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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이어지는 쌀쌀한 꽃샘추위에 커다란 창에 희뿌연 수증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그 희뿌연 풍경 사이, 금세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는 표정으로 위태롭게 앉은 현서가 차문엽과 마주 앉아 있었다.
현서는 완전히 넋이 나가 아연한 얼굴이었다. 멍하니 차문엽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어떤 초점도, 어떤 생각도 담겨 있질 않았다. 텅 빈 채였다.
자기가 지금 무슨 얘기를 들은 것인가. 제 귀를 의심하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덜덜 떨리는 입술을 아프게 짓깨물 뿐이었다.
“서정혁이 일부러 나랑 네 애비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벌인 일인 줄도 모르고. 내가 멍청하게 굴었지, 씨팔….”
차문엽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꼴만 보자면 서정혁이 제 입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자신을 납치해다 상하이항에 빠트려 죽이려던 걸 겨우 도망쳐 살아 돌아왔다는 말이 영 틀리지는 않은 것도 같았다. 그는 부르르, 분노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 현서 너한테도 계획적으로 접근한 걸 거다. 여차하면 너한테도 해코지를 했을 새끼라고!”
해코지. 누가 누구에게 해코지했단 말인가.
현서는 제 아비 못지않게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차문엽을 혐오스럽게 응시했다.
충격에, 당혹감에 그리고 소름 끼치는 경멸감에 눈앞이 어질댔다. 모든 이성과 감정이 뒤죽박죽으로 엉키고 있었다.
그토록 가엾어하고 안타까워했던 아버지란 사람이 실상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이었단 사실과 그런 아버지 때문에 서정혁을 만났다는 아이러니함. 그런 서정혁을 지독하게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는 장난 같은 운명.
무엇 하나 가볍지 않은 상황이 그녀를 어지러이 뒤흔들고 있었다.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분노와 배신감이 혼융된,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만큼 혼란한 감정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조각난 마음이 갈 곳을 잃어 부유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정표를 잃은 아이 같았다. 그저 저 깊은 어둠의 무저갱 속으로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기시감을 동반한 절망감이 온몸을 덮쳐 왔다. 잠식당한 심장을 부여잡고,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는요. 아빠 지금, 어디 있어요?”
“후…. 형님도 아마 그 새끼한테 협박당해서 너한테 연락도 못 하고 있을 거다. 내 짐작 가는 데가 한 군데 있긴 해서 곧바로 거기로 가 볼 생각이야.”
그동안 모든 연락을 두절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정혁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아 버렸으니 어디로든 숨고 도망쳐야 했겠지.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부터 회피하고 싶었겠지. 자신 때문에 평생을 지옥에서 살아온 이에게 사과는커녕 외면해 모른 척을 하려 했던 거다.
파렴치함에 치가 떨렸다. 그 뻔뻔한 악마가 제 아버지란 사실이 치욕스럽고 끔찍했다.
“찾으면 너한테 바로 연락하마.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지금 가진 돈이 한 푼도 없….”
툭.
현서는 초점 없는 눈으로 꽉 움켜쥐고 있던 핸드백을 통째로 떠밀었고, 백은 둔탁한 소음을 내며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찾는 대로… 바로 연락 주세요.”
“그래. 너한테 제일 먼저 연락하마!”
떨어진 백을 주워 챙긴 차문엽이 흘긋, 안을 확인하며 성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경멸스러운 얼굴을 더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대로 드르륵, 의자를 밀어 몸을 일으켰다.
“근데…. 너, 괜찮냐? 혼자 갈 수 있어?”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핏기 없는 현서의 얼굴을 확인한 차선엽이 퍽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시허옇게 질린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아슬아슬,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서서 걸었다. 아니,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귀가 먹먹해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라 해야 더 옳은 설명이었다.
겨우 밖으로 걸어 나와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걸었다. 꽉 막힌 가슴이 터질 듯 갑갑했다.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결국, 카페 모퉁이를 돌자마자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바쁘게 길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차도를 꽉 메운 차들의 엔진 소리, 요란하게 울려 대는 경적까지. 주변의 모든 소음이 채 귓바퀴에 와 닿기도 전, 페이드아웃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주에 홀로 남겨진 듯한 진공감이 전신을 압박해 왔다.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눈앞이 희미해진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당신 나 알아? 알면 얼마나 알아. 우리가 알게 된 지는 또 얼마나 됐고.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나를 좋대?”
“재밌고 쉽녰지. 아니, 더럽게 재미없고, 진저리 나게 안 쉬워. 아주 참담하기까지 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얼마나 미웠을까. 얼마나 참담했을까.
매일 저를 보며 느꼈을 그의 감정이 도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차문엽의 말대로 그가 제게 보였던 말과 행동들이 모두 다 복수를 위한, 전혀 마음에도 없는 것들이었다 치더라도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끝도 없이 억누르고 참혹하게 인내해야 했을 분노와 울분. 제 인생과 제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버린 원수의 딸을 매일 마주하며 겪었을 그 지옥 같은 시간들.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대체 왜 저를 옆에 둔 건지. 왜 스스로를 갉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는지.
“왜, 본부장님은 되고 저는 안 돼요? 본부장님도 거짓말 많이 하잖아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내키는 대로 내뱉어서 헛된 기대하게 만들고…. 쓸데없이 사람 희망 품게 하는 의미 없는 친절 같은 거…. 자기가 먼저 흔들리게 해 놓고는…. 자기가 먼저 그래 놓고는…. 마음 달라고 구걸한 적도 없는데 맘대로 줬다가 또 제멋대로 거둬 가고…. 전부 다 자기 마음대로…!”
“‘왜 하필 나일까, 왜 나에게만 이런 불행이 일어난 걸까.’ 그런 생각 저도 아주 많이, 아니 실은 지금까지도 매 순간 하고 있거든요. 부당한 불행. 저는 그걸 그렇게 불러요.”
그런 남자에게 자신이 했던 철없고도 멍청한 이야기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부당한 불행.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자신이 지금껏 겪어야 했던 불행이란 단어 앞에 부당이란 수식어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 흉악한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 하나 없이 살아남아 버젓이 구질구질한 삶을 연명하고 있는 인간과 그 딸에게 그런 단어를 선택할 권리는 애당초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그딴 개소리들이 그의 귀에 얼마나 가증스럽고 끔찍하게 들렸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아무렇게나 덜덜 떨려 댔다. 누가 일부러 목이라도 조른 듯 숨이 막혀 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쿵쿵, 주먹으로 내리치며 울음 섞인 숨을 토해 냈다.
쿵, 쿵, 쿵.
몇 번이고 내리치고 또 내리쳐도 갑갑함이 해소되긴커녕 더 꽉 막혀 버린 듯 역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가슴이 극심한 통증으로 쥐어짜는 듯 구겨졌다.
“…하아…!”
하얀 입김이 눈앞에 연기처럼 어리고, 시뻘게진 눈망울을 차디찬 칼바람이 아프게 할퀴고 지났다.
“차현서 씨한테는, 여전히 사는 게 지옥이야?”
지옥 같은 삶에 손을 내밀어 줬던 유일한 사람. 그의 손을 맞잡으며 잠시나마 꿈꿨던 따스한 세계에 대한 허황하고 터무니없는 갈망 한 자락.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과 지금까지의 삶을 무참히 부정했다. 다시금, 관성처럼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저주하면서.
다름 아닌 지옥이었다.
***
끼이이익, 아스팔트와 자동차 바퀴가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인천 공항에 내리기 무섭게 운전대를 직접 쥔 정혁은 레오가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곧장 현서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중이었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선 그로서도 좀체 예상하지 못했던 기막힌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재숙의 스캔들을 도화선으로 한 JK가의 추문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오는 와중에, 차현서의 이야기도 슬며시 거론되기 시작한 거였다.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언급하진 않았으나 현재 골드스톤에서 법무 팀장으로 근무 중인 변호사라는 구체적인 프로필까지 나도는 상황인 듯했다.
라디오 속 패널들은 차현서가 JK의 망나니로 유명한 장기용 이사와 은밀한 관계였단 소문도 한때 꽤나 공공연했었다며 그녀가 골드스톤에 스카우트되어 간 것도 본부장인 라이언 서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서, 몸을 사리지 않고 로비를 시도했을 수도 있단 질 낮은 농담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구역질이 날 만큼 속이 역겨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툭, 라디오를 꺼 버린 정혁은 사나운 욕지거리를 집어삼키며 곧장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 좀…. 젠장.”
의미 없는 신호음이 몇 번 이어지더니 여지없이 연결할 수 없다는 야속한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옆 좌석 시트에 난폭하게 내던지며 액셀을 더 깊이 밟았다. 부우웅, 가속이 붙은 세단의 배기음이 주파수를 키웠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했던 생각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차현서를 찾아내 제 입으로 모든 사실을 말하겠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그 비참하고 끔찍한 과거에 대해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덧붙여 어느 것 하나도 너의 탓이 아니라 말해야 했고, 제 모든 감정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음을 알려야만 했다. 그저 여느 때처럼 또다시 부당한 불행이 우리 둘을 스친 것뿐이라고. 그러니 우리 관계가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지옥 같은 이곳을 함께 떠나자고. 계획은 치밀했고 결심은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과 결심이 허무하리만큼 부질없는 것이란 걸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피스텔에도, 사무실에도, 자주 가던 카페에도, 그 어디에서도 차현서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밤이 깊도록, 날이 새도록, 발이 닳도록, 숨이 가쁘도록 미친놈처럼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으나 죄 허탕이었다.
차현서는 이미 사라지길 작정한 듯 보였고,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꼭꼭 숨어 버린 여자를 찾기엔, 여자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여긴 술 마시고 싶은데 같이 마실 사람 없을 때. 그럴 때 오는 곳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착한 그곳에서 급기야 정혁은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고 말았다. 황량하고, 허무했다. 여태껏, 초인적인 힘으로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인내가 툭, 끊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욱신대는 손을 들어 자조하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내뱉은 깊은 한숨이 손가락 사이사이, 찬 공기를 가로지르며 후우, 길게 퍼져 나갔다.
막막했다. 평생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철벽이 눈앞에 세워진 듯 가슴이 갑갑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그녀를 찾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제 모든 노력과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는 절망감이 온몸을 아프게 짓눌렀다. 미칠 것 같은, 깊은 상실감이 심장을 후벼 팠다.
어스름 날이 밝고 있었다. 경사진 언덕 너머에서 무심히 빛을 밝히고 있던 한강 다리의 조명이 돌연 예고도 없이 툭, 꺼졌다. 미약한 빛은 금세 어둠에 잠식당했고, 곧이어 밤보다 짙은 암흑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