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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94화 (9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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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꾸물대던 하늘이 칙칙한 흙빛으로 밝아졌다. 내리던 싸락눈은 어느새 차가운 빗줄기로 바뀌어 있었고, 칼바람은 도리어 더 매섭게 불었다.

하룻밤을 꼬박 카페 모퉁이에서 지새운 현서는 날이 밝고 나서야 멍하니 주머니 속에 넣어 뒀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원을 켜기 무섭게 수없이 찍힌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은 대부분 그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아마도 제가 작은아버지를 만났단 걸 이미 알아챈 모양이었다.

문득, 되레 더 정리가 쉬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스쳤다. 구구절절 제가 알게 된 사실과 그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아도 머리가 비상한 남자이니 제 회피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도 남을 거였다. 게다가 공사 구분 철저한 그답게 저를 제외한 본인 주변의 그 어떤 변화도 허용하지 않을 터였고.

이 순간에도 제 일신과 주변인들의 상황을 갈무리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스스로의 뻔뻔함과 이기심에 진절머리가 다 났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건가. 그녀는 자조하며 꽁꽁 언 손가락으로 액정의 버튼을 꾹 눌렀다.

“나야, 선배.”

수신자는 준한이었다. 밤새 멍하니 서서 지난 모든 상황들을 곱씹고 또 곱씹다 기억해 내 버렸다. 언젠가 준한이 말했던 사건이 다름 아닌 그날의 일이었음을. 괴로워도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러니 자연히 물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 너…! 어디야!

기가 막힌 듯 언성을 높이는 준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강강했다.

- 나 지금 경찰서에 너 실종 신고하러 나가려던 참이었어, 알아?

“선배.”

- 어디야?

“선밴 다 알고 있었지.”

- 지금 어디냐니까?

“이윤형 의원한테 의뢰받았단 사건, 과거 미제 사건이랑 같이 병합해서 보고 있었잖아. 아니야?”

고함에 가깝게 목소리를 높이던 준한이 돌연 말을 멈췄다. 말문이 막힌 듯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재차 추궁하듯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아버지가 유괴범, 아니, 살인범이었단 것도, 본부장님이 그 사건의 피해자였단 것도 다 알았을 테고.”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 만나자. 만나서 얘기해 줄게, 다. 말해. 어디야. 내가 갈게.

수화기 너머, 준한의 메마른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

가늘게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굵어져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윈드실드 너머, 바쁘게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보이는 작고 여리여리한 형체의 여자를 확인했다. 곧장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쳐 든 채 뛰듯이 다가갔다.

빌딩의 좁은 처마 밑에 겨우 몸을 밀어 넣고 서 있던 여자의 몸이 차가운 비에 흠뻑 젖어 덜덜 떨려 대고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쓰러질 듯 창백히 서 있는 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다 알아 버렸구나.

통화로 어렴풋이 짐작했던 상황이 눈앞의 실재가 되어 또렷해지자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핏기 없고 생기 없는, 꼭 죽은 사람처럼 시들어 있는 차현서의 얼굴이 그를 근원 모를 공포로 몰아갔다.

준한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젖은 어깨 위를 감싼 채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힘없이 버티고 서 있던 몸이 우산 속으로 홱, 딸려 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갓길에 주차한 차 문을 열어 그녀를 조수석에 밀어 앉히곤 자신도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너 밤새 여기 있었어? 이렇게 추운데, 이 비를 맞고…!”

“왜 말 안 해 줬어?”

돌연 텅 빈 눈동자가 천천히 준한을 돌아보며 추궁을 했다.

“왜 항상 선배는 다 알면서 나한테 말을 안 해 주는 건데? 내가 미워서? 나 엿 먹어 보라고?”

담담한 어조의 퍼석한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질 않았다. 분명한 건 질책도 원망도 아니란 사실이었다. 할 말을 잃은 준한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말해. 선배가 알고 있는 거 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현서야.”

“바보가 된 기분이야. 혼자만 아무것도 못 보고 내 감정에 취해서 주책없는 짓만 골라서 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알아, 이런 기분…?”

잔뜩 억누르고 있었지만 새된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려 다 갈라져 나왔다. 시뻘겋게 젖은 동공이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노도처럼 일렁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준한의 잇새에서 긴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맞아.”

하릴없이 말문을 연 준한의 미간이 움푹, 좁아졌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뭐가 차현서를 위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해서였다.

“아버님이랑 서정혁 본부장. 차마 입에도 못 담을 끔찍한 악연으로 얽힌 사람들이야.”

파랗게 질린 작은 잇새에서 하, 하고 떨리는 한숨이 차갑게 터져 나왔다.

“그럼, 이윤형 의원하고는? 우리 아버지, 그 사람하곤 대체 뭐로 엮여 있는 건데?”

“말했지만 이 의원의 혐의는 유괴 교사야. 이미 내부 조사는 철저히 끝낸 듯하니 검찰에선 늦어도 오늘 중으로는 소환장 날릴 거고, 그럼 언론 보도도 슬슬 시작되겠지.”

“이윤형이 우리 아버지한테, 본부장님이랑 본부장님 여동생을 유괴, 납치하라고 교사했다는 거야? 도대체 왜?”

“당시 서정혁의 아버지 서종진 검사가 집중해서 털던 대상이 이윤형이었어. 그때도 워낙 거물이었던지라 곧장 직진은 못 했던 거고, 이윤형이랑 유착돼 있던 기업인들부터 줄줄이 하나둘씩 엮어 족쳐서 숨통을 틀어막아 보려는 생각이었겠지. 그 수많은 관련인들 중에서도 꽤 크게 엮였던 한 명이 SY중공업 차선엽 사장, 너희 아버지야.”

“열네 살 때 아버지가 실종됐고, 스무 살 때 다시 만났다 그랬나? 물론 그 이후에도 지금껏 죽은 사람이었던 아버질 제대로 마주할 시간은 없었을 거고. 그럼 차현서 씬,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게 있기는 해?”

“궁금하지 않아? 딸 앞에서 한없이 자상하고 애정 넘치는 딸 바보가 그 가면 벗어 던지면, 진짜 어떤 모습의 인간이 되는지.”

“그저 피 섞였단 이유 하나만으로 감정적으로 구는 꼴이 토할 것 같아서.”

아른대는 참담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의 지난 삶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치 떨리게 끔찍스러워서였다.

“이 의원이랑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던 너희 아버지로선 아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야. 당시 SY중공업은 이미 2차 부도까지 맞은 상태였고, 끝은 뻔했어. 난국을 타개할 뾰족한 다른 수가 없었을 거야. 아마 그걸 빌미로 이윤형이 거래를 제안했겠지. 서종진 검사만 막으면 뭐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유혹을 했던 것 같아.”

아프도록 눌러 깨문 입술에 붉은 핏빛이 어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일한 사건의 목격자이자 피해자였던 서정혁이 실어증 증세에 시달리면서 범인에 대한 일체의 증언을 거부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채로 수사가 종결됐어. 물론 때맞춰 이윤형이 터뜨린 서종진 뇌물 수수 게이트가 더 큰 이슈로 불거지면서 유괴 사건이 흐지부지된 탓도 있었고. 그 뒤는….”

“…….”

“뒤는, 너도 잘 아는 얘기. 차선엽은 홀연히 사라져 실종자가 됐고, 서종진은 자살을 택했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된 이야기였다. 가해자의 딸은 사라진 아버지 대신 갚아야 할 빚에 짓눌리며 평생을 아등댔고, 피해자의 아들은 목숨을 잃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려 평생을 신음했다.

과연 자신이 그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염치가 있다면,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마음을 품는 일조차 해선 안 되는 거 아닌가.

현서는 무릎 위에서 덜덜 떨리는, 제 차가운 두 손을 꽉 맞잡아 쥐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흘긋 내려다본 준한의 얼굴에도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 유치하고 근거 없는 불길함을 핑계 삼아서라도 서정혁에게 끌려가는 차현서를 붙잡아 제 곁에 뒀어야 했다고.

“대체 어떻게 알았어. 서정혁이 너한테 직접 말하진 않을 것 같았는데.”

“작은아버지가 왔다 갔어. 본부장님이 자길 이용했고 일부러 함정에 빠뜨렸다고. 아빠랑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아마 같은 이유 같아.”

“서정혁은? 어딨어, 지금.”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치정이 얽힌 재벌가 추문만큼 씹고 뜯고 즐기기 좋은 가십거리는 또 없었다. 양재숙의 불륜설이 터진 이후로 장기용과 현서의 이름이 나란히 거론되고, 또 서정혁의 이야기까지도 함께 퍼지는 와중에 이렇게 차현서 혼자만 방치해 놓은 놈의 행방이 궁금했다.

“출장 갔어, 본사에 일이 있어서. 안 가도 괜찮다는 걸 내가 등 떠밀었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렇게 다 알고 나서 보니 잘했다 싶어.”

작고 창백한 얼굴에 자책과 절망감이 어리고 있었다. 차현서 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불쑥 치민 불길함에 준한은 여자의 젖은 어깨를 꽉 움켜쥐고 제게로 시선을 돌려 다그쳤다.

“차현서, 너 지금 상황 파악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했어, 충분히. 내가 본부장님한테 얼마나 못 할 짓을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마음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얼마나 천진했었는지….”

준한의 잇새에서 허, 하는 헛숨이 발작처럼 튀어나왔다.

“왜 그리로 생각이 튀어? 서정혁한테 못 할 짓 한 건 너희 아버지고, 넌 아무 죄도 없이 그놈이 짠 복수 계획에 놀아난 거라고. 모르겠어? 처음부터 너한테 일부러 접근했어, 그놈은. 근데도 그런 소리가 나와, 넌? 네 꼴은? 지금 네 꼴이 어떤지 거울이라도 좀 보여 줘 봐?”

분노가 욱 치밀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마도 대학 시절부터 현서를 알고 지낸 이후 이토록 화를 낸 건 처음이지 싶었다.

“우리 아빠 때문에 그 사람 인생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괴롭게 버텼는지 아니까. 본부장님이 애초에 나 이용해서 복수하려고 접근했대도 어쩔 수 없고, 아무 할 말 없어. 당연해.”

“차현서.”

“솔직하게 다 얘기해 줘서 고마워. 그만 가.”

벌컥 차 문을 열어젖힌 여자는 다시금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다급히 뒤따라 내린 준한이 성큼성큼 쫓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가자.”

“…….”

“숨을 곳 필요하잖아, 너 지금.”

준한은 요란한 빗소리를 뚫고 목소리를 높였다. 얼음장 같은 물줄기가 사선으로 빗발쳐 새하얀 현서의 뺨 위를 때리고 있었다.

“너 지금 서정혁한테서 도망치고 피하고 싶은 거 아니냐고.”

“…….”

“나랑 가, 그러니까.”

“…선배.”

“내가 숨겨 줄게. 내 옆에서 숨어 있어. 안 보이는 데로 사라져서 사람 미치게 하지 말고. 내 옆에서, 보이는 데서 좀…!”

준한은 전에 없이 싸늘히 굳은 표정으로 현서의 손목을 다시금 움켜쥐었다. 그녀가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다시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곤 그녀의 몸을 밀어 앉혔다.

“핸드폰.”

운전석에 오른 준한이 불현듯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의 코트 주머니로 그의 손이 불쑥 밀려들어 왔다. 그녀의 핸드폰을 꺼내 든 준한이 전원 버튼을 꾹 눌러 기계를 꺼 버리곤 그대로 다시 그녀의 젖은 손 위에 올려놨다.

운전대를 쥔 그가 곧장 액셀을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 현서는 그런 준한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딘가 잔뜩 화가 난 얼굴의 그의 얼굴이 퍽 낯설어서였다.

“선배.”

“아무 말 하지 마.”

“…….”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 추측도 하지 마. 다 내가 알아서 할게. 아버님 찾는 것도, 서정혁이 너 못 찾게 꼭꼭 숨겨 놓는 일도, 다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냥 눈 딱 감고, 귀 틀어막고 모르는 척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주 잠시, 현서는 젖은 제 몸 위에 올려진 준한의 코트 자락을 가만 내려다보다 고개를 반대로 돌려 버렸다. 타인을 배려하기엔 작금의 제 상황이 전혀 여유롭지 못했다. 지금 당장 제 목전에 들이닥친 절망이 너무 거대하고 무거워 그걸 견디기에도 버거운 탓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한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른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올 틈 하나 없이 빼곡했다.

차창 밖 젖은 도로의 풍경이 아스라했다. 뜨겁게 달궈지는 차 안 공기에 몸이 저릿저릿 녹아내렸다.

이대로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으면.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 닦다 종국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곤 곧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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