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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 들고 있던 공구 상자를 집어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은 차선엽이 덥석 차문엽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뭐, 뭐라구?”
“말했다구, 내가 다. 현서도 형님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젠 걔도 다 안다구요.”
머릿속이 시허옇게 질렸다. 그렇게 애를 쓰고 숨기려 했던 제 추악한 본모습을 이렇게나 허망하게 들켜 버렸단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뭘 위해서 여기까지 왔던가. 지금껏 무얼 바라 이렇게 아등바등 살았던가. 삶을 지탱하던 주축이 단숨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허망함에 멱살을 움켜쥔 손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이어 다리마저 힘이 풀린 그가 털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걱정 마슈. 좀 충격을 받은 것 같긴 해도 뭐, 현서 걔가 그깟 일로 자기 아버지 버릴 매정한 성격도 아니고. 서정혁 그 새끼한테 협박까지 받는 마당에 언제까지 숨길 순 없는 노릇이잖수. 형님이나 나나 계속 이렇게 그 양아치 새끼한테 약점 잡혀서 끌려다니느니 그냥….”
“현서는. 지금 현서 어딨는지 알아?”
메말라 쩍, 갈라진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안 그래도 현서가 지 아버지를 많이 찾아요, 지금. 내가 찾으면 연락을 해 주기로 했구. 아까 메시지 남겼으니 보면 곧 연락이 오겠지.”
차문엽은 별일 아니라는 듯 아연실색이 되어 있는 제 형을 지나쳐 건들건들 마당을 거닐었다. 그러다 낡은 평상 위에 놓인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제멋대로 꺼내 들어 와그작, 베어 물고는 그대로 대자로 뻗어 누워 버렸다.
“아유, 좋다아. 공기 좋고, 분위기 좋고.”
차문엽은 걸근거리는 목소리로 소란을 떨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그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곤 바구니에 함께 있던 과도를 들어 탁, 탁, 사과를 찍어 흉측한 생채기를 만들어 댔다.
“형님, 기억 나슈? 우리 사고 치고 여기서 이러고 둘이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으면 할머니가 마당 쓸던 빗자루로 우리 때려죽이고 당신도 따라 죽고 말겠다고 맨날 그렇게 신세 한탄을 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우리 참, 말썽 많이 부렸지. 친손주도 아닌 놈들 둘을 어떻게 키웠나 몰라, 그 노인넨.”
큭큭거리는 차문엽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정적뿐이던 산중에 시끄럽게 울렸다.
“그래서 내 형님이 여기 있을 줄 알았지. 갈 데가 어딨겠어, 우리 같은 인간들이.”
그는 무릎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걱정 마슈. 내가 그동안 현서한테 빚진 거, 그리구 형님한테도 그간 못 할 짓 한 거 다 한 방에 갚고 갈 계획이니까.”
차문엽의 눈동자에 별안간 살의가 돌았다. 반지빠르게 그걸 알아챈 차선엽이 고개를 쳐들어 그를 바라봤다. 불안한 의심으로 가늘어진 눈매가 움푹 팼다.
“무슨 뜻이야. 뭘, 어쩐다구?”
“내가 당한 거 그대로 안 돌려주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잖수. 어차피 나도 밑천 마련하면 그냥 상해로 돌아가서 크게 한탕 할 생각이거든. 이 좆같은 나라에선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시 한국 뜰 거요. 좀 쫄리긴 하지만 뭐, 러시아에 있을 땐 마피아들한테까지 쫓겨도 봤는데 더 무서울 것두 없지. 이번엔 준비 단단히 해서 가려구.”
“무슨 생각이냐니까!?”
“그 양아치 새끼 말이유.”
“…….”
“어찌나 인생을 쓰레기처럼 살았는지, 그놈 하나 없어지면 인생 행복해질 사람들이 아주 한 트럭이더라고.”
“뭐?”
“나야 땡큐지. 그 새끼한테 무시당한 분풀이도 하고, 그 대가로 돈도 챙기고.”
손에 쥔 과도로 사과를 반복적으로 찔러 대는 꼴이 퍽 심상치 않았다. 떨리는 두 다리로 겨우 땅을 딛고 선 차선엽이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차문엽에게로 다가섰다.
“너…!”
“내가 그 새끼 죽여 버리려구.”
차문엽의 입가에 저열한 웃음기가 싹 걷히고 있었다.
***
현서는 낯선 주소가 적힌 핸드폰 액정만 멍하니 바라봤다. 옆에서 운전대를 쥐고 있던 준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흘긋, 그녀의 상태를 훑었다. 원래도 작고 마른 몸인데, 며칠 만에 더 야위어 버린 얼굴이 보기 안쓰러웠다.
아버지를 찾았단 차문엽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무섭게 집을 나서던 그녀였다. 준한은 위태위태한 몰골로 차에 오르려는 그녀를 겨우 잡아채 조수석에 앉히고 자신이 운전대를 잡았다.
서울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내내 깊은 침묵만 감돌았다. 그 침묵의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준한도 굳이 정적을 깨려 하진 않았다.
당장의 소낙비를 피할 곳을 찾는 그녀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낡은 우산이라도 받쳐 들고 곁에 있어 주는 일뿐이었다. 알고 있다. 지금 차현서의 마음이 절절히 향해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여자의 눈에 지금 자신이 보이지 않는단 사실도, 제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 따위, 그녀에겐 전혀 중요치 않단 것까지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지금까지와 달라질 건 없었다. 그냥 이대로 이렇게. 늘 그랬듯, 결국 결정적 순간에 여자의 옆을 지킬 유일한 남자가 저뿐이라는 사실에 족할 뿐.
“너 괜찮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으나 무릎 위, 떨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는 그녀의 행동이 어지러운 그녀의 심리 상태를 충분히 방증하고 있었다.
차현서는 겁에 질려 있었다. 곧 마주하게 될 자신이 몰랐던 진실에. 기껏 외면했던 아버지의 진짜 얼굴을 바라봐야 할 끔찍함에 지레 겁을 먹고 떨었다.
“모르겠다, 난. 내가 지금 널 이렇게 데리고 가는 게 맞는 건지.”
준한은 이게 과연 그녀를 위해 잘하는 짓인지 확신이 없어졌다. 도리어 그녀의 고통과 악몽을 부추기는 꼴이 되는 건 아닐지 덩달아 두려워진 거였다.
“아버님 만나서 묻고 싶은 거 묻고, 답까지 다 듣고 나면 어쩔 생각인데.”
“…몰라.”
내내 꾹 닫혀 있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이마 위로 흐르는 머리칼을 길게 쓸어 넘기는 하얀 손가락이 애처로웠다.
“계속 이렇게 숨어만 있을 거야? 언제까지.”
“그만 나가야지.”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읊조렸다.
“확인할 거 확인하고, 정리할 거 정리하고. 상황 인식 제대로 하고, 내 주제가 어떤지 다시 파악도 해 보고. 나 지금 그거 하는 중이야. 아빠 만나서 굳이 확인하려는 것도 그 과정 중 하나고. 아무래도 그래야 내가 제대로 포기가 되겠다 싶어서.”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길게 떨렸다.
“처음도 아닌데. 지금껏 평생을 포기하면서 살았는데, 뭐가 아직도 이렇게 낯설고 힘이 드는지 모르겠어. 언제부터 내 몫 챙기고 살았다고.”
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자.”
핸드폰에서 어렵게 시선을 떼어 낸 그녀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응시했다. 앙상하게 마른 가지만 가득한, 늦겨울의 볼품없는 나무들이 차창 밖으로 무심히 스쳐 지났다. 하얀 손가락이 버튼을 눌러 창문을 조금 내려 열자, 스산한 바람이 차갑게 밀려들었다. 미열이 식고, 폐부에 찬 공기가 가득 스며들었다.
“선배.”
마르고, 아득한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무섭다, 나는.”
준한은 말없이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생기를 잃은 두 뺨이 아스라이 떨리고 있었다.
“그 사람도 나만큼 진심이었을까 봐.”
짧은 침묵이 차분하고도 쓸쓸히 스쳤다. 차는 꼬불꼬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등성이 위 도로를 지나고 또 달렸다.
***
인적 드문 도로의 어둠은 칠흑 같았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갓길에 겨우 차를 세운 정혁이 쿵, 핸들에 쥐어박듯 이마를 찧었다. 한참 전부터 통증을 억누르고 참으며 달렸던지라, 온 얼굴엔 이미 식은땀이 흥건했다. 갑작스러운 증세였다. 차문엽의 전화를 받고 반쯤 정신이 나가 달려온 상황에 진통제를 소지하고 있을 리 없었다.
고통을 참느라 핏발이 벌겋게 선 눈자위와 경직된 얼굴 근육들이 제멋대로 벌벌 떨려 댔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통증은 극심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끊어질 듯한 오른손을 꽉 움켜쥔 채, 들숨과 날숨을 쉴 새 없이 내뱉는 일뿐이었다. 제어 못 할 과호흡에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내내, 동생이 보고 싶으셨던 거죠.”
“짧은 순간의 기억에만 잠식돼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껏 충분히 슬펐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늘 보고 싶었고, 충분히 슬퍼했는데. 왜 아직도 이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악랄한 신의 의도가 궁금했다. 모든 게 다 제 탓이라고, 새하얀 빛을 죄 삼켜 먹은 악마는 다름 아닌 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분에 맞지 않을 행복 따위,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가 하고 싶은 건가.
“하…!”
움츠린 몸을 발작하듯 일으켜 세웠다. 가빠진 호흡을 애써 억누르며 몸을 떨었다. 푹 파인 뺨이 요동치듯 들썩이고, 바짝 마른 입술이 폐허처럼 공률했다.
겨우 눈동자를 움직여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없었다. 차문엽과 약속한 시간까지 고작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마음이 바빠졌다. 자칫하다간 또 여자를 놓칠까 두려워진 거였다.
일단 만나야 했다.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고마움에, 미안함에 인사도 없이 뒷걸음질만 치려는 그 착한 여자의 손목을 붙잡아 채고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 말하고 확인시켜 줘야만 했다. 지금껏 인생의 대부분을 체념하고 포기하며 살아온 여자에게, 이번엔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려야 했다.
지이잉.
스산한 불안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겨우 고개를 쳐든 정혁은 이를 바득 물고, 운전대를 잡아 쥐었다. 부릅뜬 눈에 형형한 붉은 빛이 번져 올랐다. 그는 곧바로 가속 페달을 깊이 밟아 차를 내달렸다. 고급 세단이 무거운 배기음을 내며 거친 아스팔트 위를 빠르게 마찰해 나갔다.
지잉.
조수석에 던져뒀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정혁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액정 속 발신인은 다름 아닌 레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