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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데 가자니까.”
현서는 제 앞에 정갈하게 서빙된 우동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왜. 너도 여기 좋아하면서. 너랑 여기 온 지 꽤 된 거 같은데.”
준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우동 좋아하고… 그러니까 혼자서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고, 나에 대해서.”
저도 모르게 멍하니 동그란 눈만 깜빡였다. 지금 제 자리에 앉아 유치한 말을 잘도 내뱉던 그 어느 날의 남자가 선연히 떠올라서였다.
“멍 때리지 말고 먹어.”
준한이 기어코 현서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주며 그릇을 내밀었다. 돌연 몸집을 불린 그리움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그대로 있다간 울음이 올라올 것 같아 아무렇게나 우동 면발을 삼켰다.
“참. 유을 엔터 현우진 대표가 너 좀 소개해 달라더라. 개인적으로 꼭 너한테 의뢰하고 싶은 사건이 있다나. 청송엔 개인 사건은 의뢰 안 하시겠대. 그 인간도 좀 이상한 인간이긴 한데 그래도 비즈니스는 깔끔하게 하는 편… 야!”
놀라 손을 뻗은 준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시뻘겋게 붉어진 그녀의 눈자위가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체해, 천천히 먹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곤 휴지를 쑥 뽑아 눈꼬리를 훔치며 어설피 웃었다. 재빨리 표정을 읽어 낸 준한의 눈썹이 들썩였다.
“차현서.”
“…….
“울어, 너?”
우느냐 묻는 질문을 듣고 나니 더 마음이 일렁여 딴소리만 뱉었다.
“그러게 나 이거 먹기 싫다니까, 왜 여길 와서는.”
괜스레 준한을 탓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제야 준한은 어렴풋이 이유를 짐작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이곳에 오자고 할 때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방심하는 사이 실수를 했다.
“서정혁이랑 여기도 왔었냐?”
현서는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물만 들이켰다. 삼켜도 삼켜도, 삼켜지지 않는 무언가가 목구멍에 딱 막혀 걸린 듯 아릿했다.
“도대체 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놈이랑….”
채 잇지 못한 준한의 목소리 끝에 원망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게. 그 짧은 시간 동안 뭘 그렇게 많이 한 걸까. 그와의 고작 몇 개월 시간이 삶을, 생(生) 전체를 뿌리까지 뒤흔들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리움은 기습적이었다. 잘만 살다가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씩씩하게 생활을 하다가도 어느 한순간 숨이 막힐 듯 아득히 그가 보고 싶어지는 때가 있었다. 바로 오늘, 지금처럼.
서정혁은 치밀했다. 짧은 시간, 모든 공간은 물론이고 물건과 몸 구석구석에까지 치밀하고 악랄하게 자신의 흔적을 아로새겨 놨다. 이렇게라도 벌을 주고 싶었던 걸까.
원망스러웠다. 빌어먹을 세상이 온통 서정혁의 흔적들로 뒤덮여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증기 덩어리도, 우주에서 날아오는 돌덩이마저도 그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뿐이어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아등바등, 이 악물고 잘 버텨봐도 결국 이렇게, 한순간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마니까.
“그놈은 요즘 그렇게나 잘 먹고 잘산다던데.”
2년 전, 제가 밀어냈던 남자는 곧장 뉴욕으로 돌아갔고 1년 전엔 후계 싸움에서 밀려 결국 골드스톤 부회장 자리를 자진해 사퇴했단 소식을 들었다. 이후, 라이언 서가 없는 골드스톤은 연이은 투자 실패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몇 분기 만에 수백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봤다.
실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앤더슨이 사임한 후엔 라이언을 다시 단독 대표 이사로 추대하기도 했으나 그는 그들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어느 이름 없는 부티크 투자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분기, 이른바 벌지 브래킷(Bulge Bracket)이라 불리는 미국 내 톱 티어 은행 중 하나인 베가 파트너스를 인수해 월가를 뒤흔들어 놓은 메츠 뱅크가 바로 그의 새 둥지였다.
아무래도 무너진 건 혼자뿐인 듯싶었다. 남자는 여전히 굳건히 건재했고, 얄미우리만큼 잘만 살았다. 저가 없는 세상에서도.
“나도 잘 먹고 잘살잖아. 가끔 이렇게 울컥울컥하는 거 빼면.”
“가끔 맞아? 너무 잦은 것 같은데.”
축축한 눈망울로 항변하듯 젓가락을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표정을 지우고 울음과 함께 음식을 삼켰다.
“맞아, 가끔.”
준한은 제 대답이 못 미더운 듯 한참이나 더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속으로 지금 나 되게 구질구질하고 청승맞다 생각하지?”
“아니.”
“솔이는 그러던데. 구질구질, 청승 떤다고.”
“걔는 너한테 미련 없는 애고.”
덤덤히 말하는 그를 응시했다.
“걱정 마. 나도 너처럼 노력하는 중이니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젓가락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도 너만큼 잘 먹고 잘살잖아. 가끔 나도 욱하긴 하지만 너보단 참을 만한 정도니까 그렇게 불쌍하게 안 쳐다봐도 돼.”
불쌍하게 생각한 적 없었다. 다만, 그 오랜 시간 그 마음을 단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던 둔감함과 소홀함이 미안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알았더라면, 더 단호하고 확실히 밀어내 그 지난했을 기다림의 시간을 줄여 줄 수 있었을 텐데 싶어서.
준한은 추가로 서빙된 튀김 그릇을 통째로 제 앞에 밀어 주며 다시 우동 그릇에 코를 박았다.
“선배 일부러 나 더 미안하라고 이러지.”
“잘 아네.”
“못됐다, 진짜.”
“아무래도 너 못된 놈 좋아하는 거 같아서. 차현서 네 취향에 맞춰 보려고 그런다, 내가. 왜.”
농담인 듯 내뱉는 말이지만 확연한 진심임을 잘 알기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쫄지 마. 안 잡아먹어.”
준한이 얼어붙은 저를 마주 보며 혀를 찼다.
“우동 먹다가 갑자기 다른 놈 보고 싶다고 펑펑 우는 여자한테, 내가 행여나. 에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 여기 생맥주 좀 주세요.”
아무래도 알코올의 힘이 필요했다. 오늘 같은 날은 특히나 더.
***
주차를 마친 뒤 시동을 끄고 컵 홀더에 꽂아 놓은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과음을 했다. 여자라고 은근히 무시하고 내리깔며 얕보는, 어느 재수 없는 인간에게 지기 싫어 간만에 객기를 부린 탓이었다. 회사를 나오기 전에도 이런 일은 흔했으나, 그나마 저를 둘러싸던 울타리가 하나 거둬지고 나서는 더더욱 보호막 하나 없는 광야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두통약을 한 알 털어 꿀꺽 집어삼키곤 솔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H호텔 1층 카페테리아, 5시 30분.」
자동차 사고와 관련해 연락해 온 의뢰인이라 했다. 가벼운 접촉 사고 후 상대방와 원만한 합의를 하고 싶어, 사건과 관련한 법률 대리 업무 전반을 위임하고 싶다고.
그것 외에 자세한 사건 요약은 없었다. 의아했으나 그냥 바로 직접 만나서 얘길 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던 솔이의 말을 되새기며 차에서 내렸다. 이런 소통 없는 의뢰인이 퍽 낯선 경우도 아니었으므로.
골드스톤 나온 이후 무료 변론이나 국선 변호 사건만 수임하는 건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선 어찌 됐든 일반 사건들도 맡아 돈을 벌어야 했다.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버지 부양과 저 하나만 믿고 따라 나온 솔이를 위해서라도.
다만, 대체로 맡는 사건의 종류는 이혼 관련 가사소송이나 교통사고 합의 건 등 전보단 확연 규모가 좀 작은 케이스들이었다.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벌이도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준한의 말대로 다시 있던 로펌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곳을 알아볼 수도 있었으나 딱 적당한 만큼의 일과 돈벌이를 하는 지금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냥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롭게, 소소하게 사는 게 만족스러웠다. 이 평범한 일상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잘 알기에 더욱 그랬다.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둔 호텔의 풍경은 다소 들뜨고 들썩이는 분위기였다. 로비에 흐르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의 캐럴이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각종 오너먼트들로 장식된 입구, 그리고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따뜻한 색감의 전구들이 그런 분위기를 더했다.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이 저마다 부드러운 미소로 함께 걷고, 마주하고, 걸어가고 있었다.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모든 행복과 안온함이 저를 피해 제 주변으로만 흐르는 것 같은 착각 같은.
타박, 카페 입구에서 머뭇거리듯 멈춰 서자 직원이 천천히 걸어 나와 눈짓을 했다.
“예약되어 있으십니까?”
“아, 아마 되어 있을 것 같긴 한데. 제가 의뢰인 분 성함을 정확히 전달 못 받아서요. 잠시만요….”
곤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차하면 솔이에게 바로 전화를 해 이름을 물을 생각이었으나 직원이 곧 아는 체를 하며 재차 물어왔다.
“아. 혹시, 차현서 변호사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직원은 곧장 안쪽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쪽으로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카페 가장 안쪽의 공간까지 꽤 한참을 걸었다. 어느 순간, 다소 번잡스러운 입구와 달리 차분하고 고요해진 분위기에 자못 기시감이 들었다. 그 언제였던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얼토당토않을 계약서에 사인을 하겠다 찾아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지독히도, 그리고 숱하게도 남겨 놓은 이 흔적의 조각들을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워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더는 한계 같았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견뎌야 할지. 돌연, 자신이 없어진 거였다.
상념에 빠져 멍하니 앞서 걷는 직원의 어깨만 보고 걷다 발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서는 직원의 상냥한 미소에 살짝 묵례를 하고 시선을 그 너머로 옮겨 가던 순간이었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남자의 옆얼굴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일순 끼이익, 귀를 긁는 소리를 내며 시간이 멈췄다. 부지불식간 발등 위로 쿵 떨어진 심장이 삐거덕거리며 나뒹굴었고, 머릿속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새하얗게 비워졌다. 주변이 온통 뿌옇게 흐려져 보였다. 오래 그리워했던, 깊고 새카만 눈동자만이 저를 향해 뜨겁게 쏟아졌다.
“오랜만이네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차현서 변호사님.”
시야엔, 여상히도 매끈하고 잘난 얼굴의 남자가 꿈처럼 가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