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부우웅.
낡은 승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속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핸들을 움켜쥔 채 가속 페달을 있는 대로 지르밟는 차선엽의 얼굴엔 어떤 망설임과 고민도 없었다. 작은 묘목들과 잡초로 무성한 비탈길을 거침없이 올라 질주하는 그의 최종 목적지는 가드레일 너머의 도로였다.
“당신이 도망치고, 나 혼자 남아서 그 긴 시간을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어. 재수 없는 고아. 사나운 애. 독한 계집애. 지독하고 악독스러운 년. 돈이면 뭐든 다 하는, 끔찍한 악마 년!”
꿈에도 몰랐다. 딸 현서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었을 줄은. 원망 한 번, 분노 한 번 제대로 표출한 적 없던 딸의 속이 그렇게 썩어 있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저 괜찮다니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힘들고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제 모든 노력 덕분에, 강하고 심지 굳은 딸의 성정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한 거라 자위하며 살았다. 이젠 괜찮다고. 아니 더 괜찮아질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모두 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당신 딸이 그 지옥에서 살아 나오겠다고 얼마나 악착같이 발버둥 쳤는지, 정말 몰라?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당신 딸 인생에 똥물을 튀길 대로 다 튀겨 놓은 장본인인 주제에, 정말로 몰라서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입꼬리에 쓴 웃음이 걸렸다.
동생 차문엽의 말이 아니었어도 이미 짐작은 했던 바였다. 서정혁을 바라보던 딸의 눈빛과 딸을 이야기하며 흔들리던 서정혁의 눈동자를 보면서도 애써 아닐 거라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였다. 자신이 쏟아 놓은 딸의 불행을 이제라도 제 손으로 걷어 내주고 싶었다. 이제는 차마 바랄 수도 없을 용서와 이해를 대신해서라도.
회색빛 노안에 아스라한 회한이 스쳐 지났다. 어리석음이 너무 길었다.
쿵, 쿵. 가드레일을 먼저 들이받은 차체가 요동을 쳤다. 그대로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동생의 트럭을 확인하며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최대 속력으로 언덕의 끝에 도착한 그의 차가 솟구쳐 오르듯 튕겨 서정혁의 차에 비껴 충돌했다.
쾅!
차문엽의 트럭이 차선엽의 승합차에 충돌한 것도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조수석 창이 산산이 깨졌고, 그의 머리 위로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찬란한 빛처럼 쏟아져 내렸다.
***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제 얼굴을 움켜쥔 남자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왜. 도대체 왜.
제 동생을 죽이고도 미안함 한 번 느낀 적 없다던 남자였다. 그날의 일을 후회하고 참회하지 않는다고 뻔뻔히 굴던 악마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제 목숨을 구하겠다고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인 건가.
변수였다. 이토록 허망한 복수의 끝은 제 계산에 넣은 적 없었다.
삶을 지옥으로 끌어내린 악마에게 목숨을 빚지고 평생을 살게 된다면. 짧은 가정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살아, 제발.
차선엽이 죽지 않기를. 부디 멀쩡히 눈을 뜨고 숨 붙은 하루하루를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연명하기를. 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정혁은 간절히 바랐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 앉아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까.
타닥타닥.
복도 끝에서부터 다급하게 뛰어오던 작은 발소리가 코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들자 그토록 보고 싶던 여자의 하얀 얼굴이 축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뭐… 뭐예요, 이게? 뭐가, 어떻게….”
가느다란 목소리가 아무렇게나 떨려 쇳소리가 났다. 제게 자초지종을 묻고 있었으나 여자는 이미 모든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아연한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듯 벌벌 떨리는 입술이, 보듬어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웠다.
정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제 앞의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할 말이 많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모래라도 한 움큼 삼킨 듯 목 끝이 깔깔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꽉 움켜쥔 주먹이 허공에 맴돌았다.
“수술 들어갔고, 상황은…. 나도 잘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본부장, 님.”
“미안한데, 차현서. 보다시피 나도 지금 좀 상태가 안 좋아. 우리, 얘기는 나중에 하자.”
푹 잠긴 목소리가 모든 대화를 차단하며 그녀를 스쳐 지났다. 풀릴 대로 풀린 다리에 애써 힘을 주어 발을 디뎠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기다란 복도를 걸어 나갔다.
모퉁이를 돌아 몇 발을 더 떼었을 때였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레오의 당황한 얼굴이 잔뜩 구겨지고 있었다.
[라이언!]
몸도 머리도, 납덩이에 눌린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
커다란 병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기계음과 가습기의 물방울 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현서는 가만히, 원망스러운 제 아버지의 얼굴을 꽤 오래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걷어 냈다.
그녀는 표정 없는 창백한 얼굴로 블라인드 너머 잿빛 하늘을 응시했다. 흐린 하늘에 일찍 모습을 드러낸 처량 맞은 반달이 눈꼬리에 서글피 걸렸다.
반파된 차에서 구조된 아버지 차선엽은 몇 번의 대수술을 마친 끝에 간신히 질긴 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라 위로하는 의사 앞에서 현서는 작게 읊조렸다. 차라리 죽지 그랬어.
차선엽의 의식은 열흘 가까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뺑소니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차문엽은 중국으로 밀항을 시도하다 군산항에서 붙잡혀 경찰의 조사를 받는 중이라 했다.
그리고 얘기는 나중에 하자던 그에게선 지금껏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지난 며칠간, 현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 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어떻게 꼬인 악연이기에 이렇게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바닥으로 몰고 가는 건가. 날뛰는 감정을 누르고, 합리적 이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성급한 결론을 내지 않도록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머리와 심장을 차갑게 식히고 바라보자 팩트는 도리어 선명해졌다.
아버지는 왜 이런 선택을 했나. 일말의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에? 이렇게라도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치르려 했던 건가. 아니다. 결코 그건 아니다. 분명 차선엽은 차문엽이 서정혁에게 위해를 가하리란 걸 미리 알고 있었다. 방법도, 시기도, 장소도, 모두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방법들 중에서 왜 하필 이런 방식으로 상황을 막으려 했나. 따져 생각해 보면 그 의도 역시 선명했다. 차선엽은 자살을 하고자 했던 거다. 서정혁을 이용해서.
차선엽은 후회는커녕 반성을 모르는 인간이었고, 끔찍한 파렴치한이었으며, 끝까지 이기적인 악마였다. 저주스러웠다. 이런 악마의 딸로 태어난 제 인생이.
“너 좀 쉬다 와.”
드르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준한의 목소리가 먼발치에서 들려왔다.
“…왔어?”
“가서 쉬다 와.”
“괜찮아.”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으나 준한은 기어코 그런 제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코트를 입혔다.
“안 괜찮아. 집에 가서 쉬고, 자고 아침에 와.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
“가, 얼른.”
더 대꾸할 의지도, 반박할 기운도 없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떨구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고마워, 선배.”
감정 없는 어조로 작게 읊조리며 병실을 돌아 나왔다. 스스로가 파렴치하고 뻔뻔하게 느껴졌으나 여전히 체면 차릴 여유는 없었다. 그 또한 저주 같았다. 죽은 듯 누워 있는 아버지란 인간과 자신이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단 걸 확인받는 기분이라.
긴 복도를 따라 걷다 화장실로 들어섰다. 세면대 앞, 허리를 굽히고 차가운 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지끈거리는 이마의 열기와 울화를 식혀 내며 몇 번이고 손바닥으로 물을 퍼 얼굴에 들이부었다.
쿵!
그날,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귀를 찢는 충돌 소리와 남자의 낮은 신음 소리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무슨 상황이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본능적 불길함에 덜덜 떨며 몇 번이고 끊긴 전화를 다시 걸어 보려 애를 썼었다.
미친 사람처럼 병원으로 달려가면서도 제발 아무 일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조바심에 아버지의 사고와 서정혁, 그 남자를 연관 지은 제 주책없는 설레발일 뿐이기를, 저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신에게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러나 수술방 앞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피로 물든 셔츠를 입은 남자를 마주했던 그 순간, 그녀는 다시 신을 저주했다. 또 저에게만 한 톨의 희망마저 허락하지 않는 신의 무자비함을 경멸했다. 끔찍했다.
“…하.”
부러질 듯 가느다란 손목으로 세면대를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거울을 마주한 그녀는 그 속에 비친 제 초라한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고 섰다. 생기 없고, 초점 없는 눈동자가 참고 보기 어려울 만큼 역했다.
보고 싶다.
기막힌 감정이 들끓었다. 이 순간, 이 와중에도 머릿속을 채운 한 사람의 존재에 스스로가 다 경멸스러워졌다. 욕망을 끊어 내듯 손을 뻗어 페이퍼 타월을 탁, 끌어당겼다. 얼굴에 차갑게 맺힌 물방울들을 대충 닦아 내고 소지품을 챙겨 다시 밖으로 향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며 멍하니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별안간 낯익은 구두코가 제 앞을 가로막아 섰다. 코끝에 훅, 끼치는 향만으로도 제 앞을 막아선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비 맞은 강아지가 따로 없네.”
그녀는 어깨에 멘 가방끈을 꽉, 틀어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울렁울렁, 한계에서 들끓던 감정이 금방이라도 넘쳐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나 당신이랑 해야 할 얘기 마저 하러 왔는데.”
“…….”
“차현서 팀장님.”
저도 모르게 고집스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제발, 부르지 말라고. 그냥 가 달라고.
“차현서 씨.”
“…….”
“차현서.”
집요히 제 이름을 부르는 묵직하고 낮은 음성에 손끝이 다 저릿했다.
“고개 들어.”
“…….”
“나 좀 봐.”
다정하고도 폭압적인 그의 손이 갸름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움켜쥐며 말했다.
“봐 줘, 좀. 당신 남자 다 죽어 가는 꼴, 좀.”
감았던 눈꺼풀이 자연스레 말려 올라갔다. 내내 그리웠던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새하얀 눈망울에 왈칵, 물기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