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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현서는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떼어 내며 액정 속 번호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틀림없이 제가 알던 아버지 차선엽의 번호가 맞았다. 그런데 왜 연락이 닿질 않는 건가. 벌써 보름 가까이, 그녀는 연락이 두절된 아버지의 안부를 좀체 확인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그저 사는 게 바빠 제 연락을 받지 못하는 거라 여겼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자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했을 것임에도 계속 답이 없었다. 급기야 그제 밤부턴 아예 전화기가 꺼져 있단 안내 멘트가 나왔고, 그때부터 마음이 급격히 초조해졌다.
죽은 사람으로 살던 때에도 이렇게 일언반구 말없이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적은 없었던 듯싶었다. 1년, 아니 몇 년에 한 번씩 얼굴을 보던 때에도 일방적이고 일상적인 안부는 꼬박꼬박 전해 왔던 아버지였으니까. 말미엔 늘 다음 연락의 시기를 일러두는 것을 빼먹지 않았던 그다.
한동안 과하다 싶을 만큼 잦은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물어 오던 아버지가 왜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것인지. 현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한 걱정부터 앞섰다.
어릴 적 악몽이 설핏 되살아나는 듯도 했다. 열네 살,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아버지 때문에 고아가 됐던 그때처럼. 처음으로 세상에 홀로 버려졌던 그 시절, 끔찍했던 순간들이 연쇄적으로 상기되자 돌연 트라우마 같은 불안이 들끓었다.
지잉.
진동이 울리기 무섭게 반사적으로 손안에 쥔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발신자는 기다렸던 아버지가 아닌 준한이었다.
- 뭐 기다리는 전화 있었어?
빠른 수신에, 준한이 반쯤 농담 섞인 질문을 던져 왔다. 어쩐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어져 멍하니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 설마.
“…….”
- 아버님이랑 아직도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눈치 빠른 준한이 선수를 쳤다. 며칠 전 저녁 식사를 하며 아버지랑 꽤 오래 연락이 안 된단 말을 흘리듯 했었는데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응. 연락이 안 돼, 계속. 이젠 아예 전화기도 꺼져 있구.”
- 뭐?
“그래서 어젠 퇴근하고 집으로 찾아갔었는데 인기척도 없었어.”
- 계실 만한 다른 곳은, 찾아봤어?
“몰라. 평소에 어디에서 뭘 하면서 시간 보내셨는지도, 나는 잘 모르겠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서부터 아버질 찾아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가 어디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한 적도 없으므로.
- 그럼 경찰에 신고라도 해 보는 건 어때.
“아니. 아니야.”
현서는 이마로 흐르는 머리칼을 길게 쓸어 올렸다. 불안감을 애써 진정시키며 아닐 거라, 괜찮을 거라 마음을 다독였다.
“그냥 좀 더 기다려 보려구. 어디 잠깐 쉬러 가신 걸 수도 있고. 아무 일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이러는 것 같기도 하니까.”
이 불안을 차마 정혁에게는 털어놓지 못했다. 일에 치여 워낙 바쁘기도 했고,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머리 아플 그에게 별것 아닌 걱정까지 보태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 문제는 꼭 제 치부 같아 구태여 보이고 싶지 않은 초라한 마음도 없진 않은 까닭이었다. 사실상 사지육신 멀쩡한 성인 남자와 며칠 연락이 안 닿는다고 해서 큰일이 난 건 아니었으므로.
“괜찮아. 연락 오겠지. 별일 없을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하듯 작게 읊조렸다.
- 나라도 같이 찾아봐 줄까?
“아냐. 그럴 거 없어. 바쁜데 신경 쓰지 마.”
- 그래. 괜찮을 거야. 너도 너무 걱정하진 말고, 좀 더 기다려 보자. 무슨 사정이 있으시겠지.
사정. 돌이켜 보면, 아버진 제게 늘 사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 없이 어린 딸을 키울 때도, 그 딸을 위해 죽기 살기로 바둥댔을 때도, 그리고 심지어 딸을 버렸을 때도 그에겐 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의 그 불우한 사정들이 지금껏 모든 행동의 당위성을 부여해 왔다. 한마디로 좋은 구실, 그럴싸한 핑계가 되어 왔단 소리였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사정이 있는 아버지를 이해해야 했고, 용서해야 했고, 감내해야 했던 건 오롯이 저뿐이라서. 핑계 대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제게 주어진 부당한 불행을 그저 받아들이고 싶었던 저와 너무 달라서.
“근데, 왜 전화했어?”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늦은 오후. 현서는 문득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 너 잠깐 커피 한 잔 안 마시려나 싶어서.
“지금?”
한창 펌에 있어야 할 시간에 이곳에 왔단 말에 현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근처에서 증인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야.
“아….”
불현듯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 왔던 준한의 호의가 어쩐 일인지 이젠 좀 불편하고 난감했다.
“근데, 선배….”
스스로 아무리 결백하다 해도 서정혁이 마뜩잖아하는 관계라면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준한이 좋은 사람임을, 제게 소중한 사람임을 알지만 그의 마음이 저와 같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그저 결코 아닐 거란 막연한 추측뿐, 실상 그의 마음을 의심하고,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좀 바빠서….”
- 그래. 너 그럴 줄 알고 그냥 내가 올라왔다.
똑똑.
별안간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홱 뒤를 돌아보자 바깥이 보이는 유리창 너머로 준한이 테이크아웃해 온 커피 잔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달카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그가 멍하니 선 제 앞에 가져온 커피 잔을 쓱 내밀었다.
어쩐지 거짓말을 하다 들킨 것 같은 민망함에 핸드폰을 꼭 쥔 채 멍하니, 웃는 그 얼굴만 바라보고 섰다. 그러자 불쑥 손을 뻗어 온 준한이 그녀의 손안에 직접 잔을 쥐여 준다.
“당 떨어질 시간이니까, 바닐라라테. 시럽 넣은 거로.”
“…뭐야, 갑자기….”
“인성이 아주 파탄 난 증인을 만났더니 카페인이 당겨서. 그냥 가려다가 너도 한 잔 주고 가려고 들렀지.”
준한의 여상한 웃음에 결국 그녀도 픽,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좋은 사람을 두고 저 혼자 무슨 상상을 하고 소설을 쓴 건가 싶어 한편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버님 일은 너무 걱정 마. 나도 좀 찾아볼 테니까, 그냥 넌 네 할 일 하고 있어. 지금처럼.”
김준한답게 퍽 자상하고 다정한 위로였다.
“고마워, 선배.”
그럼에도 그에게 할 말이라곤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늘 그랬듯이.
“별말씀을.”
웃는 얼굴이지만 어쩐지 안색에 근심이 섞인 것 같았다. 해서 무슨 일이 있느냐 물으려는데 준한이 그대로 돌아서며 말했다.
“나 간다, 일해.”
“그냥 가?”
“바쁘다며. 나도 바쁘거든.”
준한은 들어왔던 문을 향해 걸어 나가며 등 뒤로 쓰윽, 손을 펴 보이곤 그대로 사라졌다.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잇새에서 후, 하는 긴 한숨이 샜다.
***
또각또각. 법원으로 외근을 나갔다 들어온 현서는 바쁜 발걸음으로 회사 로비를 걷고 있었다. 이미 커다란 서류 박스를 들고 먼저 올려 보낸 솔이를 뒤따라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의 품에도 한가득, 거대한 서류 뭉치가 안겨 있었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열렸고, 안으로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열린 양 문틈으로 마주친 얼굴에 놀란 그녀의 발걸음이 타박, 멈췄다. 그 바람에 한 품 가득 들고 있던 서류의 배열이 망가지며 순식간에 서류 뭉치들이 후드득, 바닥으로 쏟아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으나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어깨에 멘 백을 추슬러 올리며 무릎을 쪼그려 앉았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종이들을 손으로 그러모아 줍는데, 하얀 서류 다발 위로 낯설지 않은 여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놀라는 거 보니 내가 누군지 이미 잘 아는 것 같군요.]
제 앞에 함께 쪼그려 앉은 여자는 여기저기 떨어진 서류를 집어 올리며 말했다. 미셸이었다.
바닥에 흩어졌던 서류를 서둘러 정리한 현서가 먼저 몸을 일으켜 세우자, 미셸이 자신이 주운 일부를 그녀에게 내밀며 마주 와 섰다.
[미셸 장이에요. 그쪽이 차현서 씨인 것 역시 나도 이미 알고요.]
검고 긴 생머리. 다소 말라 움푹 팬 두 뺨과 귀족적으로 보이는 단단한 턱선. 늘씬한 몸매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여자. 누가 보아도 퍽 끌리는 매력을 지닌 여자였다. 거기에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생기 흐르는 에너지까지.
주눅까진 아니더라도, 어쩐지 마음이 작아지는 기분이라 괜스레 목 끝이 까끌댔다.
[라이언 만나러 왔다가 허탕 치고 돌아가는 길이에요.]
묻지도 않았건만, 그녀가 먼저 방문한 용건을 말해 왔다.
[본부장님은 오늘 계속 태성 본사에 계실 겁니다. 갑자기 그쪽에서 긴급회의를 잡은 거로 알아서요.]
내심을 숨기려 일부러 더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게요, 하필이면.]
심상한 듯 읊조리는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묵례를 하곤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러자 저를 따라 고개를 홱 돌린 미셸이 버튼을 눌러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멈춰 세웠다.
[혹시 시간 나면 어디 가서 나랑 얘기 좀 안 할래요?]
뜻밖의 제안에 저도 모르게 품에 안은 서류 뭉치를 꽉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차현서 씨랑 따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거든요.]
짧은 침묵이 맴돌았다. 미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네. 그러시죠.]
현서는 표정을 지운 얼굴로 답하곤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