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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92화 (9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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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긴 다리를 움직여 거침없이 걷는 정혁의 뒤로 레오와 미셸이 뒤따르고 있었다. 정혁이 공들여 준비한 서프라이즈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때맞춰 시작한 합당한 반격은 적들로 하여금 그들의 빈약했던 전투 의지를 꺾어 놓기에 충분한 핑계가 돼 줬다. 물론 정혁이 근본적으로 바라는 건 그뿐만은 아니었지만.

지이잉, 코트 속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앤더슨이었다. 또 한 번 휴전을 요청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신호음이었다.

-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떤가. 오랜만에 같이 와인이나 한잔하지.

[어쩌죠. 일정이 좀 빡빡합니다. 수습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라.]

오만함이 습관처럼 묻은 말투는 평온했으나 고급 천으로 감긴 기다란 다리는 흡사 화가 난 사람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겉보기엔 여상해 보여도 이는 분명 그의 심사가 바닥을 쳤단 뜻이었다.

- 라이언 자네, 나랑 재밌는 딜 하나 해 볼 생각 없나?

[뭐. 지금도 재미는 충분히 있습니다만, 회장님께서 오랜만에 제안하시는 거래라니 솔깃하긴 하네요.]

- 나에겐 당연히 이득인 딜이고, 자네에게도 밑져야 본전일 거라 보네만.

[뭡니까.]

- 이사회에서 논의할 차기 안건은 아시아 부동산 펀드 조성에 5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인가의 여부야. 래리도 이미 알고 있는 바고.

[래리가 듣고 많이 기뻐했겠군요.]

- 래리 좋은 일을 시키자고 벌이는 일은 아니야. 미안하지만 난 래리를 골드스톤의 미래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이쯤 되니 굉장히 궁금하네요. 대체 회장님 머릿속에 있는 후계는 누군지. 저뿐 아니라 다들 그걸 궁금해할 텐데요.]

앤더슨은 그저 능구렁이처럼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요. 저한테 제안하시는 게 정확히 뭡니까.]

정혁은 그의 용건을 재촉했다.

- 펀드 조성을 대가로 알렉스 쪽에서 1억 달러를 투자받기로 했어. 곧 대선 캠프가 꾸려지겠지.

기다란 복도 중간에서 걸음을 타박, 멈춘 그가 픽, 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와우. 킹 메이커 놀이를 하고 싶으셨던 거였는진 또 몰랐습니다.]

웃으면서 빈정대는 말끝엔 선연한 멸시가 서려 있었다. 거름망 없는 라이언의 직설 화법이 제법 그리웠던 앤더슨은 웃음소리를 내며 느긋이 받아쳤다.

- 잘 알잖나. 선거만큼 돈놀이하기 좋은 기회가 또 없다는 거.

앤더슨은 글로벌 투자의 큰손이자 현 공화당의 유력 대선 후보 제퍼즈의 절친으로 알려진 알렉스 우드와 기어코 손을 잡을 생각인 거였다. 그렇게 되면 그쪽 인물들과 상극인 래리는 자연히 제 자리를 내어 줘야 할 처지가 될 것이다.

앤더슨의 내심이 더 큰 그림을 갈망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어째서 사업을 함께 시작한 이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그렇게 쉽게 하는 건지 기가 찼다.

하기야, 제퍼즈의 경제 가정 교사로도 불리는 알렉스 우드이니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아마도 앞으로의 경제 정책은 앤더슨의 입맛대로 굴러가고도 남았다.

- 아마 래리는 본인이 아시아 펀드 총괄 지휘를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을 테지만 난 라이언 자네에게 그 역할을 맡길까 해. 우선적으로 부회장(EVC, Executive Vice Chairman) 자리를 자네에게 제안하고, 대선이 끝나고 나면 바로 후계 선언을 할 생각인데, 어떤가?

결국 전면에 나서서 총을 맞아 줄, 악역이자 장기 말 역할을 제게 맡기겠단 심산이었다. 뻔히 눈에 보이는 계산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나름대로 더 명확한 거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절 총알받이로 쓰겠단 말씀이시군요.]

- 치명상만 안 입는다면 자네에게도 이득인 딜이지. 명성이나 평판이 자네한테 중요한 가치는 아니잖은가.

[안타깝네요. 죄송하지만 제가 요즘 쓰레기 짓은 가능한 한 자제 중입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천국 가야죠.]

- 라이언 자네만큼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 또 어딨다고.

[게다가, 자본 몰려들기 시작하면 발 빼라고 가르친 건 앤더슨 당신이었죠.]

- 그래서 아예 발을 뺄 생각인가?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 그러게.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진 못하네. 워낙 정국이 긴박하게 흘러가서.

[곧 답 드리죠.]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앤더슨의 말대로 밑져야 본전인, 말하자면 서로에게 윈윈인 게임이었다. 아니, 도리어 오래 기다리고 바랐던 기회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단 욕심, 신뢰할 만한 인간이 되길 바라는 허황한 갈망이 가슴 한편에 낯설게 들끓어서였다. 기제는 자명했다.

차현서.

[뭐래. 무슨 제안을 한 건데?]

뒤따라오던 미셸이 보폭을 좁혀 나란히 걸으며 앤더슨과의 통화 내용을 물어 왔다.

[알렉스한테 아시아 부동산 펀드 조성을 대가로 1억 달러를 투자받기로 했대. 나더러 부회장 자리를 겸임으로 그걸 맡으라고.]

[하여튼 능구렁이, 잘도 빠져나가지. 그래도 다행이네, 뉴욕에 온 보람이 있어서. 축하해. 당신 바라던 대로 급한 불은 껐어.]

그러나 정혁은 아무런 대답이 없이 걸을 뿐이었다. 미셸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뭐야, 설마. 거절할 생각인 건 아니지, 라이언?]

여전히 묵묵부답인 정혁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미셸은 점차 밀려드는 경악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했다. 평생을 바라고 달려왔던 목표가 코앞에 있건만 그걸 고민한다고? 그녀로선 도무지 정혁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진심인 거냐고 다그쳐 물으려는 순간, 집무실 앞에 도착한 정혁이 선을 긋듯 홱 돌아 그녀를 직시하며 말했다.

[어제 멍청이들 물 먹이는 데 쓴 UAE 태양광 발전소 입찰 관련 자료, 나한테도 똑같이 하나 더 보내. 돌아갈 때 선물로 좀 챙겨 가게.]

[돌아가? 어딜 돌아가? 원래 네가 있던 자리가 여긴데 어디로 돌아간단 거야? 앤더슨 제안은? 고민도 안 해 보고 거절하려는 거야?]

[질문을 좀 하나씩 할 순 없어?]

[물었잖아. 내 말에 대답을…!]

[그럼 당신부터 답해 봐. 한국에서 혹시 따로 차현서 만났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힌 미셸이 입술을 벌린 채 그를 올려다봤다. 아니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알 만하다는 듯 허, 하고 헛숨을 내뱉는 얼굴에 짜증이 설핏 내비쳤다.

결국 미셸은 순순한 자백을 택했다.

[맞아. 당신 설득 좀 해 달라고 부탁했어.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니, 내가.]

정혁은 이마 위로 매끈하게 쓸어 넘긴 머리로 손을 올리며 미간을 푹 우그러뜨렸다.

[내가 미셸 당신이랑 오래 일한 이유 중 하나가 뭔지 알아?]

[라이언.]

[나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거. 그게 마음에 들었어.]

[…….]

[근데 너무 변하셨네.]

싸늘히 일갈한 그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봤다, 우리.]

미셸의 코앞에서 보란 듯 쿵, 문이 닫혔다. 기막혀하는 그녀를 위로하듯 바라본 레오가 씁쓸한 표정을 짓곤 정혁을 뒤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여지없이 테이블에 기대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레오는 잠자코 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창밖을 초조하게 응시하고 있던 그의 잇새에서 낮은 욕지거리가 짓씹혀 나왔다. 미간을 움푹 일그러뜨린 그의 표정만으로도 상황은 충분히 읽혔다. 차현서는 여전히 그의 전화를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어떤 콜백도 없는 게 분명했고.

[심란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말입니다.]

[심란하신 거 알면서도 건드리는 심보는 대체 뭘까.]

[충성심, 애사심, 의리, 우정. 뭐 그런 것들 중 하나라고 해 두죠.]

[마지막은 빼. 닭살 돋아.]

[네. 시정하죠.]

레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떱게 수긍했다.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너는 이 상황이 이해가 돼? 대뜸 뉴욕으로 등 떠밀어 놓고, 안 그래도 불안해 미치겠는 사람 속을 이렇게 뒤집어 놓는 이 여자 행동이 지금 정상이야, 아니면 이렇게까지 과민하게 구는 내가 그냥 미친놈인 거야?]

[큰일이네요. 더 과민해지시기 전에 제임스를 불러다 놓고 말씀을 드려야 하나 싶어서….]

레오가 말끝을 흐리며 등 뒤에 감추고 있던 태블릿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의 것을 받아 든 정혁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들렸다. 태블릿 액정에 한국의 뉴스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까닭이었다.

JK 그룹 장창수 회장의 부인이자 JK 그룹 사내 이사 및 JK 갤러리 관장을 겸임하고 있는 양재숙 씨가 인기 배우 정시윤 씨와 불륜 관계였다는 폭로가 화제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처음 폭로한 것은 정 씨의 전 매니저 이 모 씨로, 이 씨는 자신의 SNS에 두 사람이 스폰서 관계일 때 작성한 계약서와 자동차를 비롯해 그간 주고받은 고가의 선물들을 찍은 사진을 증거로 함께 게시하기도 했습니다. 양측은 이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으나, JK의 후계 전쟁이 치열한 시점에 양재숙 이사와 장남인 장기준 사장, 그리고 차남 장기용 전무 이사에겐 치명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태성 리테일 통합 건을 가로챌 수 있느냐 없느냐는 더 이상 양재숙의 JK 후계 선점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장 회장은 가차 없고 잔인한 성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간 양재숙의 공로와 기껏 쌓은 업적은 모두 물거품이 될 테고, 그녀와 그녀의 아들 둘은 그대로 JK에서 아웃이 될 게 뻔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진다고? 도대체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집안의 뒷일 처리에 능숙하고 익숙한 여자가 자신의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이런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게 좀체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거 조인호 짓이야?]

눈빛을 번득이며 묻자 레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아무래도요.]

그도 그럴 것이 조인호는 이미 양재숙에게 오래전 팽 당한 듯싶었다. 결과적으로 태성 리테일 통합 건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맥없이 골드스톤에 모든 걸 내줬으니 양재숙으로선 쓸모없는 카드를 버린, 당연한 처사였겠으나 조인호로선 아마 궁지에 내몰린 기분이었을 거다.

[이도 저도 안 되니 자폭을 택한 건가?]

불안했다. 애초에 조인호가 앙심을 품기 시작한 대상이 양재숙이 아니었으니 결국 화살은 차현서에게로 돌아갈 게 뻔해서.

정혁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상황에 연락조차 받지 않는 여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차현서 씨, 오늘은 아예 결근을 했답니다.]

허, 하고 기막힌 숨을 터뜨리는 정혁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니면 또 뭔가를 확인하고 싶단 신호인 건가. 그러나 학습 능력이 뛰어난 여자가 같은 실수를 반복해 저를 실망시킬 리도 없었다. 그럼 뭐란 말인가. 제게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인가.

가슴이 턱 막힌 듯 답답했다. 하릴없이 비서인 솔이에게라도 전화를 걸어 보려던 참이었다. 직접 추궁을 해서라도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같잖은 집착에 불이 붙어서였다.

별안간 레오의 핸드폰 진동이 길게 울렸다. 어쩐지 영 불길한 기분에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춘 채, 사라지는 레오의 뒤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짧은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레오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멈칫대는 꼴이 아무래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행색이었다.

[뭐야. 말해, 얼른.]

참다못한 정혁이 짜증스레 핸드폰을 탁, 내려놓곤 그를 재촉했다. 그러자 제 심기를 살피듯 눈치를 본 레오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듯 입을 열었다.

[차문엽을… 놓쳤답니다.]

일순 남자의 미간이 흠씬 구겨졌다.

[언제.]

[놓친 건 이틀 전이라는데, 나름대로 찾는다고 애를 쓰다 결국 못 찾으니 이제야 보고를 했나 봅니다.]

씨발, 잇새에서 낮은 욕지거리가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리듯 감싸 쥐었다. 초조함에 눈앞이 시커메졌다.

뉴욕으로 오기 전, 짐을 챙기러 잠시 집에 돌아온 차문엽을 붙잡아 발을 묶어 뒀었다. 행여나 차현서 앞에 나타나 허튼소리를 할까 싶어서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알아서 겁에 질려 있던 차문엽은 원래 자신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애원했고, 그런 본인의 의견을 수렴해 중국 상해로 치워 보냈다. 물론 상해에 도착했단 보고를 들은 이후에도 혹시나 싶어 놈의 뒤에 계속 사람을 붙여 뒀었는데, 방심한 사이 그걸 놓친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미행을 따돌리고 도망친 차문엽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어쩌면 끔찍한 일이 벌써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려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목전에 닥쳐 있었다.

[여기 불 꺼놨더니 서울에 불이 났네. 차 대기 시켜.]

정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이를 바득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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