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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ies and gentlemen, We will be arriving on New York, John F. Kennedy International Airport, in about fourty minutes. The time in New York….”
비행기 좌석에 푹, 몸을 파묻고 앉아 습관적으로 핸드폰 액정을 툭툭, 두드리는 정혁의 표정에 짜증이 그득했다.
덮개가 열린 창문 밖으론, 고도가 낮아진 하늘의 오묘한 색깔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 40분 뒤면 뉴욕 공항에 내려 곧장 골드스톤 본사가 위치한 파크 애비뉴 254번가로 향해야 했다. 다행히 맨해튼의 고질적인 교통 체증을 고려하더라도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이사회가 소집되는 시간까진 그럭저럭 맞추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불과 서른 시간 전, 다소 갑작스레 결정된 뉴욕행이었다.
“물론 제 걱정까지 안 보태도 본부장님 일은 본부장님이 알아서 잘 해결하실 거라는 거 잘 알고요, 또 제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뭔가 있진 않나 싶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인 거면 가셔야 하잖아요.”
차현서는 분명 누군가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게 레오인지, 미셸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구인진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제 등을 떠밀 생각인 듯 보였다.
미셸에게도 미처 말하진 못했으나 뉴욕으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을 벌어 줄 몇 개의 안전장치들이 있기는 했다.
예를 들자면 아시아 본부의 실질적 돈줄인 싱가포르 투자 은행이 요즘 래리가 공을 들이고 있는 중동의 부동산 회사와의 M&A를 위해 물밑 협상을 하고 있단 정보 같은 것들 말이었다.
두 기업 모두, 협상의 키를 손에 쥐고 있는 게 저임을 뻔히 알기에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하더라도 제 손을 들어 주지 않을 리 없었고, 그들을 방패막 삼는다면 모두가 우려하는 대로 빈손으로 쫓겨날 걱정만큼은 안 해도 된다는 계산을 했다. 물론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손 놓고만 있지는 않을 나름의 계획도 있었고.
“솔직히 말하면 혹시나 제가 본부장님 선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신경 쓰여요.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일 해결하고 오세요. 그동안도 이런 출장은 자주 가셨었잖아요. 여기 일은 저랑 파트너들이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니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네?”
결국, 퍽 진지한 얼굴로 계속해 저를 설득하려는 얼굴에 그러겠노라, 허망하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들리는 제 상황에 괜스레 신경이 쓰이고, 미안하고, 거슬린다는데. 저 때문에 불편하다는 여자의 말을 끝까지 외면할 수가 없어진 거였다.
이젠 아주 차현서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개가 된 기분이었지만 미쳤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이미 이렇게 돼 버린 것을.
차현서의 감정적 꼭두각시가 된 이유를 구태여 합리화해 보자면, 어찌 됐든 최후의 상황까지 일을 어렵게 몰고 가지 않는 게 가장 경제적 방법인 건 사실이었다. 당사자도 없이 이뤄질 징계 건에 대한 당장의 방어는 꼭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이왕 이렇게 된 거 직접 제 손으로 급한 불을 꺼 볼 요량이었다. 그래야 돌아가 차선엽의 일도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을 터였고.
그러나 지금, 정혁은 그런 자신의 결심을 후회하고 있었다. 서울을 떠난 지 불과 열네 시간 만의 일이었다.
공항으로 떠나는 차에 오르는 저를 보며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던 게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차현서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륙 직전에 보낸 메시지에도, 하늘 위에서 가까스로 잡은 와이파이 신호로 보내고 또 보낸 메시지에도, 그녀는 어떤 답도 하질 않았다.
그저 업무가 바빠서일 거라 애써 느긋한 생각을 해 보려 했으나 이상하리만큼 심기가 어지럽고 불안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마지막, 저를 바라보던 차현서의 복잡한 눈빛이 그 모든 불안의 이유였다.
[내리자마자 한바탕 전쟁 치를 건데 비행기에서라도 눈 좀 붙이지, 어떻게 열네 시간을 꼬박 그렇게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어?]
복도 건너의 좌석에 앉아 있던 미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나 제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정혁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커다란 손으로 눈을 감쌀 뿐이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 자연히 핏줄이 불거지고 있었다.
여러 개의 반지와 번쩍이는 시계, 볼드한 액세서리로 가득한 남자의 손에 퍽 어울리지 않는 짙은 상처가 미셸의 시선 끝에 걸렸다. 그간 어디에서, 무슨 이유로 다친 거냐고 꾸준히 캐물어도 답 한번 해 주지 않던 그였다.
불쑥 호기심이 일었다. 아니, 유치한 상념이었다. 차현서, 그 여자에겐 상처의 이유를 말해 줬을까. 수수께끼 같은 제 과거, 일말의 비밀까지도 모두 알려 준 걸까.
사람을 앉혀 놓고도 뻔뻔히 계산기를 두드려 보이고, 본인 앞에 놓인 선택지에 대해선 비용 편익 분석만 유일한 고려 대상인 것처럼 굴던 라이언 서를 이토록 비합리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인 차현서. 미지의 그녀가 궁금했다. 호기심의 발로는 묘한 질투심이었다.
주인 없는 집무실에서 무작정 그를 기다렸던 날이었다. 라이언의 지시로 자료를 가지러 들어왔던 그의 비서는 실수로 책상 서랍을 잠그는 걸 잊고 나갔고, 미셸은 무방비하게 열린 서랍을 바라보며 오래 고뇌했다.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낯설게 빗발치는 충동은 확연 유치한 감정 탓이었다.
저도 모르게 서랍 안을 뒤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속에서 꽃만큼이나 낯선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화려하지만 세련된 디자인의 다이아 목걸이였다. 뛰어난 눈썰미를 지닌 덕에 미셸은 보자마자 그게 차현서의 목에 걸려 있던 것과 같은 목걸이란 걸 알아차렸다.
심술이 일었다. 여자에게 미쳐 온통 저답지 않은 짓만 하며 제 속을 뒤집는 남자가 괘씸하고 못마땅했다. 그래서였다. 불손한 충동에, 망설임도 없이 제 목에 걸고 서랍을 닫았다. 얼마나 유치하고 멍청한 짓인지 잘 알면서도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꾸 사람을 바닥까지 내보이게 만드는 이상한 능력의 남자 때문에.
한편으론 자신이 의도적으로 그 여자를 자극한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라이언을 설득해 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일견 자존심이 상했으나 제겐 그만큼이나 간절한 일이라 거리낄 여유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그에게서 곧바로 연락이 왔다. 이사회 소집 시간에 맞춰 뉴욕으로 가겠다고. 그녀가 차현서를 만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다행이라 안도한 동시에 부아가 치밀었다. 몇 년을 함께 일하고 신뢰를 쌓은 파트너보다 만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그 여자의 한마디 말을 더 믿는단 건가. 왜. 무슨 이유로. 그 별 볼 일 없는 여자 하나가 대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초라한 감정으로 내모는 건지.
낯선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미셸은 지난 열네 시간을 낯설고 불쾌한 감정으로 견뎌야 했다.
[앤젤라에게 연락할까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적을 뚫고 다가온 레오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어 정혁에게 물었다. 도착 예정 시간을 미리 통보해야 하지 않겠냔 질문이었다.
[뭐 하러. 서프라이즈 좋아하는 분들 많잖아, 거기.]
정혁은 낮게 뇌까리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그의 말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레오가 눈치 빠르게 곧장 뒷걸음질을 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잠잠하기만 한 핸드폰 액정에 있었다. 눈살을 있는 대로 구긴 그가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걸 내려놓았다. 간당간당 이어지던 인내심에 시뻘건 불이 켜지고 있었다. 오래 잊고 지냈던 담배가 갈급했다.
비행기 앞머리가 아래로 깊이 기울어져 하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 새벽, 잔뜩 낀 구름 사이로 맨해튼의 마천루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진저리가 절로 쳐질 만큼 지긋지긋한 뉴욕의 아침이었다.
***
“아니! 지들이 먼저 급하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자료 넘기니 치우란 심보는 대체 뭐래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이제 와서 이렇게 말을 바꾸는 게 어딨어요?”
현서를 뒤따라 사무실로 들어서며 화가 나 씩씩거리는 솔이의 목소리가 제법 컸다. 결국, 이제껏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현서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태성 건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서융건설의 M&A 건에 다소 잡음이 생긴 까닭이었다. 규모도 크지 않았고, 워낙에 정해진 방식대로 진행되고 있기도 해서 별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돌연 경영진 측에서 노조의 반발을 이유로 협상 조건에 하나하나 트집을 잡고 나선 거였다. 마치 서정혁이 자리를 비울 걸 기다리고 있었단 듯 타이밍이 절묘했다.
“전략 팀이랑 법무 팀 파트너들 다 소집 좀 해 줘. 최대한 빨리.”
“조건 수정하시게요?”
“수정안 내밀어 봤자 이미 결론 내놓고 트집 잡는 걸 무슨 수로 설득하겠어. 어차피 진짜 목적은 시간 끌기일 게 뻔한데.”
“후, 진짜.”
“난 여기서 그만 스톱 하는 게 제일 합리적일 것 같단 생각이지만, 일단은 전략 팀이랑도 얘기를 해 봐야지.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보고는요? 본부장님께 먼저 보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보고는 들어갔을 거야. 아까 나오면서 전략 팀장님께 부탁드렸거든.”
“왜 직접 안 하시고요?”
상식대로라면 그들이 가장 크게 문제를 제기한 건 양해 각서의 불법적 문제 요소와 그에 따른 윤리적, 도의적 분쟁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담당인 법무 팀장이 직접 보고를 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로 즉답을 피했다.
정혁이 뉴욕으로 떠난 지 이틀째. 그녀는 일 잘 해결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의도적으로 그의 연락을 피하는 중이었다.
핑계는 제법 좋았다. 그가 떠난 후 정말로 정신없이 일이 터졌으니까. 바쁜 업무 때문이란 핑계는 뒤집힌 속내와 들끓는 감정을 숨기기에 더없이 좋은 방패막이 됐다. 이런 제 행동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당장은 그걸 최대한 이용하고 싶었다. 비겁한 회피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얼른 시간, 장소 정해서 말씀드릴게요.”
현서의 낯빛에 심상찮은 기색을 읽은 솔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하….”
홀로 남은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라이언을 잘 알아요.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어쩔 꿍꿍이인지 다 읽을 수 있을 만큼이요. 뭐, 워낙에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떠올릴수록 저만 괴로워질 뿐이란 걸 알면서도, 하릴없이 상기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눈빛만 봐도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이.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깊은 관계. 자신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분명히 거짓을 말했단 결론이었다.
더불어 낯선 여자의 목에 걸려 있던 낯익은 목걸이는 또 어땠나. 이 못난 감정의 충분한 기폭제가 되고도 남았다.
“프랑스 디자이너 제품이고, 지난 시즌 한정판이라 한국에 딱 두 점 들어온 거라던데요? 정확한 가격도 알아볼까요? 뭐, 알아보나 마나 엄청 비쌀 텐데….”
가슴이 철렁했다. 장난스레 빈정대며 제가 알아 온 정보를 풀어 놓던 솔이 앞에선 내내 어색한 미소만 지어야 했지만 실상 듣는 내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한국에 딱 두 점 있던 목걸이가 하필이면 자신과 미셸 장, 서정혁 주변의 두 여자의 목에 걸려 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저 단순한 유연이라 치부하고 넘길 수 있을 확률이 실질적으로 몇 퍼센트나 될까.
초라한 상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한 생각을 이어 가는 스스로가 싫었다. 행여나 서정혁의 진심이 제게 있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을 땐 급기야 가슴이 내려앉았다. 초조와 불안이란 원초적 감정이 사람을 이렇게나 바닥까지 내몰 수 있음이 두려웠다.
서랍 속 두통약을 꺼내 꿀꺽 삼켰다. 컵에 모자란 물을 더 받으려고 무심코 돌아본 유리창에 제 못난 얼굴이 비쳤다. 저도 모르게 가만히 숨을 멈췄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반짝, 빛을 내는 보석이 지나치게 무겁고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역시나 제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물건 같아 보인 탓이었다.
바보 같았다. 비참할 만큼.
“앞으론 사실 확인을 하고 싶으면 확인만 해. 어설프게 까불지 말고.”
계속 이렇게 회피만 할 순 없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었다. 혼자서 더 깊은 착각에 빠지기 전에, 이 쓸데없고 비참한 상상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분명히 그에게 직접 물어 확인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제게도 그럴 권리가 분명히 있었다.
현서는 곧장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통화 가능할 때 연락 줘요.」
짧은 메시지를 작성하고 전송을 누르는 순간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당연히 정혁이겠거니 싶어 거침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엄지손이 멈칫, 허공에 멈췄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누굴까. 누가 제게 이런 전화를 거는 걸까. 다른 때 같았으면 고민도 없이 거부 버튼을 눌러 버렸을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이상한 예감이 그녀를 옭아맸다.
결국, 무언가에 홀린 듯 통화 버튼을 꾹 눌러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 잘 지냈니.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등줄기를 타고 쭈뼛, 소름이 일었다.
- 나다, 네 작은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