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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는 아무런 말 없이 윈드실드 너머로 보이는 초라한 행색의 차선엽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깨물며, 하얀 손을 맞잡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왈칵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고 다독여 보려 애를 쓰는 듯 보였다.
저토록 선량한 얼굴을 하고,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의 가면을 쓴 눈앞의 남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자신이 아는 아버지와 사람을 죽이고도 지금껏 뻔뻔한 삶을 연명해 온 범죄자 차선엽이 같은 인간이라는 게 치 떨렸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이 휘몰아쳤다. 직접 얼굴을 보면 조금은 감정을 추스르기 편할 거라 생각했던 건 분명 제 착각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현서는 점점 더 엉켜 가는 상념의 타래를 끊어 내듯 달카닥,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타박타박. 점점 더 가까워지는 낮은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숙여 바닥을 정리하던 차선엽이 제 앞에 와 선 발끝을 훑어 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현서야.”
딸의 얼굴을 마주한 차선엽의 안색이 창백했다.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선 딸의 동공엔 경멸과 분노가 일렁였다.
“많이 찾았었는데, 여기 계셨네요.”
퍼석하게 갈라진 음성이 건조한 정적을 갈랐다.
“아빠한테 확인하고 물어봐야 할 게 있어서 왔어요. 물론 이미 다 알고 왔고, 수차례 확인하고 또 확인한 일이지만, 그래도 아빠한테 이렇게 직접 확인해야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가 될 것 같아서 왔어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
“왜 그러셨어요?”
괴괴한 정적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차선엽은 딸의 질문에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섰다.
“왜 그, 어리고 아픈 애들을 데려다가 그런 짓을….”
참담함에 목이 멘 현서의 말끝이 갈라져 나왔다.
“…하셨어요?”
“…….”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아무 죄 없는 애들한테 그런 짓을 해요? 그러고도 어떻게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 수가 있어요?”
“…현서야.”
뭐라고, 어디에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차선엽이 덥석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으려 했을 때였다. 그녀는 경기하듯 뒷걸음질 치며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손대지 마요, 끔찍해.”
자신을 짐승 보듯 하는, 경멸을 띤 딸의 눈자위가 이미 시뻘겠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로선 가장 우려했던 일이었다. 자신의 모든 추한 악행이 유일한 핑곗거리를 잃은 것이었다.
“그때는,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초조해진 차선엽은 어떻게든 딸을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부도를 막지 못하면, 너랑 나 당장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네 엄마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내 삶은 오로지 현서 너 하나였는데. 꼭 돈 벌어 성공해서, 너 하나 고생 안 시키고 예쁘고 귀하게 키우는 게 유일한 소망이었는데, 그게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꼴을 그냥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 뭐라도 해야 했어. 너까지 잃을까 봐, 나는… 난 정말 무서웠다. 마누라 잃은 것도 모자라, 제 새끼 하나 건사 못한 한심한 아버지가 될 순 없었으니까. 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선택이었는지. 그렇지만 그땐 현서 널 위해서 나는….”
“내 핑계 대지 마요, 내 새끼 위하자고 남의 새끼를 죽였다고?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당신이 인간이야?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현서의 언성이 높아졌다. 붉어진 눈망울에 그렁그렁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사실이다. 그땐 그게 널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어.”
“그래서. 그렇게 날 위한단 사람이 죗값도 안 치르고 비겁하게 도망쳤어요? 고작 열네 살짜리 중학생이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르고 고아가 됐어. 자기 아빠가 사람 죽인 파렴치한 범죄자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아빠가 제발 무사하기를. 살아만 있기를. 그렇게 매일 밤을 기도하고 울었어.”
현서는 입술을 짓이기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도망치고, 나 혼자 남아서 그 긴 시간을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어. 재수 없는 고아. 사나운 애. 독한 계집애. 지독하고 악독스러운 년. 돈이면 뭐든 다 하는, 끔찍한 악마 년!”
“…….”
“사람들한테 그런 모욕, 그런 멸시 들으면서도 상처받지 않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악착같이 굴었어. 어차피 벗어나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그렇게 바둥대고 매달린 내가 너무 싫고 증오스러운데… 그래도 나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 돌아왔다는 당신 때문에 차마, 내 맘대로 죽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버텼어.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당신이 알기나 해?”
울음 섞인 목소리가 아무렇게나 떨리고 있었다. 갈라진 쇳소리가 났다.
“그동안 재밌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끔찍하게 만들 수가 있어요? 내가 왜 그렇게 버텼는지 알면서. 내가 뭣 때문에 이따위로 살았는지 잘 알면서. 나 그렇게 사는 거, 대체 아빤 그동안 무슨 마음으로 지켜봤어요?”
“…아냐, 그런 거. 맹세코 일부러 널 속이려던 게 아니었다. 알아봐야 고통만 더해지니까. 모든 업보는 다 내가 지고 넌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어떻게 그래요, 아무 이유 없는 줄 알았던 내 모든 불행의 이유가, 당신의 그 짐승만도 못한 짓 때문이라는데!”
“현서야.”
“아빠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사람을…!”
“…….”
“사람을 죽였어요!”
치가 떨린다는 듯 입술을 덜덜 떠는 딸의 얼굴을 마주하던 차선엽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다가섰다. 딸에게로 손을 뻗은 그의 거친 손이 부질없었다.
“사고, 사고였다. 난 그냥 잠깐 데리고 있다가 겁만 주고 안전하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어. 절대로, 결단코 그 애를 죽일 생각은….”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그게 살인이 아닌 게 돼요? 유괴하셨잖아요. 당신 욕심 채우자고, 아무 죄 없는 애들 데려다가,”
확연히 이성을 잃은 현서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버티고 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결국 제 불행은 한 번도 부당한 적이 없었다.
“죽은 애한테 미안하단 생각은 하세요?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 빌 생각, 한 번이라도 해 보셨냐구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인간 이하일 수 있나.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이토록 뻔뻔한 얼굴을 할 수가 있나.
현서는 지금껏 제가 알던 아버지의 얼굴을 부정하며 물었다.
“이해는 바라지 않으마, 용서해 달란 말도 안 해. 지금처럼….”
차선엽이 한 발짝, 더 발을 움직여 애원하듯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유리와 유리가 부딪쳐 귀를 찢는 파열음이 그의 뒷말을 삼켰다.
“용서는 내가 아니라 당신 때문에 죽은 아이한테 빌어야지!”
울부짖는 여자의 여린 몸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대문 밖에 서서 기다리던 준한이 뒤늦게 소리를 듣고 들어왔으나 눈앞의 상황은 이미 비극이었다.
유리창에 내던진 유리병은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부서져 있었고, 현서의 손끝에선 뚝, 뚝, 시뻘건 핏물이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찢어진 그녀의 손을 본 준한의 동공이 크게 부풀었다.
“이해? 용서? 그런 거 바라지도 말고 이제라도 죗값 치르세요.”
준한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피범벅이 된 손으로 차선엽의 팔을 움켜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가요, 나랑. 가서 빌어요. 잘못했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자고.”
오열하며 차선엽의 옷을 잡아끄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지고 있었다. 미약한 힘에 되레 제 몸이 흔들릴 뿐이었다.
“아니다. 그냥 죽어요. 여기서 차라리 그냥 나랑 같이 죽어 버려.”
눈빛이 돈 그녀의 발걸음이 바닥에 나뒹구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향했다. 이를 감지한 준한이 재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저지했다.
“놔!”
“그만. 그만해, 차현서.”
“놔, 이거!”
현서는 준한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어내며 입술을 악물었다. 준한은 피가 흥건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더는 위험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뿐만은 아니었다. 더 크게 벌어진 상처에서 후드득, 핏물이 배어났다. 맞잡은 준한의 손도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녀는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제 앞에 넋을 잃고 선 아버지를 노려봤다. 경멸과 멸시가 가득 쌓인 동공에 격분이 일렁였다.
“다시는.”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
“당신이랑 나, 살면서 얼굴 볼 일 더는 없어요.”
싸늘한 마지막 말을 내뱉곤 매정하게 돌아섰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차선엽이 좁은 툇마루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윽고 늙은 남자의 한 서린 흐느낌이 좁은 마당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