률 대리인을 알아보시죠. 원하신다면 적당한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사무장님께 상황 전달해 놓을 테니….”

“네 생각엔 내가 지금 뭘 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탁. 한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은 그가 도리어 제게 되묻고 추궁을 해 왔다. 눈빛을 바꾼 남자의 새카만 시선이 아프게 빗발쳤다.

답은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인정하는 순간, 그리웠던 마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2년. 그 정도면 생각할 시간, 결론 낼 시간 충분히 줬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하는데, 난.”

“서정혁 씨.”

“사람 피 말리는 것도 정도껏 해.”

“난 서정혁 씨 피 말린 적 없어요.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2년 전에 난 분명히 헤어지자고 말했고 우린 이미 그때 끝났어요.”

“나야말로 분명히 말했어. 생각 다시 하라고. 결론 다시 내라고. 기다리겠다고.”

“그건 서정혁 씨 혼자 일방적으로….”

“일방적인 통보는 당신이 먼저 했어.”

흐릿해지려는 눈망울을 몇 번이고 깜빡여가며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미안한데요, 서정혁 씨. 그때나 지금이나 내 결론은 같아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머리칼을 길게 쓸어올렸다.

“뭘 기대하고 오신 건지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헛걸음하셨어요. 보다시피 전 잘살고 있고 지금의 평온한 생활이 만족스러워요.”

남자의 시선이 제 무릎 위, 말하며 아무렇게나 쥐어뜯는 제 손끝에 가 있었다.

“…어떻게 흔드셔도, 안 흔들려요, 저.”

“의지가 결연하시네.”

여지없이 제 속을 읽어 버린, 제멋대로 갈라지려는 목소리를 겨우 짓누르며 애를 쓰는 저를, 그저 한마디 말로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서정혁이 미웠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습관처럼 도망이 치고 싶어졌다. 뒷걸음질을 치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뒤돌아 나왔다. 가방 손잡이를 짓이기듯 틀어쥐며 새는 울음을 참았으나 어느새 차오른 물기에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붉어진 눈가가 견딜 수 없이 시큰거렸다.

***

고개를 모로 기울여 입술에 묻은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장초 끝에 벌건 불이 붙었다. 한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툭, 던져 올리곤 의자에 몸을 묻으며 피곤한 눈을 내리감았다. 긴 한숨이 뿌옇게 퍼져 나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결론은 같아요.”

“어떻게 흔드셔도 안 흔들려요, 저.”

파들대는 뺨을 툭, 한번 찌르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떨고 있었던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모진 말을 잘도 내뱉는 게 안쓰럽기도, 괘씸하기도 해 혼란스러웠다.

2년. 마음을 감당하려 몸을 혹사시키길 택했다. 정신없이 달려들어 일이라도 해치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그랬다. 제게는 지옥 같고 끔찍했던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여자에겐 만족스럽고 평온한 일상일 뿐이었단 말이 아팠다.

또다시 밀어내고 도망쳐 버릴 그녀의 반응을 예상 못 했던 바는 아니었다. 그 착해 빠지고 고집 센 여자가 단번에 유순한 얼굴로 제 품에 안겨 오리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럴 여자였다면 이토록 애달프게 그 긴 시간을 홀로 전전긍긍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뭘 망설여? 지금이라도 당장 가서 억지로라도 끌고 오면 되잖아. 원하면 어떻게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갖고 보는 인간이 당신 아니었어?”

미셸의 눈에도 제가 얼마나 멍청하게 보였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억지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 흔들어야만 차현서를 흔들 수 있을지. 앞이 아득했다.

[차라리 매달려 보지 그러셨어요. 의외로 그게 나았을 것도 같은데요.]

어느새 들어온 레오가 테이블 위, 차 키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감고 있던 눈을 떠올린 정혁이 뭐하는 거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휴가 와서까지 상사 뒤치다꺼리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고 싶네요. 이제 좀 저를 놔 주세요, 보스.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못 쉬어 본 비서를 조금이라도 가엽게 여기신다면?]

[지금 내 얼굴 뻔히 보면서도 휴가 타령이 하고 싶어?]

[뭐, 남녀 간의 문제까진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가 없으니까요.]

[이럴 거면서 왜 따라왔어. 네 상사가 같은 여자한테 또 어떻게 차이나 궁금해서?]

[진귀한 광경이긴 하죠. 미셸이 상황 보고 상세히 하라고 하던데요.]

[그래. 좋은 구경났다, 아주.]

팔걸이에 팔꿈치를 괸 채, 담배를 끼운 손으로 앞이마를 꾹 눌러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능글거리는 농담을 하면서도 제 앞에 새 약통을 툭, 내밀어 올리는 레오였다.

[필요한 거 있음 언제든 호출하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릴 잘도 하네.]

[꼭 두 분 같죠.]

[꺼져. 재수 없어.]

[담배는 좀 적당히 피우시고요. 차라리 술을 드시라네요, 제임스는.]

마지막 잔소리를 마친 레오가 뚜벅뚜벅, 서재를 걸어 나갔다.

말은 투박히 해도 일부러 제게 시간을 주고 싶어 자리를 피해 주는 거라는 걸 안다. 늘 그랬듯 가장 가까이에서 저를 지켜봐 온 사람이 레오였으므로.

지난 시간, 차현서 때문에 엉망으로 무너지고 망가진 제 모습을 똑똑이 목격한 것 또한 그뿐이었고. 차현서의 선고를 마냥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 이젠 정말 한계에 다다랐음을, 그러므로 자신이 얼마나 필사적인 심정으로 여기까지 다시 돌아왔는지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그이기도 했다.

그 누가 알겠는가. 겉보기엔 여유롭고 화려하기만 한 라이언 서가 실은 이렇게나 엉망진창으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 연명하듯 버티고 있다는 걸.

멍하니, 레오가 놓고 간 약통을 바라봤다. 견디기 힘든 마음을 약에 의지해 하루하루 버텨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 독한 그리움을 짓누르고 외면할 수 있을까.

더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어졌다.

원한다면 차현서의 지난 2년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여자 하나쯤, 사람 붙여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훔쳐보는 것쯤은 일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간단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은 까닭은 단순했다. 정말로 견딜 수 없어질까 봐. 제 예상과 결심보다 더 빨리 무너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무심코 손을 더듬어 담뱃갑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빈 껍데기만 손끝에 쥐어졌다. 연달아 피운 담배가 기어코 동이 나고 만 거였다.

“하….”

긴 한숨을 내쉬며 습관처럼 손끝에 걸린 회중시계를 달카닥, 열어젖혔다.

“이제 동생 얼굴 실컷 보세요. 제가 어렵게 펼쳐 놨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얼굴들을 마주하면서도 또 절절히 그리워진 얼굴을 간절히 떠올렸다. 제멋대로 펼쳐 놓고, 제멋대로 접어 버린 그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서정혁 씨 얼굴 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완전 지옥이야.”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 여린 마음이 여전히 지옥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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