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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100화 (100/115)

♬  100

평소의 포멀한 슈트 차림과 달리 캐주얼한 재킷에 검은색 목 티만 받쳐 입은 남자의 얼굴이 퍽 수척했다. 밖에선 늘 이마 위로 완전히 쓸어 넘겼던 머리칼도 오늘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다소 야윈 탓인지, 명화처럼 고아한 분위기의 이목구비가 되레 더 또렷해진 듯도 했다.

마주 앉아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제멋대로 울컥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봐, 어디.”

커다란 손이 불쑥 붕대를 감은 제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붕대를 풀어내 저도 잊고 있었던 상처를 살피는 남자의 짙은 눈썹이 작게 들썩였다.

“이제 괜찮아요.”

“치료는 제대로 받은 거야? 처음에 제대로 치료 안 하면 나중에 고생해.”

잔소리하듯 말하는 그를 가만 바라봤다. 큰 사고 당한 게 누군데,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본부장님은요. 몸 괜찮아요?”

“보다시피. 내가 워낙 강철 체력이라.”

그는 아무 이상도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그러나 그는 확연 상췌한 모습이었다.

눈에 보이는 외상만 없다고 결코 괜찮은 게 아닐 거였다. 참고인 조사차 경찰서에 갔을 때 엉망으로 부서진 그의 차가 찍힌 현장 사진을 봤다. 차가 그렇게 부서졌는데, 타고 있던 사람이 괜찮을 리 없었다.

“그렇게라도 쳐다봐 주시니 황송하긴 하다만. 눈에 힘은 좀 빼.”

“본부장님이야말로 치료 제대로 받았어요? 큰 사고였는데.”

그의 한쪽 입꼬리가 핏, 씁쓸히 말려 올랐다.

“내 걱정을 하긴 했어?”

“네. 했어요.”

“걱정했다는 여자가 어떻게 열흘 내내 연락 한 번을 안 해. 사람을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용기가 안 나서요. 무서워서 연락 못 했어요.”

“애인한테 연락하는 데 무슨 용기씩이나 필요해.”

메마른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사람이면… 염치가 있으면 쉽게 연락할 수가 없죠, 당연히.”

깔깔해진 목 끝에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아프고 따가웠다.

“…서정혁 씨가 누구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남자의 짙은 시선이 저를 마주해 왔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두 번이나 저 때문에 모든 걸 잃을 뻔했던 그였다. 그런 주제에 남자의 앞에서 부당한 불행을 논하고, 같잖은 위로를 건네며, 아이처럼 매달려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러니 저만 봐 달라 응석을 부렸었다.

이제 정말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차례였다.

“하나 물어볼게요.”

“물어.”

“처음부터 내가 아빠 딸이라는 거 알고 나한테 접근한 거예요?”

“맞아. 그랬어.”

“왜요? 나한테 복수라도 하고 싶었어요?”

“복수까진 아니었어도 관망은 하고 싶었어. 이미 불행할 만큼 불행한 당신 인생, 얼마나 더 불행해질 수 있나 옆에서 팔짱 끼고 지켜보면서 비웃고는 싶었어. 그거까진 부정 안 해.”

충분히 예상했던 답이었으나 막상 그의 목소리로 확인한 이야기에 입이 썼다. 염치도 없이.

“근데, 시간 지날수록 당신한테 흔들려서 괴로웠어. 아니,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냥 처음부터였던 것 같아. 보는 순간 나랑 지독하게 닮은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차현서 당신한테 본능적으로 끌렸어. 힘들었지. 속으론 그게 어떤 감정인지 잘 알면서도 끊임없이 부정하고 밀어내느라. 이미 당신도 봐서 다 알잖아, 내 고단한 감정 변천사.”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혼란과 고뇌의 이유가 제 아버지였단 건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네. 알아요. 나를 좋아하는 마음과 우리 아빠를 증오하는 마음. 혼란 끝에 서정혁 씨가 둘 중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렸었는지.”

긍정하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저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테이블 밑,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러곤 지난 며칠 내내 수십, 수백 번 되뇌고 곱씹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서정혁 씨를 좋아하는 마음과 죄책감에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 둘 중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려야 현명한 건지.”

“말해. 곁가지 떼고.”

뒷말을 예감한 남자의 미간이 설핏 좁아지고 있었다.

“이쯤 해요, 우리.”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울지 않으려 애쓰는 제 얼굴이 얼마나 꼴사납고 보기 흉측할지 잘 알면서도.

“난 그렇게 결론 냈어요. 아무래도 이쯤에서 그만 멈춰야겠다고.”

침묵의 무게가 육중했다. 저를 향한 남자의 시선이 빗발쳐 쏟아졌다. 숨죽인 남자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요동치는 감정의 파고가 얼마나 거센지 주변을 감도는 공기가 죄 빽빽했다. 숨이 막혔다.

“그날 나한테 하려던 말도 이거야?”

“네.”

“고개 들고 답해. 내 눈 보고.”

입 속 여린 살을 아프도록 악물고 고개를 쳐들었다. 제 결심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또렷한 눈동자로 열화처럼 들끓는 남자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전혀, 바닥을 내보일 것 같지 않던 남자의 새카만 동공에 깊은 파문이 일고 있었다.

“내가 당신 때문에 뭘 포기했는지, 뭘 내던졌는지 분명히 모르지 않을 텐데, 차현서는.”

“…….”

“그걸 알면 이런 말 쉽게 못 하고.”

“어렵게 내린 결론이에요.”

“며칠 혼자 생각하고 마음대로 판단해 내린 어려운 결론이 고작 이거야? 그러고 나한텐 그냥 통보하면 끝. 당신한텐 그랬어, 나랑 이 관계가?”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고저 없이 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더없이 알알했다. 화가 난 게 분명한데 침착했고, 위압적인 동시에 부드러웠다.

“더 이상 저 때문에 뭐 포기하고, 내던지는 거 그만하세요. 비웃으시겠지만 저도 인간으로서의 도리, 최소한의 양심. 그런 거 챙기면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인간으로서의 도리, 최소한의 양심. 그딴 거 챙기지 말고 말해. 다른 달린 감정 집어치우고 이 관계에 대한 차현서 진심만. 그래도 결론이 같아?”

푹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꾸 심장을 긁어 댔다. 공중에서 부딪히는 그 짙은 시선이 제게 이성 따위 무시하고 감정에만 솔직하라며 철없는 충동을 부추기고 있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날카로운 눈매가 옴짝달싹도 못 하게 저를 옭아매는 듯했다. 그게 버거워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붙잡고 가라앉혔다. 맞잡은 손바닥 가득 땀이 찼다.

“맞아요. 보고 싶었어요, 나도. 서정혁 씨 그립고, 보고 싶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연락해 달려가 만나고 싶은 마음 억누르고, 또 참고. 그러다 또 갈등하고….”

“…….”

“당신 없으면 내 인생 정말 무너지겠다 싶을 만큼 좋아해요,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토로하며 입술을 잘근 짓씹어 물었다.

“근데.”

목소리가 자꾸 삐끗삐끗, 쉬어 갈라지려는 탓이었다.

“근데, 그렇게 내 인생 완전히 무너지고 망가지는 것보다, 지금 이렇게 당신 마주하는 게 더 괴로운 것 같아요. 많이 고민했었는데, 얼굴 보고 나니 확실히 알겠어요. 더 이상은 무리라는 거.”

“…….”

“끔찍해요.”

“…….”

“서정혁 씨 얼굴 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완전 지옥이야.”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억누른 감정에 호흡이 덜덜 떨렸다.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멈추는 게 맞아요. 헤어져요, 우리.”

남자의 새카만 눈동자가 소리 없이 공률하고 있었다.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것인지, 미간을 푹 조인 남자의 관자놀이가 몇 번이고 불룩하게 솟았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잠깐의 정적을 깨고 푹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예상 못 했던 반응은 아니야. 네가 왜 혼자 이런 결론 냈는지도 이해하고. 네 충격, 비참한 마음도 어렴풋이 짐작은 해. 나도 그랬으니까.”

그는 잔뜩 상처받은 들짐승처럼 가만히 숨을 죽이고 느릿하게 저를 바라봤다. 검고 깊은 눈동자엔 온통 제 얼굴이 담겨 비쳤다.

“마음 추스를 시간을 더 달라면 줄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더 생각해. 그리고 결론 다시 내려.”

“서정혁 씨.”

“차현서 씨 당신은 나 없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해?”

가능하다고, 얼른 즉답을 해야 하는데 말 대신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앙다물었다. 서정혁 없는 세상.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뜩해져서.

“아무래도 난 불가능해. 못해, 나는.”

단호하고도 결연한 목소리가 애원처럼 들려왔다.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그 어떤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더 간절하고 절절했다.

“그래, 알아. 너 힘들지. 힘들겠지.”

다 안다는 듯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는 남자의 얼굴이 쓸쓸하고도 고요했다.

“당신 힘든 거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낮은 숨을 느릿하게 내쉬었다. 지치고 피곤한 기색의 남자가 이마를 감싸 쥐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까 잠자코,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벌 받듯이.”

누가 누구한테 벌을 준단 말인가. 원망 가득한 눈동자가 그렁그렁, 그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대화를 차단하듯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드르륵, 의자 밀리는 요란한 소리를 신호음으로 이를 악물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새어 나왔다. 정말로, 아주 가 버리겠다는 의미 같아서. 이게 정말 마지막, 끝인 것만 같아서.

기껏 억누르던 설움이 터지고, 여린 몸이 파르르 떨렸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지는 남자의 너른 뒷모습이 알알하게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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