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계절이 몇 차례 바뀌어 다시 차가운 한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겨울이 됐다.
2년. 서정혁과 헤어지고 2년이 지났다. 그와의 짧았던 몇 개월의 시간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 흐른 셈이었다.
늦은 오후의 법원 복도는 산만하고 소란했다.
“적당히 좀 하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가시 돋친 목소리에, 현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판사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검사 박태준이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고 다가왔다.
“살해 목적, 동기 충분하고 범행 도구를 비롯한 수많은 증거들, 목격자 진술들 다 뚜렷하고 일관돼. 내가 검사 생활 십오 년 했지만 이 케이스만큼 진범 확실한 사건도 드물거든? 지나가던 개가 와서 봐도 이유진이 범인이라고 짖을걸? 근데 뭐? 국민 참여 재판?”
박태준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보다 힘 있는 사람에겐 고개를 숙여 아부하고, 저보다 약한 사람에겐 무례한 짓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속물형 인간. 연수원 시절에도 현서와 몇 번이나 언성을 높이며 얼굴을 붉힌 적이 있던, 악연이라면 악연이 있는 사이였다.
“말씀대로면 더 잘된 거 아닌가요. 선배 말처럼 지나가던 개도 확실하다고 판단할 정도면 개보단 나은 배심원들한테도 당연히 만장일치 유죄 평결 나오겠죠? 아닙니까?”
현서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왼손에 바꿔 쥐며 평온히 대꾸했다.
“쉽게 끝날 일을 네가 귀찮게 만들잖아, 지금.”
“검사님껜 그냥 귀찮은 일이시겠지만, 저희 피고인에겐 인생이 걸린 판결이라는 점 상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너 이거 벌써 몇 번째야? 너 때문에 지금 물 먹은 사건이 한두 건인 줄 알아?”
국선 변호인으로 어려운 형사 사건만 골라 가며 수임해 맡은 지도 어느새 1년 남짓 되었다. 건건이 집착해 매달리다 보니 어느새 검사들 사이에선 돈도 안 될 일에 죽자고 덤벼 기어코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야 마는, 이른바 ‘개또라이’로 불리게 된 것도 그즈음 된 듯싶었고.
“너 지난번 이태용 강간 사건에서도 최윤 선배님 상대로 별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 잡아서 뒤집어 놨지?”
“고작 영장 심사 기각이었는데요. 그리고 그건 최 검사님께서 좀 무리하셨었죠. 아무리 피고인이 만만한 지적 장애인이었다지만.”
“허, 이게 진짜.”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박태준의 말처럼 평소 내연남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당하던 피고인 이유진이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정황 증거와 실물 증거가 차고 넘쳤다.
현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범행 도구, 죽은 남자의 몸에서 검출된 졸피뎀 성분의 수면제, 사건 당일 이유진이 피해자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집으로 유인했다 판단되는 통화 기록들, 그녀가 평소 내연남에게 집착하고 그의 폭력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는 정신과 담당의의 증언까지. 모든 것들이 이유진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이유진의 기존 국선 변호인이 질병을 사유로 사임을 했다. 그 뒤 이유진이 변호를 자처한 게 다름 아닌 현서였다. 국선 변호사가 없어 직권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법원으로서는 그녀의 신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건을 맡은 그녀는 곧장 국민 참여 재판 신청을 했다. 그리고 조금 전 재판부에서 그 신청을 받아들인 거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또 무슨 또라이 짓 하려고 이러냐?”
박태준은 금방이라도 제 앞의 작은 여자를 완력으로 밀어붙일 듯 위협적으로 굴었다. 곁에 서 있던 솔이 바짝 긴장하며 되레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눈 하나 깜짝않는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러다 한 대 치시겠어요.”
“뭐?”
박태준이 눈을 부라렸다.
“제 키가 163입니다, 검사님. 검사님 키는 174? 5? 그쯤 되시는 것 같구요. 몸무게 차이는 뭐, 여쭤보나 마나 더 어마어마할 것 같고.”
현서는 고저 없는 어조로 박태준의 불룩 나온 배를 위아래로 훑었다.
“체격 차이까지 갈 것도 없죠. 남녀의 힘, 근력 차이는 신체적 특성상 당연한 상식이니까 각설하고요. 검사님이랑 저랑 이렇게 언쟁하는 상황. 이 상황에서 만약 감정이 더 격해져서 몸싸움으로 번졌다고 가정해 보면요. 제가 검사님께 맞아 죽을 확률이 높을까요, 제가 홧김에 검사님 머리를 망치로 찍어 죽일 확률이 더 높을까요?”
“무슨 개소리야? 차현서 너 증거자료 똑바로 보기나 했냐? 죽은 노남규 혈액에서 수면제 성분 검출됐단 기록 못 봤냐고. 일주일 전 이유진이 같은 성분의 수면제 구입했단 카드 내역은?”
“당연히, 봤습니다.”
“근데 무슨,”
“검사님께서 의도적으로 증거 목록에서 누락시키신 피고인 이유진의 혈액 분석까지도 샅샅이 봤는걸요.”
“뭐?”
“이유진 혈액에서도 같은 성분의 수면제가 검출됐던데요? 살인을 계획한 여자가 자기 손으로 수면제를 먹진 않죠, 보통은.”
“허, 너 고작 그딴 게 반박 증거가 된다고 생각해서 이래?”
“배심원들에게 이유진이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게 제 궁극적인 목표니까요. 힌트 좀 드리자면 그것 말고도 제가 찾아낸 ‘고작 그딴’ 반박 증거들이 꽤 되고요. 뭔지 궁금하시면 검사님도 국민 참여 재판 함께하세요.”
차분한 빈정거림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박태준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너 씨발, 국선 변호에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냐? 내부자 고발이니 뭐니, 멀쩡한 기업 하나 다 뒤집어 놓고 양심 변호사로 주목 좀 받고 나니까 뽕 맞은 것처럼 알량한 정의감에 마구, 막! 막 취해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셨어? 한때는 돈만 주면 밑도 핥아 줬었잖아, 너. 과거에 차현서 손에 똥 묻히고 다니던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일부러 자극하려는 듯 악랄하고 거칠게 말하는 박태준의 의도는 뻔했다. JK 비리 내부 고발로 유명세를 탄 차현서의 이름값을 이렇게라도 역이용해 보겠다는 심산인 거였다. 그러나 그딴 질 낮은 공격에 꿈쩍할 리 없는 그녀였다.
“적당히 해.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게 물을 다 흐리고 다녀선.”
“근본 없는 걸로 따지면 연수원 시절부터 키워 준 사수 뒤통수치고 서울 지검으로 영전하신 박 검사님만 할까요.”
“허, 이 새끼가…! 너 싸가지 밥 말아 먹은 건 여전하다? 아직 먹고살 만한가 봐?”
“뭐, 배곯지는 않을 만큼은 먹고 삽니다.”
“눈에 뵈는 게 없지? 너, 뭐 믿고 이렇게 까부냐?”
“글쎄요. 검사님이 까부는 이유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걸요, 아마.”
“씨발,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그녀를 어쩌지 못한 박태준이 악에 받쳐 부들부들 떨어 댔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또 다른 피고인이랑 접견 약속이 있어서요. 할 말 더 없으시면 먼저 가겠습니다.”
현서는 박태준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며 돌아섰다. 날 선 분위기에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솔이 바짝 그녀의 지근거리로 따라붙었다.
“어지간히 좀 하시죠? 이러다 또 칼 맞아요.”
“왜 이래? 언제는 칼 맞을 걱정 안 하고 산 것처럼?”
“그 칼하고 이 칼은 완전 다른 건 아시죠? 게다가 그때처럼 대신 칼 맞아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솔의 농담 아닌 농담에 현서는 설핏, 헛웃음을 흘렸다. 자연히 상기되는 그 이름에 이젠 제법 무뎌진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위선을 떨면서.
법원을 나와 주차된 차에 올랐다. 현서는 얼마 전 임신을 한 솔이를 배려해 직접 운전대를 쥐었다. 십 개월 전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속도위반을 해 임신한 사실을 알고 혼인 신고부터 했단다. 그렇게 결혼 생각 없다고 질색을 할 땐 언제고.
“언제까지 나 힘들게 할래? 출산 휴가 미리 준다니까 왜 안 들어가고 버텨?”
현서는 이제 제법 볼록하게 솟은 그녀의 배를 보며 핀잔했다.
“복직하고 나오면 제 책상 없어질… 아니지. 아예 사무실이 없어져 있을까 봐서요. 들어가기 전에 한 푼이라도 더 벌고 들어가야죠. 요즘 세상에 경력 단절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데.”
“걱정도 팔자네. 너 내가 이렇게 독하게 돈을 버는데 쉽게 망할 것 같아?”
“아까 박 검사 그놈 말 못 들으셨어요? 이상하게 돈 안 되는 일에 더 열정을 쏟으시니까 불안해서 그러죠. 그리고 힘들게 돈을 벌면 뭐 해요. 맨날….”
솔이는 더 말을 말자는 듯 혀끝을 쯧, 걷어찼다.
“가만 보면 윤솔 네가 나보다 더 속물이야. 알지?”
“변호사님이야 혼자시니 경제적 압박에서 자유로우시겠지만 전 이제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돈 생각을 안 할 수 있나요.”
“지금 이거 나한테 빨리 돈 더 벌어 오라는 압박인 거?”
답 대신 설핏 웃는 솔이는 왜 아니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사장이고 누가 직원인지.”
현서는 슬쩍 눈을 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순 동시에 터진 웃음소리가 차 안 가득 울렸다.
한참을 전방만 응시하다 문득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봤다. 이제 고작 세 시일 뿐인데, 하늘은 뭐라도 한바탕 쏟아부을 듯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날씨 탓인지 6차선 왕복 도로가 꽉 막혀 차에 갇힌 꼴이 됐다.
“어떡해요? 접견 시간 못 맞출지도 모르겠는데요.”
솔이의 말에 현서가 힐끗,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핸들을 슬쩍 움켜쥔 가느다란 손가락이 타닥타닥, 초조하게 움직였다. 불현, 쓸데없이 박태준을 상대하느라 낭비했던 시간이 아까워졌다.
때마침 솔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일부러 스피커 폰으로 전환한 수화기 너머에선 구치소 내 작은 사건이 있어 아무래도 오늘은 접견이 어려울 것 같다는 직원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부 시스템의 문제인 만큼, 대신에 내일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 허가를 해 주겠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다행이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게 돼서.
기분 탓일까.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자 꽉 막힌 도로의 풍경이 그리 삭막해 보이지만도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 중에 교통 체증을 핑계 삼아 이렇게 멍하니 농땡이를 부리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눈이나 내렸음 좋겠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솔이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그놈의 눈. 진짜.”
눈이라면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이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는 이상하게 눈이 자주 내렸다. 10월, 조금 이른 첫눈을 시작으로 11월, 그리고 지금까지 거리에 쌓인 눈이 녹기 전에 또 새 눈이 쌓이고 덮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꼭 차 가지고 퇴근하세요.”
“왜. 싫은데?”
“20대도 아니고 몸 생각도 하셔야죠. 자꾸 눈 맞고 싸돌아다니시는 거 별로 안 좋아요.”
눈만 오면 우산도 없이 하염없이 걷고 걷는 현서의 버릇을 익히 알고 있기에 미리 하는 경고였다.
“남이사. 혼자 눈을 맞든, 비를 맞든.”
“되게 처량해 보여요, 그거. 없어 보이구.”
가감 없는 그녀의 비난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운전석 창틀에 팔꿈치를 괬다. 손등으로 무거운 머리를 받쳐 짚고 빌딩 숲 사이의 허공을 응시했다. 또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혜성이 오고 있습니다. 바로 4,000년의 공전 주기를 가진 혜성 ‘데이토나’인데요, 한국천문연구원에서는 기상 조건이 좋다면 이번 주말, 데이토나를 맨눈으로 꼬리까지 관측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선 돌연 혜성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기시감에 핸들을 쥔 손가락 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꼭 저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근데 얼마 전에도 무슨 혜성 떨어지고 그러지 않았었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솔이의 말을 들으며 현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2년.”
돌이켜 보면, 시간의 힘을 굳게 믿었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짧았던 기억이 희미해지면 마음도 자연히 무뎌질 거라고. 그렇게 절박히 자위하고 간절히 믿어야만 했던 암흑 같던 시기가 있었다.
“네?”
“2년 전에도 무슨 혜성, 떨어졌었다구.”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냐는 듯 저를 보는 솔이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2년 전, 혜성이 떨어지던 어느 밤 제게 내밀어 오던 손을 맞잡았던 기억이 선연히 떠오르고야 말았다.
“되게 크고 밝았었는데.”
그 눈부시게 밝고 빛나는 존재가 구원이자 저주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날이었다.
이제는 안다. 시간엔 아무런 힘이 없다.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제와 분열을 반복하는 세포 같아서, 물리적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 증식을 막을 길이 없다. 그리움과 자책만 독처럼 퍼졌다. 증식을 막지 못한 시간은 도리어 독(毒)일 따름이므로.
“어, 눈 온다.”
돌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솔이가 유리창 너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투명한 유리창 위로, 솜털 같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