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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트 조명 너머, 저 멀리에서 시커먼 인영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정혁은 기다리던 상대가 다가오는 걸 확인하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시뻘건 불꽃이 치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고, 일순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간신히, 조금은 잦아든 통증을 억누르며, 버티듯 필터를 짓이겨 물었다.
반쯤 열려 있던 차 문을 탁, 닫고 허리를 세워 다가오는 상대 앞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건 차문엽의 얼굴이었다. 정혁은 일그러진 표정을 지우고 태연을 가장해 그를 마주했다.
“어렵게 뵙네요.”
차문엽은 뭐가 그리 불안했는지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 오는데도 장소를 몇 번이나 바꿔 메시지를 보냈다. 덕분에 정혁은 정신이 아뜩할 만큼의 통증을 느끼면서도 몇 번이고 차를 돌려야만 했고.
“도통 그쪽을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후, 하고 길게 내뱉은 담배 연기에 차문엽이 인상을 푹 찌푸렸다.
“돈은, 가져왔수?”
차문엽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빈손의 정혁을 의심스레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나도 그쪽 못 믿는 건 마찬가지라서요.”
“뭐!?”
“깔끔했던 거래 먼저 파투 내고 뒤통수친 건 차문엽 씨야. 잊으셨나?”
“하, 이 새끼가…!”
“게다가 사람을 이리저리 돌렸으면 먼저 패를 까는 성의 정돈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냉랭하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억눌린 노여움이 묻어났다. 더는 남자를 자극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차문엽은 걸걸한 목을 가다듬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현서는 거기. 거기 적힌 주소로 가면 있을 거요. 기껏 그쪽 오는 시간 맞춰서 연락했더니만 다쳐선 병원엘 갔어.”
다쳐? 내내 굳어 있던 정혁의 눈썹이 거칠게 들썩였다.
“계집애, 지 아버지가 다 지 위해서 한 짓을 가지고 뭘 그렇게 바락바락….”
차문엽이 혼잣말을 지껄이듯 구시렁거렸다. 메모지를 콱, 움켜쥔 주먹에 바득, 힘이 들어갔다.
“그리구 우리 형님은 걱정 마슈. 이미 현서 그게 더 이상 자기 아버지 꼴도 보기 싫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갔으니까. 어차피 더 이상 현서 얼굴 보지도 못할 텐데, 여기 더 있어 봐야 뭐 하겠수. 사업 밑천 두둑한 나랑 같이 중국에나 가서 돈이나 버는 게 낫지.”
“그럼 차현서 붙잡아 놓은 값. 그거면 되겠군요.”
“뭐?”
“어차피 알 거 다 알아 버렸고, 연 끊자고 먼저 선언한 게 그 여자라면서.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당신한테 내가 무슨 값을 치러야 해. 그러게 말했잖습니까, 내가 솔깃해할 만한 걸 좀 거시라고.”
길고 유려한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다시 입가에 가져가 필터를 빤 그의 잇새에서 뿌연 연기가 허옇게 퍼져 나갔다.
이 건방진 새끼.
차문엽은 차마 내뱉지 못한 욕지거리를 삼키며 눈을 부라렸다. 균열 하나 없는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제 말이 이 오만한 놈에게 씨알도 안 먹힐 거란 걸 아주 모르진 않았으나 막상 저를 무시하는 듯한, 숨 쉬는 공기조차 섞어 마시고 싶지 않다는 듯 저를 무시하고 하찮게 깔아 보는 그의 눈빛을 보자니 끓는 속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 돈이라도 받으려면 내일 퇴근 시간 전까지 내 사무실로 오시고.”
담배를 지져 끄며, 더 볼일 없다는 듯 단호히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 애써 굳히고 있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은 여전히 통증을 못 이겨 덜덜대고 떨렸다.
겨우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오른 정혁은 눈을 질끈 감고 가쁜 숨을 터뜨렸다. 손끝에서 시작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가는 감각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눈앞이 아뜩했다.
지이잉.
레오인가 싶어 시선만 돌려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차현서’라고 쓰인 이름 세 글자가 온 신경을 자극했다. 타이밍 한번 기막히지. 있는 힘을 쥐어짜 내 손을 뻗었다.
- 저예요.
차분히 가라앉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삐걱대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창백하게 질려 식은땀이 흥건한 남자의 얼굴이 백미러에 고스란히 비쳤다.
“와. 드디어 연락을 주셨네.”
행여나 쓸데없는 소리가 섞이진 않을까 숨을 죽이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생각 정리는 다 했어? 그래서 무슨 정리를 했는데, 혼자서.”
- …….
“사람을 죽일 거면 곱게 죽여. 잔인하게 피 말려 죽일 생각 말고.”
- 만나요.
새는 신음을 삼키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 당신 만나서 해야 할 얘기 있어요, 나.
며칠 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여자가 제게 할 말이 무엇일지는 충분히 짐작을 하고도 남았다. 말도 없이 사라져야 했을 만큼 깊었던 고민에, 이제야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미쳤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현서의 고뇌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단축이 될 수 있어서. 이 와중에도 혼자 괴로워했을 그 작고 여린 여자 걱정부터 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어디야.”
어디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괜스레 물었다. 운전대를 움켜쥔 손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아파 죽는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움에 발작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라.
- 아버지 만나러 멀리 좀 왔어요.
고해하듯 들려온 말에 악랄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만난 소감은.”
침잠하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 …처참해요.
그 역시 처참한 기분으로 눈꺼풀을 꾹 내리감았다. 애써 감추려 하고 있지만, 파르르 떨리는 여자의 숨소리가 귓구멍을 아프게 후벼 팠다.
“거기 있어. 내가 갈 테니까.”
후들대는 손을 움직여 시동을 걸었다. 그러곤 액셀을 깊게 밟았다. 멈춰 있던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위를 급하게 마찰했고, 굉굉한 배기음이 진동하듯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핸들을 꽉 틀어쥔 채 속도를 높여 가려던 순간이었다.
맞은편, 시커먼 블랙홀 같던 터널 속에서 시허연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강렬한 빛 사이로 저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오는 거대한 형체가 흡사 괴물 같았다.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강한 빛에 정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여보세요?
순간적으로 위험을 인지한 정혁은 왼손을 들어 이마 위를 가리고, 핸들을 쥔 오른손으론 있는 힘을 다해 방향을 꺾었다. 브레이크 또한 꾹 눌러 밟았으나 무의미했다. 차도는 좁았고, 마주 달려오는 트럭은 너무 거대했다. 도무지 피할 곳도 없는 일차선 도로에, 차창 밖의 풍경은 정체를 알 수도 없을 암흑 천지였다.
점점 더 가속을 더해 오는 상대의 악랄함에 기가 질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트럭이 눈앞에서 아른댔다.
- 서정혁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환청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온전히 울렸다. 그 순간, 쾅! 천지가 진동할 만큼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강한 충격이 감지되자 에어백이 터져 나와 이리저리 튕기는 그의 사지를 그대로 받아 냈다. 부딪힌 차체가 빙그르르 돌았다. 끼이이익, 귀를 찢는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위를 수차례 회전한 그의 세단이 멈춘 건 도로 끝의 가드레일을 길게 부수고 지난 후였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게 끝인 걸까. 길고 지난했던 오른손의 통증이 사라지고, 온몸이 마비된 듯 감각이 없었다.
꼭 그날 같았다. 무더웠던 여름날, 뙤약볕 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었던 그날. 그대로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던 그날.
꼭 그날처럼, 주변을 맴도는 공기에서 진한 죽음의 잔향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말 그대로 ‘부당한’ 불행이니까. 그냥 지나가다 돌을 맞은 거라고. 신, 아니 악마가 아무 이유 없이 집어 던진 그걸, 하필 지나가던 내가 재수 없게 맞은 것뿐이라고, 그렇게 여기기로 했어요.”
부당한 불행. 기어코 또 한 번의 부당함이 제게 들이닥쳤음을 깨닫는다.
지잉. 지잉.
어디선가 시끄럽게 울려 대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죽을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으….”
저 멀리, 뒷좌석 어딘가로 날아가 파묻힌 핸드폰이 밝은 빛을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발신인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있는 힘껏 고개를 돌려 뿌연 연기로 가득한 정면을 응시했다.
“으윽….”
고개를 뒤로 꺾어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고 나서야 희미했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하….”
온몸으로 흡수한 충격이 고통스러워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손을 뻗어 겨우 문고리를 잡아당겨 차 문을 열었다. 쓰러지듯, 거대한 몸이 문밖으로 기울고, 검은 구두가 타박, 아스팔트 위를 디뎌 섰다. 제멋대로 비틀대려는 몸을 힘주어 바로 세우고 주위를 살폈다. 상황 파악이 필요해서였다.
무언가 좀 이상했다. 분명 눈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마주 달려오던 트럭을 또렷이 기억하건만, 무언가에 충돌해 차가 파손된 곳은 오른쪽 앞 범퍼에서부터 조수석 쪽까지뿐이었다. 정면에서 달려오던 트럭에 부딪히기도 전, 또 다른 충격에 먼저 차체가 세게 부딪쳐 튕겨 트럭과의 충돌을 막아 준 게 아닌가 싶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가. 미간을 구긴 남자가 상황을 재확인하려 몇 번이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터널 앞을 응시했다. 어쩐지 서 있는 차는 한 대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거대한 카고 트럭 한 대와 정체불명의 승합차 한 대.
타박타박.
그는 천천히 발을 디뎌 움직였다. 새하얗게 사방을 메운 희뿌연 연기 사이로 걷고 또 걸어 도로를 횡으로 가로지르듯 서 있는 승합차에 가까이 다가섰다. 반파되어 형체조차 희미해진 승합차 운전석엔 낯익은 누군가가 차창에 머리를 박은 채 앉아 있었다.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린 정혁은 정신을 잃은 상대를 한참 응시하고 섰다. 좀 더 가까이에서 확인하려 다시 한 발짝, 발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창문에 의지하고 있던 고개가 툭, 아래로 떨궈지면서 지나치게 치켜들려 있던 남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제 시야에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던 악마의 얼굴이 시커먼 동공 가득 차올랐다. 차선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