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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95화 (9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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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은 제 앞에 놓인 화병을 오랫동안 노려보듯 응시했다. 새하얗던 꽃잎이 퍼석하게 말라 누런 흙빛으로 시들어 있었다. 볼품없고 초라했다. 그대로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처박아 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참담한 최후였다.

“지금 당신이 들고 온 거, 내가 지불한 돈의 가치에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대표적인 물건 중 하나라는 거. 알고 있어?”

“가치 있어요. 다 죽은 것 같은 이 삭막한 사무실에 살아 있는 존재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잖아요. 저 마크 로스코 그림이랑도 되게 잘 어울리고요, 뭣보다, 이렇게 예쁜데.”

“눈에 예쁜 게 며칠이나 간다고.”

“아, 본부장님한텐 예쁘단 말이 그런 의미인 줄 몰랐네요. 어쩐지 너무 남발하시더라니.”

“본인의 가치를 이딴 꽃이랑 비교해서 평가 절하하고 싶어?”

“기껏 생각해서 가져온 건데, 마음에 안 들어도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어요? 그렇게 싫으시면 그냥 가져갈게요. 그냥 제 방에 하나 더 꽂아 두면 되니까….”

“누가 싫대. 그거 내려놔, 다시.”

싫은 게 아니라 두려웠다. 생명력 있고, 아름답고, 활기 넘치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 그 무언가가 무채색의 제 삶관 전연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제 어둠이 그 새하얀 존재를 꿀꺽 집어삼켜 버리고 말까 봐.

그런데, 기어코 이렇게 되어 버렸다. 부당한 불행, 그 엿같은 돌에 또 한 번 맞아 산산조각 부서지고 기어이 박살이 났다. 회복도 불가할, 가공할 충격의 피해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졌다. 처음 겪는 무력함에 판단력도, 이성도 잃었다. 그대로 머저리가 된 것 같았다.

이제 뭘 할 수 있는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가 고개를 뒤로 한껏 꺾어 젖혔다. 불끈거리는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눌러 힘을 준 손등에 굵은 핏줄이 바짝 불거져 올랐다.

“후….”

긴 한숨을 내뱉으며 피곤한 눈을 꾹 감았다. 감은 두 눈 위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리덮었다.

차현서는 이틀 전, 사무적인 메시지 한 통만을 보내온 게 다였다.

「업무에 피해 가지 않게 급한 용무는 다 처리해 뒀습니다. 며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너무 늦지 않게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유도, 변명도, 사정 설명도 없는 메시지는 박정하고 매몰찼다. 그래도 최소한 생존 통보는 받은 셈이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죄송. 지금 이 순간 차현서가 제게 느끼는 감정이 그뿐이라는 것에 분이 일었다. 어떻게 이 복잡다단한 감정을 죄송이라는, 그 좆같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단어로 함축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사라지기로 작정한 여자는 제게 변명할 기회, 돌아볼 기회, 다시 붙잡을 기회 따윈 줄 수 없다는 듯 무참히 연락을 끊었다. 평소엔 그렇게 끊임없이 확인하려 했으면서. 끊임없이 저를 들볶고 뒤집어 마음을 확인받고 진심을 추궁하려 했으면서, 왜 정작 이런 순간엔 아무 확인도 하려 하지 않는 건지.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고민을 하고, 결론을 내고 나면. 그러면 제 옆으로 돌아올 수 있나. 과연 그럴 작정이긴 한 건가.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대체 언제까지 이 지옥에서 혼자 버티라고….

머리가 지끈댔다. 심기는 어지럽다 못해 뒤죽박죽 뒤엉킨 지 오래였다. 어디서부터 이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늘 곁을 채우던 여자의 온기를 더 이상 누릴 수 없단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실체 없는 환상통에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발작적 공황까지 더해졌다.

단 며칠 만에 삶은 피폐해졌고, 세상은 잿빛이 됐다. 온통 암흑이었다.

똑똑.

진공처럼 내려앉은 고요를 깨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답했다. 열린 문으론 레오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차현서 씨는 아직 차선엽 위치 파악을 못 한 것 같습니다. 차선엽도 별다른 기미는 없고요.]

밀항을 고민했던 차선엽은 결국 자신이 어린 시절에 지냈던 어느 시골 마을로 돌아가길 원한다며 말을 바꿨다. 자신이 부모에게 버려졌을 당시, 보따리장수로 생계를 연명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녔던 할머니를 따라 잠시 머물렀던 곳이었던지라 고향은 아니라 했다.

그저 키워 준 할머니, 동생과 함께 가장 오래 머물렀던 추억의 공간일 뿐, 기록에 남은 본적지도 아닐뿐더러 현서에겐 한 번도 알려 준 적 없는 공간이니 그녀가 찾으려야 결코 찾아낼 수 없을 장소라 석변했다.

정혁은 부러 그의 원을 수락했다. 차현서를 잘 알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자는 분명 제 아버지의 흔적을 애타게 찾아 헤맬 것이라는 데에 모든 걸 걸었다. 차선엽을 그대로 풀어 놓으면 그녀는 낚시찌를 거리낌 없이 물어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미워도 아버지니까요.”

저완 다른 여자였다. 아버지를 미워하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원망하지만 밀어내지 못할 여자. 그렇기에 아버지의 원죄를 제 것처럼 받아들여 도망을 쳤을 터다. 제 탓일 게 하나 없음에도 자책을 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여자가 떠올라 가슴이 덜컥댔다.

[대신 차문엽이 나타났습니다.]

이어지는 레오의 말에 정혁이 고개를 홱 꺾었다.

[언제.]

[오늘 새벽에요. 어제저녁부터 마을에 나타나선 차선엽 행방을 여기저기 캐묻고 다니더니, 결국엔 차선엽이 머무는 산 중턱까지 찾아냈고요.]

예상대로라면 차문엽은 이제 곧 차현서에게 연락을 해 그의 위치를 알릴 차례였다.

벌떡 몸을 일으킨 정혁은 소파 위 벗어 뒀던 코트를 챙겨 들고 성큼성큼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읽어 낸 레오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운전은 제가 할게요.]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한 걸음 발을 떼어 내기 무섭게 잠잠하던 정혁의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의 전화였으나 그는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곧장 귓가에 가져다 댔다.

“서정혁입니다.”

- 차문엽이요.

예상보다 빠르게 온 연락에 낮은 구두 굽 소리가 타박, 제자리에 멈춰 섰다.

- 지금쯤 우리 본부장님께서 아마 나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수다.

“잘 아는 분이 왜 그러셨습니까. 피차간 서로 말 안 통하는 상대도 아닌데요.”

- 나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거래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깡패 새끼들 시켜서 협박하고, 24시간 감시하고, 죽일 것처럼 윽박지르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입었다고 다 멀쩡한 인간이 아닌 거지. 겉가죽 화려한 뱀이요, 당신은. 양아치, 깡패 새끼들보다 더하다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서정혁 당신이랑 거래를 합니까, 대체 뭘 믿고!

“거래하겠다고 전화 건 거 아니셨어요. 그 양아치, 깡패 새끼랑?”

- 허! 참, 나!

“사족 각설하고요. 차문엽 씨 원하는 건 돈일 게 뻔하고. 차문엽 씨 생각엔 내가 원하는 게 뭔 거 같습니까?”

- 현서. 현서 있는 데가 궁금한 거 아니유?

“글쎄요.”

- 신문이며 뉴스며 아주 떠들썩하던데. 이름 석 자만 안 나왔지, 우리 현서랑 당신이랑 아주 그렇고 그런 깊은 사이라고? 전혀 몰랐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이랑 우리 형님 악연을 현서한테 줄줄 불어 놨으니 이 사달이 난 거구.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당신한테 아까운 돈 안 뿌려도 그 여자 행방 정도는 알아낼 수 있습니다.”

- 뻥카 작작 날리슈! 알아냈으면 진작에 만났겠지, 안 그래?!

“돈이 필요하면 내가 좀 더 솔깃해할 조건을 내미셔야죠. 괜히 어설프게 굴다가 또 생명의 위협 느낄 일 생기면 어쩌시려고.”

- 이 씨발 새끼가…!

짓이기듯 상스러운 욕지거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지근거리에서 차문엽의 흥분한 목소리를 함께 들은 레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장에 차현서를 찾아낼 미끼인 차문엽을 이렇게까지 자극해도 좋은 건가 싶어서.

말대로 여자 하나쯤 찾는 일이야 어떻게든 못할 바는 아니었으나 지금 당장 눈앞에 차현서를 데려다 놓지 않으면 안 될 상태의 서정혁인지라 어쩐지 덩달아 조바심이 이는 거였다.

그러나 레오의 우려와 달리, 당장에라도 전화를 끊을 듯 소리를 지르던 놈은 곧 언제 그랬냔 듯 말을 잇고 있었다. 투명하게 내보이는 바닥이 퍽이나 얕고 지저분한 인간이었다.

- 우리 형님이랑 나랑 입 다물고 조용히 이 나라 뜨면 어때. 그 정도면 만족하슈? 듣자 하니 형님한테 현서랑도 연락 끊고 죽은 듯이 살라고 했다던데. 서정혁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 아니야?

“다행이군요. 대가리가 아주 나쁘진 않으셔서.”

- 허, 이런 미친 새끼…!

“미친 새끼한테 받을 돈 있으니 말 좀 사리시죠.”

- 만납시다!

“후회하실 텐데요. 면상 마주하면 이번엔 제가 직접 죽여 버릴지도 몰라서요.”

- 씨발, 뭐?

“그래서 세부 조건은. 뭡니까, 구체적으로 원하는 거.”

- 서정혁 당신이 직접 나와, 돈 들구! 깡패 새끼들 다 치우고, 맨날 뒤에 졸졸 따라다니는 양놈도 떼고, 혼자서만 나와, 공평하게. 나와서 다시는 나 괴롭히지 않겠단 각서 쓰고, 지장 찍고! 그래야 나도 믿고 거래를 하지.

“신용 없는 거래는 애초에 안 합니다만?”

- 이 새끼가 진짜, 사람 가지고 노는…!

“귀가 썩을 것 같아 이만 끊습니다.”

정혁은 툭,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레오의 잇새에서 긴 한숨이 샜다.

지잉.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액정을 꾹 눌러, 차선엽이 보내온 주소가 적힌 메시지를 확인한 매끈한 미간이 슬몃 좁아 들었다. 그는 제 앞에 우두커니 선 레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키.]

[혼자 가시게요?]

[그게 조건이야.]

[너무 뻔한 위협인데요?]

[그럼 뻔하게 대비를 해, 네가 그럼.]

레오의 손에 있는 스마트 키를 탁, 채 간 정혁이 가차 없이 돌아서서 빠르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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