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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90화 (90/115)

♬ 90

인적이 드문 휴게 공간. 커다란 통유리 창 너머로 해 질 녘, 바쁜 도시의 풍경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현서는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한편에 내려놓으며 미셸과 마주 앉았다. 얼핏, 그녀의 벌어진 셔츠 사이로 익숙한 디자인의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도 제 목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분명했다. 결코 같은 것이어선 안 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착각이겠지.

현서는 찰나에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상상과 가정을 애를 써 회피하며 시선을 거뒀다.

[현서 씨 얘긴 라이언한테 많이 들었어요. 그 전에 소문으로도 먼저 듣긴 했지만.]

[네. 저도 본부장님께 이사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라이언한테요?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 입 더러운 인간이?]

[능력 있고 합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고요.]

[와우. 영광이네. 내 뒷말이나 안 하고 다니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셸은 처음 봤을 때 받았던 인상처럼 시원하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거침없고 직설적으로 행동하는 서정혁과 비슷한 결의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두 사람이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파트너로 일할 수 있었던 건가.

다짐과 달리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부정적 감정에 가슴이 무지근하게 내려앉았다.

[맞아요. 현서 씨도 알다시피 라이언이랑 난 홍콩에 있을 때 만나서 지금껏 쭉 같이 일했어요. 뭐, 성질 더러운 것만 빼면 파트너로서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이니까.]

남자의 이야기를 하는 게 꽤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이 모르는 서정혁의 이야기, 그의 과거, 그의 지난 시절에 대해 빠짐없이 잘 알고 있는 여자가 부럽고 또 질투 났다. 저도 모를 못난 자격지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아…. 홍콩에 있을 때 참 좋았죠. 매일매일 일하는 재미, 돈 버는 재미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은데.]

미셸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그때 라이언을 만난 게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다 싶어요. 그 인간 덕분에 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행운. 많이도 낯선 단어였다. 불행의 연속이던 삶에서, 부당한 불행을 운명처럼 수긍하고 체념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에서 행운이란 단어는 퍽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더욱 그랬다.

[현서 씨는 어때요? 라이언 만나서 같이 일하고 있는 지금이, 현서 씨에겐 행운인가요 불행인가요?]

직접적으로 묻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빤히 시선을 맞춰 왔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짧았던 고요를 깼다.

[아, 너무 이상한 질문이었나? 하긴, 라이언이 들으면 아주 기겁을 할, 소름 돋게 감상적인 말이긴 하네요.]

미셸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과했다 생각했는지 웃으며 눈썹을 들썩였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내 침묵을 지키던 현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를 만나면 묻고 싶었던 질문과 현실적인 문제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그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야 할 시점이었다. 비록 껄끄럽고 불편한 이야기가 될지라도.

미셸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 본사 상황이 본부장님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거 들었습니다. 혹시 이사님께서 한국에 오신 게 그 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네. 정확하게 알고 있네요. 혹시 이것도 라이언이 얘기해 주던가요?]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소문도 있고, 본부장님께 직접 들은 부분도 있습니다만,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사님께 직접 여쭤보고 싶었구요. 지금 상황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아, 내가 하려던 말을 먼저 물어 주니 이거 엄청 고마워지네요?]

미셸이 쓰게 웃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럼 마음 놓고 편안하게 거두절미하고 말하죠. 지금 라이언 상황을 아주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주 엿같은 상황이란 말이 딱이에요.]

적나라한 대답에 목 끝이 까끌해졌다.

[알다시피 앤더슨은 처음부터 라이언한테 후계 자리를 넘길 생각이 없었어요. 알아주는 인종 차별주의자에 지독한 백인 우월주의자인 그가 출신도 모르는 동양인한테 자기가 평생 일군 회사를 통째로 넘겨줄 리 없죠. 그걸 가장 잘 아는 게 라이언 본인이고요. 그래서 라이언은 항상 방어벽을 치고 언제, 어디서든 뒤집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왔어요. 그 남자 인생 자체가 치열한 전투 같은 거라고 비유하면 될 만큼요.]

저만큼이나 발버둥 치는 삶을 살았던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후려쳐지지 않기 위해 이 악물고, 악을 쓰며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임을 잘 알았다.

[덕분에 앤더슨도 라이언한테 함부로 발톱을 드러내는 짓 같은 건 하지도 않았죠. 아마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거예요.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라이언에게 다 내줘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누가 봐도 이렇게까지 골드스톤이 성장한 건 다 라이언 성과고,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요. 앤더슨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라이언을 내쫓으려면 기회를 엿보고 뒤통수를 쳐야만 하는데, 어디 쉽게 틈을 내보이는 인간인가요, 라이언이.]

[…….]

[근데 그런 라이언이 어느 날 제 발로 한국엘 가겠다고 자처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슬쩍슬쩍 기어오르던 정적들, 예를 들면 벤야민 발터 같은 허접들한테까지 관대하게 굴기 시작한 거죠. 심지어 때맞춰 래리까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앤더슨한텐 아마 이게 기회다 싶었을 거예요. 라이언을 영원히 내칠 절호의 찬스.]

미셸이 무얼 말하려는지 확실히 짐작이 갔다. 무슨 말을 하든, 들을 각오가 돼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심각해지는 이야기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정도 개수작쯤은 수백, 수천 번도 더 겪어 봤어. 지겹게 버티고 살아남는 거, 내 목숨 줄 하나 끈질기게 붙잡고 연명하는 덴 도가 텄단 뜻이야. 당신 걱정까지 안 보태도 쉽게 안 죽어요, 내가.”

저에게 말하던 그의 말관 너무도 다른 상황에 혼란이 깊어졌다. 제겐 왜 그렇게 자신을 하며 다른 이야길 했던 걸까. 왜 다 말해 주지 않았을까. 정말로 자신은 몰라도 되는 얘기라서? 걱정하지 말라는 배려인 건지, 알 필요 없단 무시인 건지. 그의 숨은 의도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한텐 괜찮다고 그러셨어요. 별거 아니라고. 늘 있어 왔던 일들 중 하나이고, 얼마든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다고….]

[현서 씨한텐 그런 거짓말을 했단 말이죠, 그 미친 인간이?]

미셸은 기가 막힌단 듯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계속 손 놓고 보고만 있다간 정말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아니, 최악의 경우엔 경제 사범으로 FBI에 체포나 안 되면 다행일지도 모르죠.]

순식간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사랑하는 남자의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단 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와 웃고 떠들고, 희희낙락 해맑게 굴었던 일들이 떠올라 비참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지금 상황 타개하려면 당신 협조가 필요해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당신이 라이언 좀 설득해요. 지금 당장 뉴욕으로 돌아갈 수 있게.]

[그것뿐인가요?]

[네. 단지 그것뿐이에요. 뉴욕으로 직접 가서, 이 상황 직접 해결하는 거. 그 간단한 방법을 놔두고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에요. 자꾸 여기서 할 일이 있다는 둥, 그걸 끝내고 가야만 한다는 둥 이상한 소리나 해 대면서.]

미셸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 중요하고도 위급한 상황에 쉬운 방법을 두고 굳이 회피하려고만 하는지. 설마 저 때문에 한국을 떠날 수 없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인 건가.

[이해가, 잘 안 가요. 왜….]

[나도 마찬가지예요. 라이언이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철없는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게 도무지 안 믿긴달까? 여자가 아니라 아마 돈에 발기하는 쪽이 훨씬 쉬운 인간인데.]

혼잣말처럼 내뱉었으나 미셸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난 라이언을 잘 알아요.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어쩔 꿍꿍이인지 다 읽을 수 있을 만큼이요. 뭐, 워낙에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가슴이 깊이 내려앉았다. 자신은 아직도 잘 모르기만 하는 남자에 대해 자신 있게 잘 안다고 말하는 이 여자는 뭘까. 그와 얼마나 깊은 사이였던 걸까. 못난 마음들이 비죽이며 새어 나왔다.

“직장 동료랑 사적으로 얽히는 취미 없어.”

“미셸이랑은 직장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단 한 번도 남자 여자로 엮여 본 적도 없는 사이고.”

그 변명을 분명히 들었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음에도, 돌연 그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제게 이 위급하고 심각한 상황을 숨기고 그저 괜찮다고만, 아무 일 아니라고만 말했던 그였으므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했으니까.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도무지 뭐에 미쳐서 이러는 건지.]

그녀의 말이 아무래도 너 때문은 아니란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현서 씨 말이 제일 잘 먹힐 거니까. 당신이 말하면 그래도 저 미친놈이 듣는 척이라도 할 것 같으니까, 좀 도와줘요. 응?]

모래를 한 움큼 집어삼키기라도 듯 목구멍이 퍼석거렸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여전히 서정혁이란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 같단 자조가 치밀었다. 제게 했던 달콤한 말들, 퍼붓던 키스, 뜨거웠던 손길까지. 그는 그 모든 게 진심이라 확언했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지금껏 믿고 있던 게 모두 다 진실인 걸까. 허구의 착각 속에서 저 혼자 두 눈이 가려진 채 허허실실, 바보처럼 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피어오른 의구심에, 단속하지 못한 시선이 절로 미셸의 목덜미로 내려갔다. 벌어진 셔츠 깃에 반쯤 가려져 반짝이는 굵은 다이아가 눈동자에 알알하게 박혀 들었다.

“우리 수수한 차현서 변호사님 목에 걸리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예쁘네. 당신 얼굴엔 화려한 게 더 잘 어울린다니까.”

부지불식간, 가슴에 불을 지핀 듯 불신이 일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머릿속을 헤집고 뒤흔들었다. 꼭 누군가 쥐고 흔드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메말라 갈라진 목소리가 삐끗, 새어 나갔다.

더 이상 태연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 먼저 상황을 회피하며 일어났다.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그녀에게 묵례를 하곤 내려 뒀던 서류 더미를 끌어안은 채 돌아 걸었다.

커다란 통유리 창 너머의 하늘이 잿빛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예보에 없던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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