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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눈이 내렸다.
현서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고,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 위를 뽀득뽀득 걸었다. 좌우로 왔다 갔다, 몇 번이고 밟지 않은 곳을 찾아 걸음을 내디뎠다. 솜털처럼 푹신할 것 같은 눈이 발끝에서 허깨비처럼 눌려 사라지고 금세 뽀득하게 뭉쳐 내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였다.
머리 위론 계속 하얗고 작은 눈발이 흩날려 내리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봤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도 청명하기만 한 하늘이 꼭 그림처럼 파랬다.
이 정도 기상이면 혜성을 볼 수 있는 건가. 목도리를 둘둘 싸맨 새하얀 얼굴에 동그란 의문이 맺힐 때였다.
“같이 식사하고 가면 좋을 텐데.”
직접 수확한 귤을 주겠다며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온 여자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다음에요. 일정 있으신데 괜히 저 때문에 분위기 어수선해지는 게 죄송스러워서요.”
“별게 다 죄송스럽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서 드세요. 아주 맛있어요.”
머리가 희끗한 여자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아…. 자문비가 너무 비싼데요? 눈 와서 저 차도 안 가져왔는데,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다 들고 가라고요.”
“변호사님 힘세시잖아요. 애들하고 놀아줄 때 보니까 번쩍번쩍, 무거운 놈들도 잘 안아 주시던데요?”
여자의 농담에 현서는 그만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2년 전부터 꾸준히 무료 법률 자문 봉사를 하러 다니던 출소자 재활 센터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죽은 전 골드스톤 지사장 김영진의 아내라는 걸 알게 된 것 또한 우연이었다. 남편이 그렇게 죽고, 암 투병을 하던 첫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신앙에 의탁해 지금은 수녀원에서 소소한 행정 업무를 도우며 머무르고 있었다.
“아참. 다음 달에 오실 때는 제가 없을 거예요. 대신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계실 거구요.”
“어디 가세요?”
“미국엘 좀 다녀오려구요. 다음 달에 둘째가 학교 졸업을 해요.”
둘째 아들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축하드려요. 아드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을 텐데, 가셔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여자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정말이지, 그분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으려나. 이게 다 주님의 은총이죠. 저나 우리 애가 지금껏 이렇게 무사히 잘살고 있는 건.”
갑작스럽고도 연이은 불행 겪은 뒤, 그녀에겐 슬픔을 추스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경제적,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던 거다.
자살 전 김영진은 뭐라도 해 보겠단 객기에 섣불리 투자를 시도했다 사기를 당해 거액의 돈을 날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돈마저 암 투병을 하던 장남의 치료비로 다 써 버린 최악의 상황이었다. 평생을 가정주부로만 살아왔던 그녀가 갑자기 미국 유학 중인 아들의 학비와 체류비를 모두 감당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려던 때, 돌연 후원자가 나타났다. 국제 장학 재단을 통해, 그녀의 아들을 콕 집어 학비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온 익명의 후원자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 했다.
어찌 됐든 모두 다 그 덕이라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감사와 감동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세상에 신은 없어도 천사는 있는 모양이라고.
“근데 변호사님도 미국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었나요?”
오랜 제 이야기를 기억해 낸 여자가 무심코 물었다. 현서는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게요. 너무 바빠서….”
여자는 현서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일도 좋지만 쉬는 것도 중요해요. 평생 일밖에 모르던 남편 그렇게 허망히 보내 보고 나니 알겠더라구요.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게 많다는 걸. 좀 쉬엄쉬엄 일하세요. 취미생활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연애도 좀 하구요.”
“아, 또 잔소리하시네. 저 그만 갈게요.”
입을 삐죽 내밀며 그대로 돌아서는 현서를 보며 여자가 피식, 웃는다.
뽀드득, 뽀드득. 발끝에서 하얀 눈이 뭉그러지는 소리가 듣기 좋아 눈을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여전히 눈 맞는 게 좋았지만 이유는 좀 많이 달라졌다. 더 이상 남몰래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이 없어진 탓이었다. 도리어 눈을 맞으면 깊은 곳에 묻어 뒀던 그리움이 뭉글뭉글 부풀어 올랐다.
언젠가, 어느 날의 기억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눈 맞는 게 뭐가 좋냐 불퉁히 물으면서도 제 옆에서 오래도록 함께 눈 속을 걸어 줬던 사람. 빨갛게 얼어붙은 뺨을 쓰다듬고, 제 손을 맞잡아 포근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던 손길. 오롯이 저만을 바라보던 짙은 시선. 그 뜨겁고도 선연한 기억이 꼭 어제 일인 것처럼 하얗게 피어났다.
눈 속에 머무는 시간. 그 시간만큼은 그리운 누군가를 마음껏 그리워해도 좋은 유일한 시간이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서 익숙한 버스를 골라 탔다.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가 일을 하거나 오피스텔에 돌아가 일찍 쉬는 걸 택할 수도 있었으나 골라 탄 버스의 행선지는 인적 드문 강변 공원이었다.
한 시간쯤 달려 익숙한 공원 앞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 동안에 눈발은 조금 더 굵어져 날렸다.
“못지않은 알코올 의존증이셨구만.”
벤치에 앉아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나니 문득 남자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났다.
2년 전과 다를 바 없이 모든 게 그대로인 풍경이었다. 서울은 여전히 바쁜 도시이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여전히 아름답고 눈부셨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부재했을 뿐, 모든 게 다 그대로, 변함없는 세상이었다.
어쩐지 빠르게 달리는 기차에서 홀로 낙오한 기분이었다. 변함없는 것 같아 보이는 세상 속, 모든 게 세상의 속도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동안에도 홀로 기차 밖으로 떨어져 나뒹군 이유는 단연코 하나뿐이었다. 도망가려 했으나 결국 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던 이유. 외면해야 옳았으나 결코 고개를 돌릴 수 없던 이유.
서정혁.
“또 여기일 줄 알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준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떠난 이후, 한동안 습관처럼 매일 이곳을 찾았던 까닭에 준한 또한 잦게 이곳엘 왔다.
“전화는 왜 안 받아?”
그제야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확인한 현서의 잇새에서 아, 하는 소리가 작게 비어져 나왔다. 센터에 들어가며 핸드폰 소리도, 진동도 죽여 놨던 걸 지금껏 깜빡 잊고 있었다.
“알아서 잘 찾아왔네, 뭐.”
무심한 현서의 대꾸에 준한이 어이없다는 듯 옆자리에 앉아 맥주 캔을 빼앗아 들었다.
“혜성 떨어진대서. 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색이 붉어지고 있었다. 곧 해가 질 모양이었다.
“그거 보겠다고 이 추운 데서 청승을 떠냐. 하여튼, 아닌 거 같은데 이상한 데서 쓸데없이 감상적이지.”
“뭐야, 내 맥주.”
꿀꺽꿀꺽, 맥주를 다 털어 삼키는 준한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입술을 삐죽이며 한마디 하려는데, 그가 별안간 화제를 돌렸다.
“이유진 씨 사건 국민 참여 재판 결정됐다며.”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어?”
“아까 우연히 법원에서 봤는데 태준이가 아주 치를 떨더라. 앞으로 자기 앞에서 네 얘기 하면 지위 고하 막론하고 다 죽여 버리겠대.”
“수명이 아주 착실히 줄어들고 있네. 뿌듯해라.”
준한이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유진 씨 많이 좋아했겠다. 너 아니었으면 그대로 억울하게 살인자로 몰릴 뻔했으니. 뭐래. 고맙대?”
“고맙긴. 나야말로 진 빚 갚는 건데 뭐.”
씁쓸히 입꼬리를 올리는 현서를 나긋이 바라보던 준한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빚 갚느라 고생한다, 차현서.”
현서가 왜 이렇게까지 이번 사건에 집착을 했었는지 알고 있었다. 이유진. 언젠가 사무실에까지 찾아와 현서의 뺨을 올려붙였었던, 한때 장기용의 내연녀이자 그들 모자에게 삶을 유린당했던 여자였다.
마음 착한 차현서는 아마도 나락까지 떨어진 그녀의 삶을 목격한 뒤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건에 집착했을 리 없다.
그날 이후,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하루아침에 장기용과의 추문의 주인공이 되어 뭇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된 그녀는 제게 들이닥친 불행을 피하긴커녕 도리어 기꺼이 정면 돌파를 택했다.
그간 착실히 모아온 양재숙의 비리와 아들 장기용의 만행을 담은 파일을 기꺼이 공개한 거였다. 아마 준한과 솔이 결사적으로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녀 자신 또한 처벌될 법했던 자료까지 그대로 넘겼을지도 몰랐다. 그때의 차현서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그럼에도, 불친절한 세상의 순리대로, 자연히 그들의 악행에 동조한 내부 고발자에 대한 여론 또한 거셌다.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수세에 몰리자 정의로운 고발자 행세를 하는 게 아니냐는 비난이 주를 이뤘다. 타인에 대한 비난을 쾌락으로 즐기는 인간의 본능이 정의와 진실이라는 포장지에 예쁘게 싸여 진창을 나뒹굴었다.
그렇게 한동안, 차현서는 선도, 악도 아닌 중간 지점에 다리를 걸치고 선 마녀가 됐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평온했다. 그녀는 마치 지금껏 그런 비난과 손가락질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담담하고 초연하기만 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준한의 속이 시커멓게 문드러지는 줄도 모르고.
“소개팅했다며. 어떻게 됐어?”
현서는 저를 보는 준한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의 손이 머리 위에서 슬쩍 떨어져 나갔다.
“넌 진짜….”
“나 뭐. 왜.”
“귀신같다. 우리 어쏘나 비서한테 나 소개팅할 때마다 따로 보고라도 받아?”
“내 정보력이 선배보단 낫다는 걸 이젠 좀 인정해.”
“그래. 그 잘난 정보력 앞세워서 다시 들어오라니까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대표님 아직도 나한테 맨날 네 소식 묻는데.”
“내 몸값 알잖아. 청송에서 내 체급을 감당할 수 있겠냐구.”
“허. ”
“소개팅은 어땠냐니까 왜 말을 돌려? 그 얘기나 해 봐.”
“횟수만 채우고 있는 거지 뭐. 소개팅이라도 안 하면 정말 집에서 쫓겨나겠다 싶어서.”
준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좀 성의를 가지고 만남에 임해 봐. 혹시 알아? 한 100명쯤 만나다 보면 그중에 선배 타입의 여자가 운명처럼 나타날지.”
“행여나.”
“나 같은 여자 찾을 생각 말고, 좀 색다른 취향을 개발해 보라구. 응? 어머님 속 좀 그만 썩이고요, 김 변호사님.”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준한은 자신을 밀어내는 그녀의 은근한 손길과 그 완고한 속뜻을 모르지 않았다.
1년 전, 처음으로 어렵게 털어놨던 마음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지금 네 마음에 여유 없다는 거 잘 알아. 근데 그냥, 상관없어. 시간이 지나면 추억도 흐릿해질 거고….”
“미안한데 선배. 나한테 아무 기대하지 마.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안 될 것 같아. 선배랑 말하고 웃고 떠들면서도 난 그 사람 얼굴 떠올리고, 선배랑 있는 시간에도 그 사람 그리워할 거야. 나 좋다는 선배 옆에서 내내 다른 사람만 품고 살 거라고. 그러니까 부탁할게. 나한테 그렇게 못 할 짓 시키지 말아 주라, 제발”
여지마저 주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못 박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후 연락마저 완전히 끊으려는 그녀를 겨우 붙들어 이 관계를 이어 간 건 오롯이 준한의 노력 덕분이었다. 여전히 차현서를 기다리는 건 세상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 자신했으므로.
“아, 설마…. 저건가?”
불현, 어두워진 밤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던 현서가 미간을 설핏 찡그리며 서북쪽을 가리켰다. 눈발이 날리는 하늘 끝에 꼬리를 단 빛 한줄기가 희미했다. 혜성이라 확신할 수도 없을 만큼 애매한 모양새였다. 그녀의 얼굴에 허망한 실망감이 내비쳤다.
“뭐야…. 어이없게.”
작게 읊조리는 붉은 입술에서 뽀얀 입김이 퍼져 나갔다. 2년 전 봤던 거대 혜성의 또렷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실망스러운 존재감이었다.
“일어나. 가자. 가서 밥이나 먹어.”
준한이 혀끝을 쯧, 걷어차며 앞장을 섰다. 그녀도 하릴없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