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저녁에 고기 먹을래요? 스테이크에 위스키 말고, 삼겹살에 소맥. 어때요?」
오늘은 손끝 하나 안 건드릴 테니 집에 가서 같이 일하자 했더니, 차현서는 꼭 저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야근할 때 위스키 한 잔을 하면 집중에 도움이 된다는 제 말을 멋대로 해석한 거였다. 도대체 일을 하자는 건지 저랑 놀자는 건지. 자신이 여우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여우짓을 하는데 그저 귀엽기만 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터뜨리자 운전대를 쥔 레오가 백미러로 시선을 흘긋댔다.
[왜. 또 속으로 무슨 내 욕을 했어.]
[뭐…. 별로 많이는 안 했습니다. 미셸이 지금 본부장님 얼굴 보면 경악을 하겠구나, 하는 정도?]
[후. 아직도 비행기를 안 타셨대?]
[H호텔에서 지내고 있어요, 계속. 포기할 생각 없는 것 같던데요.]
[내 주변엔 왜 이렇게 고집 센 사람이 많지?]
[원래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죠.]
정혁은 생각만으로도 골이 울리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미셸 얘기를 하다 보니 또 자연스레 떠오른 골 아픈 상황 때문이다.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가능하다면 최대한 지금껏 쌓아 온 것들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녀 말대로 쉬운 길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니 이토록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것이겠지만.
검은색 세단이 골드스톤 건물 입구 앞에 매끄럽게 멈춰 섰다. 차를 알아본 로비의 경호 직원이 문을 열었고, 정혁은 차에서 내려 곧장 안으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을 슈트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고개를 드는 순간, 불쑥 낯선 구두코가 제 앞을 가로막고 섰다. 표정을 지운 싸늘한 얼굴이, 마주 선 상대를 그대로 직시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군요, 김준한 변호사님.”
결코 반갑지 않은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행여 김준한이 또 차현서를 만나기 위해 온 건 아닐까 싶어서. 아니, 어쩌면 이미 만나고 돌아가는 길일지도 몰랐다.
“차현서 씨 만나러 오셨습니까?”
가정하는 순간, 기분이 바닥을 치고 속이 왈칵 뒤집혔다.
“아뇨. 오늘은 본부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정혁은 느긋이 눈을 아래로 깔아 준한이 들고 있는 서류 가방을 흘긋 보며 물었다.
“무슨 용건으로?”
“제가 수임한 사건 조사 차원으로요.”
“사건?”
“괜찮으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시죠. 이렇게 여기 서서 드릴 말씀은 아닌 것 같아서요.”
“미안하지만 내가 좀 바쁩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뉴스에 하루걸러 하루 텀으로 보도되는 그 일 때문에.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죄송하게 됐군요.”
바쁘단 말과 달리 느긋하고 건방진 목소리를 내뱉는 남자를 바라보며, 준한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밀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오만하게 저를 훑던 남자가 거침없이 제 옆을 망설임 없이 스쳐 지나쳤을 때였다.
“서종진 전 서울 중앙 지검 경제 범죄 전담부 부장 검사가.”
널찍한 로비에 준한의 목소리가 제법 크게 울려 퍼졌다. 아니나 다를까, 바쁘게 움직이던 정혁의 발끝이 그 자리에 타박, 멈춰 선다.
“돌아가신 아버님 되시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묻는 준한의 표정도 썩 심각하게 굳어 갔다. 결코 그에게 바라지 않았던 반응이었다.
***
무채색의 사무실 안, 괴괴한 정적을 깨고 준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쁘시다니 본론만 하겠습니다. 얼마 전 저희 펌에 형사 사건 피의자로 지목된 의뢰인의 위임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그 담당 파트너 변호사로 그 케이스를 수임했고요. 미성년자 유괴 교사 혐의입니다.”
비스듬히 다리를 척 꼰 채 마주 앉은 남자의 표정은 도무지 그 속을 가늠할 수 없게 차갑고 무감했다.
그럼에도 준한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꾸준히 그의 표정을 읽으려 노력했다. 서정혁을 떠보고, 자극하고 싶었다.
“다행히 피해 아동은 무사히 부모 품으로 돌아갔고, 아이를 유괴한 피의자도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안타깝게도 저희 의뢰인이 그 사건의 범행을 교사한 혐의로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요.”
“최근 광수대에서 과거 강력 미제 사건에 대해 대대적으로 재조사를 하고 있는데, 혹시 아실지 모르겠네요.”
“네, 모릅니다. 워낙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그러시군요.”
이쯤 말을 꺼냈음에도 동요 한 자락이 없는 남자의 차가운 동공을 똑바로 응시하며 준한은 말을 이었다.
“경찰에선 광수대가 조사하는 과거 유괴 사건과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이 꽤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제 의뢰인의 혐의를 과거 사건과 엮어 보고 있습니다. 물론 미제 사건의 대부분이 그렇듯 이 사건 공소 시효도 오래전에 종료되긴 했지만요. 아마도 무의미한 행위에 이렇게까지 힘을 쓰는 걸 보면 법적 처벌보단 정치적, 도덕적 처벌을 원하는 어떤 높으신 분의 의견이 적잖이 반영된 것 같단 게 제 사견이고요.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제 의뢰인이 사회적으로 꽤 명망이 있는 분이라서요.”
서정혁은 여전히 새카만 눈을 느긋하게 깜빡이며 준한의 본론을 재촉했다.
“제가 그 미제 사건의 수사 기록을 요청해 들여다보다가 낯익은 이름을 봤습니다.”
처음엔 그저 동명이인일 뿐이라 생각했다. 서정혁. 흔하다면 흔하다 여길 수 있는 이름이니까. 그런데 유괴됐던 아이의 아버지, 서종진 부장 검사의 사진을 확인한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됐다. 한눈에 띌 만큼 조화롭고 또렷한 서종진의 이목구비는 제가 아는 라이언 서, 서정혁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아이 둘이 다 유괴가 됐었어. 당시 꽤 떠들썩한 사건이었지. 법조인에 대한 명백한 보복 범죄라고, 대한민국 행정·사법 체계의 근간을 뒤흔들 도전이 아니냐고 아주 난리였고. 그런데, 그 난리가 무색하게 범인은 결국 못 잡았어. 안타깝게도 지병이 있었던 딸애는 죽었고, 첫째 아들만 살아남았는데 그 뒤론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서…. 그 사내애는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모르겠네. 아니, 살아는 있으려나?”
중앙 지검 차장 검사로 현직에 있는 준한의 어머니 오미란은 연수원 시절 바로 위 기수 선배였던 서종진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했다.
준한은 그 비극을 겪은 당사자가 라이언 서, 서정혁이란 사실에 본능적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나한테 알고 싶은 게 뭐죠?”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한국에 온 건가. 왜 하필이면 차현서 앞에 나타나 그 여린 마음을 뒤흔들었나. 꿍꿍이가 뭘까. 준한은 제 앞의 이 위험한 남자의 속을 샅샅이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내가 김 변호사님 의뢰인에게 유리한 증언이라도 해 주길 바랍니까?”
어조에 고저는 없었으나 말끝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당시 일시적 실어증 증세로 증언을 못 하셨단 기록을 봤습니다. 혹시 범인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십니까?”
“아뇨.”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당시 기억나는 특별한 상황은요?”
“없습니다.”
“혼자만 겨우 도망쳐 나오셨던 거로 아는데, 조력자나 목격자에 대한 것도 기억나는 게 없으신가요?”
“네. 없습니다.”
“실어증 치료를 받고 난 이후에도 스스로 증언을 거부하셨죠. 곧바로 어머님과 함께 미국행을 택하셨고요. 어머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셨던 이유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역시 없군요.”
“그럼 한국엔, 왜 돌아오셨습니까?”
결국,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 중 하나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분연히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아. 취조였던가요?”
코웃음을 치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남자의 얼굴엔 명백한 적의가 묻어났다.
“내가 이 취조에 응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데.”
도통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서늘한 눈동자가 제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자신의 공간에서 꺼지라는 듯.
“혹시 더 할 말 있으십니까? 다른 용무라던가.”
정혁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노골적으로 힐끗대며 물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준한이 잠시 다물었던 입술을 열어 정적을 깼다.
“나는 서정혁 씨 당신이 굉장히 불길합니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그랬고, 그 기분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우리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게.”
“갑자기 한국에 온 거, 온전히 서정혁 씨 의지라고 들었습니다. 왜 왔습니까? 저 같으면 상처만 가득한 이곳에 다신 오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데, 굳이 온 이유가 뭡니까? 그때 못 잡은 범인 잡는 거, 그래서 지금이라도 복수하고 응징하는 거. 그게 당신 진짜 목적입니까?”
공소 시효도 이미 끝이 나 버린, 증거도 증인도 모두 다 사라진 지 오래인 사건을 구태여 다시 꺼내 들쑤시고 있는 장본인. 서정혁은 아마도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이런 시나리오를 오랫동안 준비해 온 듯싶었다.
그런 한편 이상하기도 했다. 상대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유명 정치인이었다. 하려면 더 크게, 부풀려 터뜨릴 수도 있을 일을 외려 감추고 조용히 넘어가려 하는 듯 보이는 건 또 무슨 이유인 건지.
“설마하니 당신 계획에 차현서도 포함되어 있었던 겁니까? 많고 많은 변호사, 널리고 널린 유능한 인재들 중에 구태여 차현서를 콕 집어서 당신이 짠 판에 끼워 넣은 이유가 뭡니까. 이 모든 게, 현서를 건드린 게, 다 고의인 것 같단 생각은 그저 제 기분 탓입니까?”
서정혁의 음흉함과 주도면밀함이 두려웠다.
“그럴 리가요. 뭐든 의도와 목적 없이 이뤄지는 일은 없죠. 특히나 제가 구르던 바닥에선 더더욱.”
태연하고 뻔뻔한 대답은 끔찍하기까지 했다.
“계속하세요. 그래서요?”
“그래서 나는 서정혁 당신이 현서 옆에 있는 게 싫단 말을 하는 겁니다. 거슬리고, 불안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혁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역시나, 이하 동문입니다만.”
낮게 읊조리곤 표정을 굳힌 짙은 눈썹이 설핏 들썩였다. 그는 짧고 무거운 침묵을 가르며 다시 입을 뗐다.
“하려던 말씀 얼추 다 하신 듯한데, 이번엔 제가 하나 물을까요.”
정혁은 느긋이 등받이에 기대앉았던 상체를 세우며 팔걸이에 팔꿈치를 턱 걸쳐 올렸다. 몸에 밴 위압과 오만이 눈앞의 상대를 짓누르듯 제압했다.
“김준한 씬 그 여자 옆에 무슨 자격으로 붙어 계십니까.”
이제껏 표정 하나 내보이지 않고 감정을 철저히 감추던 남자가 돌연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
준한은 남자의 표정 하나, 행동 하나가 모두 다 철저히 계산된 것임을 잘 알았다. 뱀 같은 남자의 의도적 추궁. 이유는 뻔했다.
“차현서한테 기대할 감정, 눈곱만큼도 없다는 거 잘 알면서.”
“…….”
“부득불, 옆에서 계속 얼쩡대는 당신 의도와 목적이 뭐냐고.”
준한은 어금니를 꾹 눌러 물었다.